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추악한 인간의 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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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추악한 인간의 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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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추악한 인간의 본성
2022.10.04.
“아니면, 아직도 내가 바보 천치로 보이나 봐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승만은 말은커녕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제 눈앞에서 펼쳐지자 승만은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승만은 그리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얼른 놀란 표정을 갈무리한 승만이 한숨을 내쉬며 제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네 엄마가 그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무슨 뜻이에요?”
승만은 두 눈을 부릅뜨며 수희에게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아직도 모르겠니? 네 엄마가 그걸 둔 거다. 우리 부녀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서!”
“하!”
수희는 헛웃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뻔뻔하디뻔뻔한 얼굴을 들이밀던 승만의 인상이 서서히 구겨졌다.
금방 미소를 지워 낸 수희가 애써 담담하게 말을 꺼내 놓았다.
“제가 연기를 잘하는 게 아빠를 닮아서였나 봐요.”
한 발짝 다가온 승만이 수희의 두 팔을 붙들고 설득했다.
“수희야, 아빠 말 잘 들어.”
“…….”
“네 엄마가 다 계획해 둔 거야. 자기가 한 짓을 나한테 덮어씌운 거라고.”
“그러니까 아빠는 박해숙이라는 여자는 모르고, 바람도 피우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 이 아빠는 당당해. 나도 네 엄마가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계획을 세울 줄은 몰랐구나.”
수희의 팔을 움켜쥐고 있는 승만의 손에 힘이 잔뜩 실렸다.
“아직도 네 엄마가 나한테 준 상처가 남아 있어.”
“…….”
“너는 이 아빠를 믿어야지. 속지 마라, 수희야. 그게 네 엄마가 바라는 거야!”
제발 믿어라. 믿어야 한다.
그래야 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어. 그래야 내가 살 수 있는 거고.
검은 마음을 감춘 채 승만이 강조하고 강요했다.
둘 사이를 잠잠히 흐르는 공기는 스치기라도 하면 베일 것처럼 싸늘하기만 했다.
“속지 않을게요, 아빠.”
“잘 생각했어. 너라면 날 믿.”
탁.
수희는 자신의 팔을 붙잡은 승만의 손을 거칠게 쳐 냈다.
얼얼한 손바닥과 수희를 번갈아 보던 승만이 말을 버벅거렸다.
“수, 수희, 너. 아빠한테 이게 무슨 짓이야.”
한 번 속지, 두 번 속지 않는다.
“죽은 사람 모독하는 것도 거기까지만 하세요.”
버럭 소리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인데, 오히려 피가 팍 식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롯이 들이붓는 찬물을 맞고 있었던 것처럼 수희는 정신이 점차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거짓말로 언제까지 절 속일 수 있을 것 같으세요?”
“너,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아빠를 못 믿는 거냐?”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말로 회유하려 해도 승만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수희는 핸드백 안에서 사각형 명함을 꺼내 들었다.
“이게 뭔지 아세요?”
명함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던 승만은 그저 눈만 끔벅일 뿐이었다.
“소장이랑 같이 있더라고요.”
“…….”
“이 소장 작성해 준 변호사 명함이.”
승만은 목 뒤로 서늘한 소름이 끼쳐 올랐다.
수희가 소장과 함께 꽂혀 있던 명함의 주인에게 전화해 본다면 모든 게 밝혀질 것이다.
수희가 들고 있는 저 소장이 진짜라는 게.
“아까 한 말들, 전부 책임질 수 있으세요?”
“그……게.”
“여기 전화해 보면 소장에 관한 내용 전부 들을 수 있을 텐데.”
사정없이 흔들리는 승만의 눈을 보자 티끌만큼이나마 남아 있던 신의마저 날아가고 말았다.
도저히 수희를 마주할 수 없었던 승만의 고개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미안. ……미안하다, 수희야.”
목구멍을 비집고 억지로 나오는 사과에 수희는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차라리 승만의 말처럼 이 모든 게 애란의 계략이기만을 바랐다.
애란은 이미 떠나고 없는 사람이고, 지금 수희의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승만이니까.
그러나 변호사의 명함이 나오자 단박에 바뀐 승만의 태도가 수희를 단념하게 만들었다.
승만의 모든 말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더러운 위선일 뿐이었다.
