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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든든한 선배 (67/118)


67. 든든한 선배
2022.09.20.


다음 날, 드라마 <패밀리> 야외 촬영장.


“수희야, 오늘도 수고했어.”

촬영을 끝낸 화정이 사복으로 갈아입고 와 수희를 껴안고 등을 토닥였다.

드라마 속에서 사이좋은 모녀 사이를 연기하다 보니 화정의 스킨십이 어색하지 않았다.

이따금 화정이 애란을 떠올리게 했기에, 수희는 가끔 추억에 젖기도 했다.

왜 우리는 드라마 속 모녀처럼 지내지 못했을까, 고민해 보기도 했다.

애란의 생각에 잠겨 있던 수희의 시선이 발치로 떨어졌다.

무심결에 내려간 시야에 동그란 진주와 다이아몬드가 앞코에 박혀 있는 구두가 담겼다.

화정의 품에서 떨어진 수희가 구두를 바라보며 물었다.


“구두 예뻐요. 이 구두 나비아 제품 맞죠?”

나비아는 명품 가방과 구두, 액세서리를 전문으로 만드는 브랜드였다.

그중에서도 나비아의 구두는 모든 여자가 꿈꿀 만큼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구두는 비싼 가격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한국에 딱 세 켤레 들어온 디자인이야. 겨우 구했다고 생색내면서 주더라고.”

“아, 선물 받으신 거예요?”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화정이 활짝 웃어 보였다.


“응. 그 사람은 내가 해 달라는 건 다 해 주거든.”

‘그 사람’이라고 칭한 게 화정의 남자친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하더라도 한 켤레에 500만 원이 넘는 구두를 선물하지는 않을 것이다.


“좋으시겠어요. 선배님이랑 정말 잘 어울려요.”

“고마워. 언제 한번 그 사람이랑 같이 밥 먹으면 좋겠다.”

“저랑요?”

“응. 그 사람이 수희 네 팬이야.”

남자친구냐고 묻는 것 자체가 실례인 것 같아 수희가 잔잔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팬이라니, 감사하네요. 시간 날 때 같이 식사 한번 해요.”

“이렇게 싹싹한 딸을 누가 낳았을까? 네가 진짜 내 딸이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의 바람을 입에 올린 화정이 수희의 등을 쓸어내렸다.


“지금은 이 싹싹한 딸이 선배님 딸 맞잖아요.”

사근사근한 수희의 태도에 화정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좋아 죽겠다는 듯 수희를 두 팔로 꽉 끌어안은 화정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래. 내가 네 엄마지. 엄마야.”

 

 
그러다 돌연 가자미눈을 하고 화정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촬영 끝나고 나서도 이 엄마랑 계속 연락하고 지내는 거야.”

“당연하죠, 엄마.”

익숙하게 입에 붙는 엄마 소리에 화정이 수희를 좀 더 와락 껴안았다.


“널 정말 어떻게 할까? 예뻐 죽겠다니까.”

소중하게 수희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은 화정이 촬영장 앞에 도착한 자신의 밴을 발견했다.


“개인 촬영 아직 남아 있지? 내일 또 보자.”

“네, 들어가세요, 선배님.”

“파이팅, 우리 딸!”

친근하게 딸이라고 부르며 화정이 자신의 밴에 올라탔다.

그리고 밴이 완전히 촬영장을 떠나기 전까지 수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자신을 응원해 주는 든든한 선배가 생긴 것 같아 수희는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

모든 촬영을 마치고 밴에 올라탄 수희가 휴대폰을 바라봤다.

매번 승만이 자신을 찾아왔던 터라 휴대폰 번호를 받아 둔다는 걸 잊고 있었다.

이식을 결정했으니 하루라도 빨리 승만에게 알려 주는 게 낫겠다 싶었다.

화정이 승만과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라고 했으니 화정에게 번호를 물을까 싶기도 했다.

휴대폰에 뜬 화정의 이름을 보던 수희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귓가에 긴 신호음이 이어졌지만, 화정은 끝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괜히 쉬고 있는 화정을 방해하는 건 아닐까 싶어 수희는 다시 전화하려던 걸 관뒀다.

