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흑화(黑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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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흑화(黑化)
2022.10.01.
“주형아, 아빠 왔다!”
뒷장까지 빼곡하게 적혀 있는 진술 청구 원인을 수희는 차마 다 읽을 수가 없었다.
치가 떨리는 배신감에 수희는 입 안에서 피 맛이 느껴질 만큼 입술을 짓눌러 깨물었다.
“네 엄마한테 남자가 있었어.”
세상을 떠난 애란이 더는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해 승만이 거짓을 뱉은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잔뜩 상처받은 얼굴로 이야기하던 승만의 모습이 떠올라 가증스러웠다.
수희는 승만의 말만 믿고 애란을 원망하고 미워했다.
애란에게 남자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우리 가족은 더없이 단란했을 거라 여겼다.
여자에 미쳐 가정을 버리고, 화목한 가정을 깨트린 건 승만이었다.
승만의 불륜 사실을 알고도 애란은 저 혼자 슬픔을 삭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 진짜…… 진짜 아빠야?”
안에서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승만은 주형과 눈물겨운 상봉을 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나가 승만에게 당장 이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소장을 움켜쥔 채 밖으로 나가려는데, 주형이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빠. 아빠!”
주형은 10년간의 부재를 남긴 승만에게 안겨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서럽게 울려 퍼지는 주형의 울음소리에 수희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리고 말았다.
“허어어엉. 아빠. 진짜 보고 싶었어. 왜 이제 나타난 거야. 왜 이제야 온 거야!”
“아빠도 사랑하는 우리 아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경멸스러운 목소리가 수희의 등줄기를 타고 기어 다니는 것만 같았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했지만, 주형 때문에 억지로 참아 내고 있었다.
수희가 방에서 나오지 않자 승조가 노크 후 안으로 들어왔다.
싸늘함이 감도는 수희의 분위기에 승조는 조용히 등 뒤에 있는 문을 닫았다.
그 찰나에 거실에서 승만과 주형이 껴안고 있는 모습이 수희의 눈에 들어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오빠.”
입 밖으로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차마 다음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제 입으로 모든 사실을 밝힐 용기가 나지 않았다.
믿었던 가족에게 배신당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처량했다.
승만이 감추고 있던 더러운 과거를 알지 못하고 용서하려고 했던 게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소장을 들고 있던 팔을 힘없이 들어 올리자 승조가 종이를 가져갔다.
굵은 글씨로 적혀 있는 소장이란 단어 아래에 피고의 정보가 적혀 있었다.
[피고 박해숙 / 서울시 성동구 왕십리로 XX]
이어 한 면에 가득 채워진 청구 원인을 읽고 승조의 미간 사이에 짙은 주름이 새겨졌다.
소장을 읽고 나서야 승조는 왜 수희가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했는지 알게 됐다.
절망과 배신감으로 엮여 버린 수희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승조의 앞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애란에게 남자가 있어 자신의 아버지가 떠났다고 했을 때도 이렇게 부끄럽진 않았다.
그건 아마 애란이 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애란에게 모든 걸 다 뒤집어씌운 가증스러운 인간은 저 문 밖에 서 있었다.
“미안해요. 오빠한테.”
“뭐가 미안해.”
“…….”
“수희야.”
승조를 외면하며 수희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 진짜 오빠한테 너무 창피한 거 알아요?”
방문 안으로 기어들어 오는 승만의 음성에 수희가 제 귀를 붙잡았다.
“사실 불륜을 저지른 건 아빠래요. 난 그것도 모르고 엄마를 미워했어요. 다 엄마 탓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움켜쥐고 있던 손을 아래로 떨어트린 수희가 문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뻔뻔하게 엄마 앞에 다시 나타난 저 사람이 내가 알던 아빠라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실핏줄이 두드러지며 수희의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런 사람을 아빠라고 보여 주려 한 게 너무 부끄러워.”
“이해할 수 있어, 네가 어떤 감정인지.”
“…….”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나도 너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상황을 겪어 봤으니까.”
병호가 불륜을 저지른 건 아니었지만, 이혼하자마자 여자들을 쉼 없이 갈아 치웠다.
승조가 FL 그룹의 회장, 한병호의 외동아들이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병호의 열애설이 터질 때마다 사람들의 입방아에 덩달아 올라가는 건 승조였다.
사람들은 승조를 불쌍히 여기기도 했고, 병호를 욕하기도 했다.
어린 나이였기에 더더욱 병호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한때는 병호가 증오스럽고 경멸스럽기까지 했다.
그때 아버지를 미워했던 감정이 지금 수희가 느끼는 감정과 비슷할 거라 여겼다.
“오빠, 나 너무 화가 나. 너무 화가 나서 속이 터져 버릴 것 같아.”
심장에 불꽃을 심어 놓은 것처럼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듯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건 모두 주형 때문이었다.
승만의 사랑을 기다린 건 자신만이 아니었다.
말하지 않아도 주형 역시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승만을 그리워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승만의 본모습을 알게 된다면 주형은 자신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스물둘, 어머니의 부재와 아버지의 불륜을 과연 주형이 버텨 낼 수 있을까.
“나 주형이한테는 말 못 해요. 이걸 어떻게 말해.”
수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승조가 두 팔을 붙잡아 부축하자 겨우 다리를 바로 세울 수 있었다.
“주형이한테 이건 비밀로 해요. 내가 해결할게요. 내가 해결할 수 있어요.”
고개를 격하게 저은 수희가 결론을 내렸다.
애란이 떠나고 나서 이 가족의 기둥은 오롯이 수희가 되어야 했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게 할 수 없으니 수희가 주형의 우산이 되어 주려 했다.
동생만은 자신만큼 아프지 않았으면 해서였다.
