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살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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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살인자
2022.10.08.
승만의 일로 새벽 느지막이 잠이 든 수희는 피곤을 떨쳐 내지 못했다.
밴을 갓길에 세워 둔 철용이 수희를 향해 몸을 틀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
“잠을 좀 못 자긴 했는데, 괜찮아.”
“어제 첫 방송이라 잠 제대로 못 잤구나?”
승만의 일로 어제가 <패밀리> 첫 방송이라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드라마는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지만, 수희는 어째서인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이제 드라마 촬영 얼마 안 남았는데 힘내자.”
수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 좌석에 올려진 8화 대본을 끌어왔다.
12부작으로 기획된 드라마라 마지막 촬영까지 단 5화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얼마 전 11화 대본이 탈고되었고, 곧 마지막 화도 늦지 않게 나올 예정이었다.
차라리 김시운 작가의 정체를 알지 못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그린 <패밀리>와는 전혀 다른 승만의 본모습 때문이었다.
똑똑.
밴의 뒷좌석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수희가 창문을 아래로 내렸다.
문밖에는 은채가 서서 수희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수희야, 잠깐 이야기 좀 할래?”
“잠깐만.”
수희가 문을 열고 내리자 은채가 신이 난 얼굴로 물었다.
“저번에 우리 같이 밥 먹기로 했었잖아. 그거 내일 먹을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내일 일정이 있는지라 수희가 곤란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일은 내가 일정이 있는데 어쩌지?”
“그럼 내일모레는?”
“내일모레 오전에는 가능할 것 같아.”
“그럼 내일모레 보자. 10시 괜찮지?”
“응, 좋아.”
기뻐하는 은채를 보니 수희가 먼저 약속을 잡지 않은 게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럼 어디서 보는 걸로 할까?”
수희의 물음에 은채는 잠깐 망설이는가 싶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너희 집에서 볼 수 있을까?”
“우리 집?”
밖이 아닌 자신의 집으로 오겠다는 은채가 의아하게 느껴졌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이사를 많이 다녀서 또래 친구가 없거든. 그래서 또래 친구 집에 꼭 한번 놀러 가 보고 싶었어.”
설렘이 가득 묻어나는 음성에 수희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알겠어. 내일모레 우리 집에서 보자.”
수희의 허락이 떨어지자 은채는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조소를 애써 도로 집어넣었다.
갑자기 아침 일찍부터 은채를 자신의 집으로 부른 화정은 대뜸 그녀에게 명령을 내렸다.
“무조건 오수희 집으로 가.”
“가서 뭘 해요?”
“머리가 비었어? 집이라도 뒤져서 약점 될 만한 걸 쥐어 오라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까칠한 화정을 상대하느라 은채는 진이 빠진 상태였다.
수희가 거절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던 은채는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럼 내일모레 보자. 연락할게.”
자신의 밴이 세워진 곳으로 발길을 돌린 은채가 사라지자 수희도 밴에 다시 올라타려 했다.
“배우님.”
뒷좌석 문을 열려는데 스태프가 다급히 수희에게 다가왔다.
“이거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스태프의 손에는 오늘 찍을 8화 대본이 들려 있었다.
스태프는 친절히 노란색 형광펜으로 표시된 대본을 펼치며 수희 앞에 들이밀었다.
“작가님께서 급하게 대사 몇 개를 수정해 주셨더라고요.”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글자들에 수희가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며 대본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애써 당황한 표정을 갈무리하며 스태프에게 말을 전했다.
“차에서 확인해 볼게요.”
그런데 스태프가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촬영장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감독님께서 바로 촬영 들어가자고 하셔서 지금 촬영장으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은데.”
“……지금 바로요?”
이번에는 동요한 기색을 숨길 수가 없었다.
수정된 대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촬영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멀리서 보이는 촬영팀들은 이미 촬영 준비를 마쳤고, 카메라 앞에는 상대 연기자인 준영이 서 있었다.
조급한 마음에 수희가 대본을 펼쳐 수정된 대사를 확인하려 했다.
분명 활자가 박혀 있는 게 보이는데도 도대체 무슨 글자인지 읽을 수가 없었다.
이제 약 없이도 대본을 마주할 수 있는 상태까지 도달했으나, 아직은 난독증처럼 무슨 글자인지 읽을 수는 없었다.
스태프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자, 수희는 어쩔 수 없이 촬영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촬영장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임 감독이 목에 걸린 헤드폰을 머리에 쓰며 말했다.
“수희 씨, 대본은 확인했지?”
수희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떨어트렸다.
“네, 방금 확인했어요.”
“수희 씨 대사는 두 군데만 수정됐으니까 바로 들어갈게요.”
촬영 시작을 알릴 스태프가 슬레이트를 들고 카메라 화면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 생각이 막혀 버린 것처럼 그 어떤 대사도 떠오르지 않았다.