불륜을 저지른 것도, 가정을 깨트린 것도 모두 승만이었다.
그리고 그 승만에게 다시 한번 배신당했다.
수희는 손에 들려 있는 소장을 메마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원고의 남편 오승만은 약 15년 전부터 피고인 박해숙과 살림을 차려 놓고 동거 중인 사실을 원고가 확인했습니다.”
소장 내용을 잔잔하게 읊어 대자 승만의 얼굴은 시뻘겋게 변해 버렸다.
“증거를 잡기 위해 며칠 동안 미행해 모텔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만. 그만해라, 수희야.”
모욕으로 얼룩져 버린 승만이 처절한 발악을 시도했다.
“그 여자를 만난 건 내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 너희 엄마랑 이혼하지 않은 걸 보면 모르겠니? 그 여자를 사랑하긴 했지만, 네 엄마도 사랑했었다. 두 명 다 가질 수가 없어서 그 여자랑 잠깐 살았던 것뿐이야.”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계시는지 아세요?”
“남자란 동물은 다 그래. 승조도 이해할 거다. 자극적인 것에 끌릴 수밖에 없어.”
“제발 개소리 그만하세요!”
심한 말이 튀어나온 수희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크게 가슴을 들썩였다.
수희의 화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자 승만은 결국 마지막 수단을 쓰기로 했다.
승만이 아스팔트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으며 빌었다.
“내가 다 잘못했다. 용서해 다오. 다 지난 일이잖니.”
“이게 어떻게 다 지난 일이에요?”
“네 엄마 그렇게 떠나고 나 정신 차렸어. 박해숙, 안 만난 지 오래됐다.”
“지금 안 만난다고 과거가 다 지워져요? 없던 일이 돼요?”
그녀의 가슴에는 바늘로 후벼 판 것 같은 상처가 남았는데, 그 위를 자잘한 모래로 덮어 두려고 하고 있었다.
냉정하게 돌아서는 수희를 보자 승만이 다급하게 무릎을 질질 끌며 다가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수희야. 잘못했다. 내가 다 잘못했어.”
붙들린 발목을 앞으로 걷어 내자 승만의 손이 툭 떨어졌다.
멀지 않은 곳에 차를 세워 둔 채 수희를 기다리고 있는 승조가 보였다.
그를 보자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던 찰나였다.
“수희야!”
목 놓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수희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무슨 말을 하든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에 승만의 마지막 말을 들어 주려 돌아섰다.
바닥을 손바닥으로 짚으며 기어 온 승만이 세상 간절하게 물었다.
“……간 이식은, 해 줄 거지?”
웃음도 나오지 않아 승만을 가만히 내려다만 봤다.
“그 말은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하지 말았어야지. 그 말만은 참았어야지.
커다란 생채기를 내 놓고도 승만은 그 위에 또 칼을 꽂아 넣었다.
이제야 확실히 현실이 가슴에 와닿았다.
자신을 아껴 주고 사랑해 주던 아빠는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이었다.
현존하는 아빠는 그저 자신의 간만을 탐내는 악랄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수희야.”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승조가 수희의 손을 감싸 잡았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다 못해 승조가 수희를 데리러 온 것이다.
수희는 자신을 이끄는 승조의 손을 붙잡고 승만의 시야에서 벗어나려 했다.
“수희야!”
끝까지 포기하지 못한 승만이 수희의 곁에 오려던 순간이었다.
승조는 수희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매서운 눈빛을 승만에게 꽂아 넣었다.
더는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에 승만은 수희에게 닿지 못하고 물러섰다.
수희를 조수석에 태운 승조가 운전석으로 와 핸들을 붙잡았다.
승조의 차가 출발하고 아파트를 완전히 벗어나자 승만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사이드 미러를 바라보고 있던 수희는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승만 때문에 흘릴 눈물조차 아깝다는 듯 수희는 나오려는 울음을 도로 삼켜 냈다.
***
고요히 달만 떠 있는 밤.
승조는 수희가 잠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조용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불을 걷고 나온 승조가 수희의 침실을 나와 휴대폰을 꺼내 들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대표님.]
소리가 들릴까 승조가 차 비서에게 낮은 목소리로 일러두었다.
“이름은 박해숙, 주소는 서울시 성동구 왕십리로 XX. 최대한 빨리 이 사람에 대해서 알아봐.”
