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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같이 살까? (68/118)


68. 같이 살까?
2022.09.24.



 


“지금 여기에, 우리 말고 또 누가 있어요?”

승만은 그제야 현관에 놓여 있는 구두를 발견했다.

잠깐 입매가 굳나 싶더니 그가 호탕하게 웃으며 신발장을 열어 보였다.


“보조 작가가 다른 신발을 신고 갔나 보네.”

신발장 안에는 승만의 신발뿐만이 아니라 여성의 구두와 운동화도 놓여 있었다.

승만이 구두를 집어 들고는 비어 있는 신발장 자리에 밀어 넣었다.

그런 다음 신발장을 닫은 뒤 주저하지 않고 딱 잘라 말했다.


“아빠는 작업실에 다른 사람 오는 거 안 좋아해.”

“저는 작업실에 저희 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 줄 알았네요.”

“아냐. 너 오기 한 시간 전에 보조 작가들은 집에 보냈어.”

구두가 화정의 것과 같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이미테이션 제품일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증이 풀렸는데도 불구하고 수희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목구멍에 가는 가시가 걸린 것처럼, 자신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게 있었다.


“김시운 작가님은 어떤 분이세요?”


“다정하지. 특히 나한테 더.”

회식 장소에서 김시운 작가에 관해 물었을 때, 화정은 남다른 애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현관 문고리에 손을 얹었던 수희가 자신을 지켜보는 승만에게 돌아섰다.


“하나 여쭤 볼 게 있어요.”

“응, 뭐든 물어봐.”

승만에게는 예의에 어긋난 질문일 수도 있지만 지금 묻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빠 사생활인 건 알지만…… 제가 알아 두어야 할 것 같아서요.”

“…….”

“저랑 드라마 같이 촬영하고 계시는 이화정 선배님이랑 아빠, 특별한 사이예요?”

작업실 안이 일순 삭막하리만큼 고요해졌다.

숨 막히는 침묵이 오가고, 승만이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화정 선배님께서 아빠랑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다고 해서요. 혹시나 해서 여쭤 본 거예요.”

극구 부인하듯 승만이 크게 손을 휘저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야.”

수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승만이 제 뜻을 똑똑하게 전했다.


“화정이랑은 오래 알고 지낸 사이가 맞아. 첫 작품 같이 하게 되면서 일적으로 친해지게 됐어.”

“제가 오해하고 있었나 보네요.”

승만과 연인 사이였다면 당연히 수희가 그의 딸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둘이 그런 사이라면 수희에게 자신의 연인을 직접 소개해 주고 싶다고 했을 리 없다.

고개를 돌린 수희는 승만이 구두를 넣어 둔 신발장을 바라봤다.


“화정 선배님도 오늘 똑같은 구두를 신고 있었거든요.”

남몰래 숨을 집어삼킨 승만이 헛웃음을 지었다.


“하필 보조 작가 구두 때문에 오해를 했구나.”

“이제 궁금한 것도 풀렸으니까 가 볼게요. 쉬세요.”

“그래. 가 봐라.”

홀가분한 기분으로 수희가 승만의 작업실을 떠났다.

복도에 들리던 수희의 구둣발 소리가 희미해지자 잠겨 있던 작은방의 문이 열렸다.


“무슨 이야기를 이렇게 오래 해?”

오랫동안 기다리다 지친 화정이 거실로 나오며 투덜거렸다.

주먹 쥔 손을 벌벌 떨며 승만이 화정에게 돌아섰다.


“도대체 수희한테 뭐라고 한 거야. 뭐라고 했길래 우리 사이를 의심해.”

잔뜩 화가 난 승만의 모습에도 화정은 태평하기만 했다.


“내가 무슨 대단한 말을 했다고 그래? 우리가 예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했을 뿐이야.”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의심을 사게 만들어.”

한껏 예민해진 승만이 꾸짖자 화정이 도리어 버럭 소리를 냈다.


“내가 또 말 좀 했으면 어때서? 우리 사이 언제까지 애들한테 숨길 거야?”

“아직은 아니야. 절대 안 돼.”

단호한 승만의 태도에 화정이 열을 올렸다.


“아까 들어 보니까 수희가 간 이식해 준다며. 그럼 된 거 아냐?”

“아직 수술 날짜 잡은 것도 아닌데 초 치려고 그러는 거야?”

“오수희 애 아니야. 저 나이면 아빠가 연애하는 것도 이해해 줄 수 있는 나이라고.”

“…….”

“나 당신만 바라본 지 15년째야. 도대체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데?”

시원스레 답을 내주지 못하는 승만에게 화정이 그간의 고생을 토로했다.


“와이프랑 이혼한다며. 그게 10년 전이야. 그런데 이혼도 못 하고 질질 끌다가 여기까지 왔잖아.”

머리가 아픈지 승만이 이마를 붙잡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잖아. 내가 와이프한테 이혼하자고 말 안 했어?”

“그래서 내가 지금이라도 결혼하자는 거 아니야.”