휴대폰을 내려 두는데 화장실을 다녀온 철용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집으로 가면 되지?”

“오빠, 나 갈 곳이 있는데.”

철용이 룸미러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디? 한 대표님 댁으로 갈까?”

“아니, 나 아빠 작업실로 가려고.”

승만의 작업실 앞에 도착한 수희가 잠시 망설이다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리는데도 승만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오늘은 작업실이 아닌 집에 있는 걸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무작정 찾아온 건 자신이니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다 해도 어쩔 수 없겠다 생각했다.

승만에게 휴대폰 번호라도 남기고 가자 싶어, 수희가 핸드백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려던 참이었다.

안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굳게 닫혀 있던 작업실 문이 열렸다.

헝클어진 머리에 벌어진 와이셔츠 차림의 승만이 수희를 맞이했다.


“수희야. 여긴 어쩐 일이야.”

반가움보다는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주무시고 계셨나 봐요.”

“어?”

수희는 붕 뜬 승만의 머리를 검지로 가리켰다.


“머리가 주무시고 일어나신 것 같아서요.”

“아냐, 아냐. 작업 중이었어.”

“그럼 다음에 올까요?”

“들어와. 작업은 나중에 하면 되지.”

승만이 현관문을 활짝 열어 주자 수희가 안으로 들어섰다.

어제도 찾아왔던 작업실인데 뭔가 그때 느꼈던 분위기와는 조금 다른 듯했다.

책 냄새가 났던 어제와 달리 진한 향수 냄새가 곳곳에 퍼져 있었다.

코를 찌르는 향수 냄새가 왠지 익숙해 수희의 미간 사이가 설핏 좁혀졌다.


“수희야, 차 줄까? 아니면 커피?”

승만의 물음에 수희는 작업실을 맴도는 향수 냄새의 출처에 대한 궁금증을 지웠다.


“차 마실게요.”

수희의 말에 승만은 곧장 주방으로 가 커피포트에 물을 담았다.

뭔가 어수선한 듯한 작업실을 둘러보던 수희가 식탁 앞에 앉았다.

따뜻한 차 두 잔을 가지고 온 승만이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촬영은 잘 끝냈니?”

“네. 방금 끝내고 오는 길이에요.”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던 수희가 핸드백 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까 제가 아빠 휴대폰 번호도 모르고 있어서요.”

“너 본 게 반가워서 휴대폰 번호 알려 주는 것도 잊었네.”

휴대폰을 받아 든 승만이 번호를 누르고는 다시 수희에게 내밀었다.


“자주자주 연락해. 이제 원 없이 네 목소리 듣고 싶으니까.”

새로이 찍힌 승만의 번호에 수희는 ‘아빠’라고 저장한 뒤 휴대폰을 제자리에 넣어 두었다.


“주형이한테는 아빠 만난 거 아직 말 못 했어요.”

“이번 주 토요일이 네 엄마 생일이지? 그날 집에 가서 주형이도 만나고 싶구나.”

그렇지 않아도 토요일에 주형과 함께 애란의 제사를 지내기로 했었다.


“아빠 보면 주형이가 정말 좋아할 거예요.”

말은 하지 않아도 애란의 빈자리를 느낀 주형 역시 승만이 보고 싶을 것이다.


“내가 가는 건 비밀로 하자. 주형이 놀라게 해 주고 싶어.”

“그렇게 할게요.”

주형이 승만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어쩌면 승만을 보고 펑펑 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걱정되는 게 한 가지 있었다.


“아빠.”

“응?”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수희가 입술을 달싹거리다 어렵사리 목소리를 냈다.


“엄마한테 남자가 있었다는 건 주형이한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

“주형이 이제 스물둘이고, 곧 복학도 해야 해서 신경 쓰이는 일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아요.”

애란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직후, 패닉에 잠긴 주형은 말도 없이 휴학계를 냈다.

몇 달 뒤면 애란의 일주기니 주형도 늦지 않게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네 말대로 하마.”

승만이 입을 다물어 주겠다고 하니 수희는 걱정을 조금 덜 수 있었다.