전화를 끊은 승조가 검은 구름에 가려진 달을 바라봤다.
박해숙이라는 이름을 본 순간 승조는 어딘가 께름칙한 기분을 느꼈다.
어디선가 스치듯이 본 이름이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박해숙이라는 사람을 아주 잠깐이라도 본 적이 있는 걸까.
아무리 기억해 보려 해 봐도 박해숙이라는 사람에 대한 정보가 떠오르지 않았다.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승조의 미간에 깊은 골이 만들어졌다.
분명 이대로 승만만 수희의 앞에서 사라진다면 이번 일은 여기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승조는 무언가 다른 진실이 남아 있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
익숙하게 승만의 작업실 비밀번호를 누른 화정이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에서 구두를 벗으려는데 화정의 앞으로 책 한 권이 날아와 떨어졌다.
뒤로 물러선 화정이 고개를 들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승만을 바라봤다.
책상 위에는 벌써 빈 병들이 나뒹굴고 있었고, 그의 손에는 소주병이 쥐여 있었다.
화정은 구두를 확 벗으며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술을 마시면 어떡해!”
화정이 소주병을 빼앗으려 했지만, 승만은 거칠게 화정의 손을 떼어 냈다.
화정의 걱정스러운 시선에도 승만은 보란 듯 입에 소주병을 꽂아 넣었다.
“당신 이러다 큰일 나!”
승만의 손에서 소주병을 빼앗아 갔을 때는 이미 소주병이 완전히 비워진 뒤였다.
의자를 밀고 일어선 승만이 비틀거리자, 화정이 부축하려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
“이거 놔!”
승만은 화정의 어깨를 밀어내다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승만을 보고 화정이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승만 씨 괜찮아?”
여전히 화정은 승만의 걱정뿐이었지만, 승만은 그런 화정을 경멸스럽게 쳐다봤다.
자리에서 일어선 승만이 벽에 등을 기대어 서며 화정에게 손가락질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만 아니었으면, 나 살았을 거야. 나 이렇게 죽진 않는다고!”
“도대체 무슨 소리야. 수희랑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러는 건데.”
전후 사정을 모르는 화정은 답답하기만 했다.
“수희가 전부 알아 버렸어.”
“뭘 알았는데.”
“수희가 우리 사이 전부 알게 됐다고!”
분명 소송은 취하하게 했는데 그 소장이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화정이 묻기도 전에 절망에 몸서리친 승만이 제 신세를 한탄하기 시작했다.
“수희가 이식 절대 안 해줄 거야. 모든 게 다 틀렸어. 암 덩어리는 더 커질 거고, 난 곧 죽을 거야.”
흐트러지는 정신을 바로잡은 화정이 흥분한 승만을 달래 주었다.
“당신한테는 주형이가 남아 있잖아. 주형이한테 간 달라고 하자. 응?”
“걔는 나랑 혈액형이 다르다고 했잖아!”
버럭 내지르는 소리에 화정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요샌 혈액형이랑 상관없이 이식 가능하다고 담당의가 그랬잖아.”
“그래도 주형이는 안 돼.”
“왜 그렇게 수희만 고집하는 거야?”
“…….”
“다른 이유가 있는 거지?”
푸우, 숨을 길게 내쉰 승만이 숨기고 있던 속마음을 밝혔다.
“주형이 오 씨 가문 장손이야. 대대로 아들이 없는 집이라 주형이가 대를 이어야 해.”
화정이 한심한 승만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정신 차려, 승만 씨. 시기 늦춰지면 암 퍼져서 수술도 못 해!”
“그래도 절대 주형이 몸엔 칼 못 대!”
“그깟 수술 좀 한다고 안 죽어.”
“네가 애를 낳아 봤어? 애도 못 낳는 주제에 막말하지 마.”
도리어 화정의 어깨를 밀쳐 내며 승만이 분개했다.
화정은 당황하지 않고 이성을 잃어버린 승만을 껴안고 다독거렸다.
“나만 믿어. 내가 다 해결할게.”
“어떻게 해결할 건데.”
벌건 핏줄이 오른 승만의 눈동자에 기대감이 스쳤다.
“나한테 다 방법이 있어.”
없어도 만들어야 했다.
승만을 살리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그게 사람의 목숨을 가져가는 일일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