“10년을 기다렸으면서 고작 몇 달을 못 기다려?”

숨을 거칠게 내쉬던 화정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강요했다.


“간 이식만 하면 바로 결혼해.”

“괜히 수희한테 이상한 소리 해서 일 그르치지 말고.”

불똥 같은 호통이 떨어지자 화정은 서운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승만은 그런 화정을 달래 주기 위해 품에 안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우리 사랑 애들한테 인정받자. 10년 전에 못 한 결혼도 하고.”

“……정말이지?”

“그래. 수희가 간만 내주면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게.”

방금까지 씩씩거리던 화정이 승만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매번 이런 식으로 결혼을 피해 가는 승만이 뭐가 좋다고 자신의 젊음을 바쳤는지 알 수 없었다.

가정이 있는 승만에게 첫눈에 반했고, 비혼 주의라는 결심마저 버리게 되었다.

어쩌면 그와 결혼하고 싶은 건 애란의 남자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른 여자가 가지고 있는 남편이라 더 빼앗아 오고 싶었다.

15년 동안 원하던 승만과의 결혼이 눈앞에 있었다.

그걸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결혼만 한다면 수희는 철저하게 눈앞에서 치워 버릴 것이다.

승만 몰래 계획을 세워 두고 있던 화정이 남몰래 비소를 지었다.

***



“안녕.”

승조가 문을 열자 보이는 건 와인병을 손에 쥐고 흔들고 있는 수희였다.

승만의 작업실에서 돌아온 수희는 무작정 승조의 집으로 발걸음이 닿았다.

조금 전에 샤워를 마친 건지 승조는 흰 샤워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골짜기 같은 여덟 개의 복근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에 수희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점차 위험한 곳으로 향하는 물방울에 두 뺨이 조금씩 발그스레하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워하면서도 두 눈을 피하지 못하는 수희를 보고 승조는 웃음이 터졌다.


“들어와서 더 자세히 봐도 되는데.”

샤워 가운의 앞섶을 붙잡아 당기자 탄탄한 가슴이 활짝 드러났다.

선명하게 갈라진 복근에 확 눈을 뜬 수희가 한발 늦게 와인병으로 눈앞을 가렸다.


“오, 옷을 좀 입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런 것치고는 꽤 빤히 보던데.”

완벽한 몸을 가진 남자가 자신의 앞에 서 있는데 어떻게 눈이 안 갈 수가 있겠는가.

와인병을 내린 수희가 최대한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난 단지 승조 씨가 추울까 봐 걱정된 거예요.”

“이러면 안 춥겠네.”

바닥으로 떨어져 있던 시선을 끌어 올리자마자 수희의 눈앞에 살색이 다가왔다.

순식간에 승조가 수희의 허리를 끌어안았고, 수희의 이마가 콩 하고 그의 가슴팍에 닿았다.

탕, 하고 등 뒤에 있던 현관문이 닫히자 주변이 소음 하나 없이 조용해졌다.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가 자신의 것인지 승조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눈길을 들어 올려다보자 그 역시 수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승조 씨 생각보다 엄청 엉큼한 사람인 거 알아요?”

상체를 뒤로 뺀 수희가 최대한 승조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래서, 내가 엉큼해서 싫어?”

싫을 리가 있을까.

좋다. 좋아 죽겠다. 그게 문제였다.

오늘은 정말 그와 와인 한잔하기 위해 온 건데 다른 일을 치르게 될까 봐.

승조가 수희의 턱을 감싸 잡으며 그녀의 시선을 끌어왔다.


“왜 눈을 피해.”

“감기 걸려도 몰라요. 어서 옷 갈아입고 와요.”

좀 더 놀리다가는 수희의 두 뺨이 화르르 탈 것 같아 승조는 그만두기로 했다.


“거실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올게.”

수희의 머리를 쓰다듬은 승조가 복도를 지나 침실로 들어갔다.


“후아.”

침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수희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 위에 손을 얹어 보고 나서야 아까 콩닥거리던 게 자신의 심장 소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아, 왜 이렇게 두근거리지.”

승조의 눈부신 몸을 보자 정직한 심장이 불규칙하게 두근거렸다.

아직도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승조의 복근을 지워 보려 수희가 주방으로 가 두 팔을 걷어붙였다.

승조가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수희가 주방에서 막 과일이 담긴 접시를 가져왔다.


“와인 지금 마실 건데, 같이 마실 거죠?”

“좋아.”

수희가 소파에 앉으며 테이블 위에 있던 대본을 발견했다.

와인 한 모금을 홀짝거리며 수희가 대본을 들어 올렸다.


“드디어 11화 대본도 나왔네요?”

“이건 나중에 보자.”

옆에 앉은 승조가 수희의 손에 들려 있는 대본을 가져갔다.


“왜요?”

승조가 수희 쪽으로 완전히 몸을 틀며 수희를 지그시 바라봤다.


“일단 너부터 보려고.”