그때, 닫혀 있던 문이 예고도 없이 벌컥 열리며 주형이 튀어 들어왔다.
“누나! 아빠 오는 거 알고 있었다며?”
수희는 승조의 손에 쥐어진 소장을 가져가 자신의 등 뒤에 숨겼다.
방금까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수희가 밝게 웃어 보였다.
“너 놀라게 해 주려고 미리 아빠랑 이야기해 뒀지.”
끌어 올린 입술 끝이 옅게 떨리는 것은 가까이 서 있는 승조만이 알 수 있었다.
억지로 웃고 있는 수희를 보니 승조의 가슴은 저미다 못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승조는 도저히 지켜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리다, 무심결에 승만과 눈이 마주쳤다.
아무것도 모르는 승만은 승조를 보고 흐뭇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우리 딸이랑 사귀는 남자친구이자, 내 드라마 제작사 대표님 맞죠?”
“…….”
“반가워요. 김시운 작가이자 오수희 아빠 오승만입니다.”
수희의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승조는 수희를 데리고 이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것이다.
어쩌면 수희의 가슴에 칼날을 꽂은 승만에게 악독한 말을 쏟아 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수희가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주형의 앞에서만은 티를 내서는 안 됐다.
제 옆에서 힘겹게 웃음 짓고 있는 수희를 봐서라도 그러면 안 됐다.
승조는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승만의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반갑습니다. 한승조라고 합니다.”
“우리 수희 잘 부탁드려요.”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수희, 제가 잘 보살필 테니까요.”
“그래야지. 우리 수희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내가 가만히 안 있지.”
아무것도 모르는 승만은 너스레를 떨며 승조의 손등을 다른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수희가 승조의 손목을 붙잡으며 승만의 손에서 거두어 갔다.
승만이 만지는 것만으로도 제 사람이 더럽혀지는 것 같았다.
“시간도 늦었는데 어서 제사 지내요.”
주형은 자신보다 작은 승만에게 엉겨 붙으며 떨어지지를 않았다.
“아빠, 나 배고파. 어서 제사 지내고 같이 밥 먹자.”
“그래. 얼른 제사 지내고 아빠랑 대화 좀 하자. 아빠가 우리 주형이랑 나눌 이야기가 많아요.”
주형과 승만이 방을 나가자 수희가 손에 쥐고 있던 소장을 핸드백 안에 넣어 두었다.
바닥에 놔두었던 애란의 영정 사진을 승조가 건네자 수희의 초점이 한순간에 뒤흔들렸다.
방금까지 주형에게만은 모든 걸 비밀로 할 수 있다고 했건만, 그 다짐이 애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무너져 내렸다.
영정 사진 속 애란은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가 너무나 서글퍼 보였다.
애란의 사진을 손으로 쓸어내린 수희가 승조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죽어서도 보기 싫을 것 같은 승만을 다시 엄마와 마주하게 해야 했다.
하늘에 있는 애란이 지금 이 상황을 본다면 얼마나 분통할까. 얼마나 속상할까.
“오빠는 내 옆에 있어 줘요. 어디도 가지 말고.”
수희가 승조의 허리춤을 붙들고 흐느꼈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승조가 낮게 읊조렸다.
“네가 보이는 곳에 서 있을게.”
늘 그랬던 것처럼.
“버텨, 수희야.”
건널 수 없는 길이라도 내가 다리를 만들어 줄 테니까.
넘어지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줄 테니까.
네가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내어 줄 테니까.
그러니까 버텨야 해.
***
승조는 차를 세워 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고, 수희는 승만, 주형과 함께 아파트 밖으로 나왔다.
“아빠랑 헤어지는 게 왜 이렇게 아쉽지?”
애란의 아파트 앞에서 주형은 한참 동안 승만과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승만이 가정을 버리고 사라졌던 때가 주형이 고작 열두 살 때였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 시절에 사라져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빠가 나타났으니 애틋할 수밖에 없었다.
놀이동산에 온 아이처럼 주형은 들뜬 마음을 숨기질 못했다.
“오늘 진짜 기분 째진다! 이거 꿈 아니지?”
“아들, 이거 꿈 아니야.”
승만이 주형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또 보면 되지. 다음에는 아빠 작업실에 놀러 와.”
“진짜 그래도 돼?”
“그럼. 아빠가 알려 준 번호로 전화해. 우리 아들 전화면 언제든 환영이야.”
주형은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휴대폰을 쥐었다.
그렇지 않아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승만에게 전화할 생각이었다.
“아빠, 나 가 볼게. 다음에 또 본다는 약속 지켜!”
“알겠어. 얼른 가 봐.”
토끼처럼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뛰던 주형이 가로등이 박힌 길가를 걸어갔다.
멀어져 가는 주형을 가만히 바라보던 수희가 고요히 입술을 떼어 냈다.
“아빠.”
“응?”
“박해숙이라는 사람 아세요?”
박해숙.
수희가 봤던 소장에 적힌 피고였다.
손을 크게 흔들고 있던 승만의 고개가 고장 난 기계처럼 뚝뚝 끊기며 수희를 향해 돌아갔다.
수희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기에 승만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지금 뭐라고 했니?”
“들었잖아요. 박해숙 아냐고요.”
적잖게 당황한 승만이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대답했다.
“아니. 아빠는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야.”
“그래요? 이상하네요.”
수희는 핸드백 안에 넣어 두었던 소장을 승만의 앞에 펼쳐 보였다.
이미 승만이 본 적 있는 서류인 건지, 그는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 채 온몸을 달달 떨었다.
“여기엔 박해숙이 아빠 내연녀라고 나와 있던데.”
언제 그랬냐는 듯 내내 들어 올려져 있던 수희의 입술이 아래로 뚝 떨어져 내렸다.
“아니면, 아직도 내가 바보 천치로 보이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