짧은 숨을 토해 내는 수희를 보며 승만이 식탁에 팔을 기댄 채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할 이야기가 더 있는 거지?”

숨기려고 해도 근심이 담긴 얼굴은 자꾸만 밖으로 드러났다.


“사실, 아빠를 찾아온 이유가 있어요.”

“그래, 편하게 이야기해.”

작업실 안에 잠깐 침묵이 도나 싶더니, 수희가 늦지 않게 입술을 떨어트렸다.


“아빠 간 이식, 제가 해 드리고 싶어요.”

“수희야.”

수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승만이 엄하게 수희의 이름을 불렀다.


“알고 있어요, 아빠가 하려는 말이 뭔지.”

승만이 말릴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희의 뜻은 변하지 않았다.


“저도 생각 많이 했어요.”

“…….”

“저희 두고 떠난 아빠 완전히 용서한 것도 아니고요.”

승만은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수희를 나무랐다.


“그런데 왜, 왜 그런 선택을 하려는 거야.”

오늘 시간이 날 때면 간 이식에 대해 알아봤다.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배에 남겨지고, 수술로 인해 수많은 부작용까지 감수해야 했다.

어쩌면 꽤 오랫동안 연기를 다시 시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간 이식을 결정한 건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아빠를 살리고 싶으니까요.”

“……수희야.”

“6개월 시한부 인생이 아니라, 오랫동안 우리 곁에 남아 있으면 해요.”

“…….”

“그러니까 더는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안경을 벗은 승만이 시큰거리는 눈가를 주먹으로 막았다.

나오려는 눈물을 꾹꾹 찍찍 누르며 승만이 웅얼거렸다.


“내가 널 볼 면목이 없구나.”

고개를 식탁 쪽으로 푹 숙인 승만의 등이 크게 들썩거렸다.


“너한테 그렇게 큰 상처를 남기고, 결국에는 네 덕분에 살아가는 게.”

입고 있던 겉옷 주머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낸 승만이 눈물을 닦아 냈다.

식탁 위로 손을 올린 수희가 승만의 마른 손을 붙잡았다.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요.”

“…….”

“아빠가 쓴 드라마처럼. 그 가족처럼 우리도 살 수 있잖아요.”

비록 애란은 곁에 없지만, 승만이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됐다.

애틋한 가족애를 담은 드라마 <패밀리>가 어쩌면 승만의 바람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러자, 수희야. 우리 가족 다시 시작하자.”

다짐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서는 힘이 넘쳐났다.


“최대한 빨리 수술하고 싶지만, 아직 촬영이 많이 남아 있어서요.”

“그래. 촬영 중에는 수술이 어렵겠지.”

“공여자 검사는 미리 받아 둘게요. 촬영 끝나고 나서 바로 수술할 수 있도록요.”

승만이 수희의 여린 손을 쓰다듬으며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까지 내가 어떻게든 버티마.”

수희는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승만의 손을 바라봤다.

승만이 간암이라는 사실을 우연찮게 알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진단서가 아니었다면 승만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덧 작업실에 온 지 한 시간이나 흘렀다는 걸 알고 수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이만 가 볼게요.”

“피곤하겠네. 얼른 들어가 봐.”

승만의 배웅을 받으며 수희가 현관에 있는 구두를 신었다.

바닥으로 향한 시선이 현관 구석에 곱게 놓여 있는 구두로 옮겨 갔다.

승만의 운동화 옆에 나란히 놓여 있는 구두를 보고 수희가 숙였던 허리를 들어 올렸다.

수희는 몇 시간 전에 저 구두를 본 적이 있었다.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구두가 아니었다.

특별한 구두라는 건 이미 화정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한국에 딱 세 켤레 들어온 디자인이야.”

몇 시간 전에 촬영장을 떠나던 화정이 신고 있던 나비아 한정판 구두였다.

승만은 구두를 신은 채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수희에게 물었다.


“왜 그래, 수희야.”

“아빠.”

무겁게 불리는 자신의 이름에 승만은 말없이 눈만 키웠다.


“지금 여기에, 우리 말고 또 누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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