“우리 어제도 봤는데.”

점차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 수희는 저절로 눈이 감겼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입술이 입술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


“어제도 봤으니까 오늘 더 보고 싶은 거야.”

이 남자, 진짜 이제 직진만 할 건가 보다.

쉴 새 없이 이리 들이받으니 수희의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연애하면 이런 스타일이었구나, 승조 씨.”

“언제까지 승조 씨라고 부를 거야?”

“그럼 뭐라고 불러요?”

“더 좋은 호칭들 많잖아.”

“어떤 게 있지.”

고심하던 수희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후보 호칭들을 하나씩 입에 담았다.


“여보?”

“…….”

“자기야?”

“…….”

어째 승조의 표정이 점차 굳어진다.

알 수 없는 그의 생각에 수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니?”

이것도 아닌가.

원하는 걸 말해 보라고 하려던 찰나, 승조가 수희에게 돌연 입을 맞춰 왔다.

맞물리는 입술에 수희가 다물려 있던 잇새를 벌렸다.

와인으로 달아오른 입 안으로 흘러들어 온 숨결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얼굴을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을 감싸 쥔 수희가 밭은 숨을 내쉬었다.

도톰한 입술 표면이 그의 입술에 눌리고 뭉개졌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키스가 연이어 이어지고, 수희는 참을 수 없는 목마름을 느꼈다.

한참 뒤 습기 찬 그의 입술이 떨어지자, 감겨 있던 수희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네가 좋아서 미치겠다, 수희야.”

들끓는 듯한 그의 음성이 수희의 귓바퀴를 빙글 돌았다.

촉촉하게 물기 어린 수희의 입술을 바라보며 승조가 말했다.


“다시 해 줘.”

“뭘요?”

“여보, 자기야, 허니. 다 좋으니까 다시 불러 봐.”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뱉었을까.

수희가 자신의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승조에게 이실직고했다.


“막상 멍석 깔아 주니까 못 하겠는데.”

“어서 해 줘.”

“으으으음.”

승조의 성화에 수희가 끙끙 앓았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나오려던 말도 도로 들어가고 말았다.


“우리 오빠로 합의 보면 안 될까요?”

“실컷 듣기 좋은 말 다 해 놓고 오빠로 합의 보는 거야?”

“좀 봐줘요. 나 지금 내가 말해 놓고 닭살 돋았거든요.”

“오빠는 안 돼.”

그렇게 나온다면 수희도 다 방법이 있었다.

동그란 눈을 더욱 반짝반짝 빛내며 승조를 올려다봤다.


“오빠.”

“…….”

“좀 봐주면 안 돼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빠는 안 된다고 철통 방어하던 승조였다.

그러나 간드러진 수희의 애교에 승조의 방패가 사르르 녹고 말았다.

저러니 어찌 더 강요할까.

수희의 허리를 두 손으로 붙잡은 승조가 그녀를 들어 올려 자신의 다리 위에 앉혔다.


“넌 날 다루는 법을 너무 잘 알아.”

 

 
턱 끝을 들어 올린 승조가 수희의 입술을 머금었다.

어제보다 더 그녀와 닿고 싶었다. 좀 더 깊게, 좀 더 많이.

수희의 허리에 머물러 있던 승조의 손이 등줄기를 쓸어 올리자 수희의 상체가 곧게 섰다.

어제와는 달리 승조의 키스가 입 안이 저릴 만큼 정성스러웠다.

서로의 아랫배가 밀착하자 승조의 입술이 다시금 벌어져 수희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수희의 입술을 삼키면 삼킬수록 더욱더 단맛이 나 중독되어 놓아줄 수가 없었다.

흐릿한 신음을 흘리던 수희가 점차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그의 셔츠를 가만히 붙잡았다.

힘이 들어가는 그녀의 손을 느낀 승조가 입술을 떨어트려 놓았다.

통금 시간이 정해진 신데렐라처럼 수희의 고개가 벽에 붙은 시계로 돌아갔다.

아쉽게도 내일 오전부터 촬영 스케줄이 잡혀 있으니 늦지 않게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수희는 시간이 멈추길 바라며 시계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수희와 헤어지고 싶지 않은 건 승조도 마찬가지였다.


“수희야, 같이 살까?”

그가 진심이라는 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수희가 웃어 보였다.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당연하다는 듯 그의 대답이 돌아왔다.


“말했잖아. 나 너 이번엔 안 놓친다고.”

도망갈 곳도 없고, 그의 곁을 떠날 일도 없었다.

지금은 그와 보내는 하루하루가 아까울 정도로, 승조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나 어디 도망 안 가요.”

“도망가도 돼.”

“…….”

“내가 잡으러 가면 되니까.”

너무 행복해서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승조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삶은 절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모든 게 끝난 것 같은 순간 그가 찾아왔고, 다시 새로운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다.

이대로 끝없이 행복이 계속 이어지길 바라고 있었지만, 인생은 그리 순탄하게만 흘러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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