초조해 보이는 수희의 모습에 준영이 마이크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작게 물었다.
“누나, 어디 안 좋아요?”
“……아무것도 아니야.”
준영에게라도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을까 했지만, 바로 촬영에 들어가야 하니 타이밍을 잡기 어려웠다.
정신을 깨우는 슬레이트 소리에 뒤이어 임 감독이 손을 들어 올렸다.
“레디, 액션.”
한순간에 사람들의 자잘한 기척이 사라지고, 카메라 앞에 선 수희와 준영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첫 대사를 꺼내야 하는 수희가 입을 열며 목소리를 냈다.
“오랜.”
“네가.”
그런데 수희와 준영의 대사가 겹치고 말았다.
대사가 꼬이자 두 사람이 동시에 말을 멈추었다.
임 감독이 끼고 있던 헤드폰을 끄집어 내리며 수희에게 물었다.
“수희 씨, 대본 확인했다고 안 했어?”
아무래도 바뀐 대사 부분이 오늘 찍을 첫 장면인 듯했다.
게다가 수희의 대사는 사라지고 준영의 대사가 새로 추가된 모양이었다.
수정된 대사 위치를 알아차렸다고 하더라도, 바뀐 대사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못 한다고 해야 하나, 그게 아니라면 대본을 읽을 수 없다고 해야 하나.
카메라 앞에 서 있는 수많은 스태프가 패닉에 잠긴 수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희 씨.”
대답을 촉구하는 임 감독 때문에 수희의 이마에 아찔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감독님, 저 10분만 휴식할 수 있을까요?”
불쑥 튀어나온 준영의 말에 수희가 고개를 돌렸다.
수희에게 집중되어 있던 시선이 순식간에 분산됐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요.”
“그럼 10분만 쉬고 다시 들어갈게요. 다들 근처에서 대기해 주세요.”
어쩔 수 없다는 듯 임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변의 흐름이 단번에 어수선해졌다.
수희는 수정된 대본을 들고 있는 스태프에게 다가가려다 도로 발걸음을 가져왔다.
10분 안에 승조에게 연락이 닿을 수 있을까. 심지어 휴대폰은 밴에 두고 왔다.
대사 몇 줄 읽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이번 촬영을 완전히 접어야 할 수도 있었다.
“네가 어떻게 여길 온 거야, 이게 제 첫 대사예요.”
나긋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수희가 눈길을 돌렸다.
준영이 사람들을 향해 등을 보이며 수희에게 한 자씩 정확하게 전했다.
“보고 싶어서 왔어. 네가 없는 동안 나한테 너무 많은 게 변해 버렸으니까. 그다음이 누나 대사고요.”
준영은 그 뒤로도 수희의 대사 두어 개를 더 입에 올렸다.
그녀가 대사를 읽지 못한다는 것을 준영은 전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서 아프다는 핑계로 촬영을 멈춘 것이다.
“준영아.”
“촬영장에서라도 누나 도와주고 싶어요.”
촬영이 끝난 뒤에는 한 대표님이 누나 곁에 있을 테니까.
그러니 이렇게라도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승조와의 대화에서 나왔던 ‘계약’이 수희의 지금 상황과 연관이 있다는 건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안까지 깊이 파고 들어가지 않은 건 수희를 위해서였다.
“말했잖아요.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 달라고.”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진심이었다. 지금 준영이 아니었다면 위기를 모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약속한 시간이 지나자 임 감독이 모니터 앞에 앉았다.
수희는 준영이 알려 준 대사를 머리로 되뇌며 입으로 중얼거렸다.
촬영이 다시 진행되기 전, 준영이 수희에게 물었다.
“누나,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뭔데?”
“강은채 씨랑 친해요?”
“이번 촬영하면서 친해졌지. 그건 왜?”
잠시 머뭇거리나 싶던 준영이 단호하게 일러두었다.
“은채 씨랑은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왜? 은채랑 무슨 일 있었어?”
준영이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제 느낌상 그래요. 누나한테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할 것 같아요.”
“……알겠어.”
아무 이유도 없이 준영이 강은채라는 사람에 대해 그렇게 판단했을 리가 없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껄끄러움을 느꼈으니 알려 주는 걸 거다.
“또래 친구 집에 꼭 한번 놀러 가고 싶었어.”
그러나 잔뜩 설레던 은채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 잡아 둔 약속을 취소할 수도 없었다.
아직 은채로 인해 자신에게 벌어진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 이번 약속은 지키기로 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준영의 말대로 은채와 거리를 두기로 마음먹었다.
***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수희가 샤워를 마치고 침실을 나왔다.
주방으로 걸어가려는데 집 안에 울려 퍼지는 초인종 소리에 수희가 현관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 보이는 건 죽이 들어 있는 종이 가방을 들고 있는 승조였다.
“저녁 먹자.”
수희가 뒤로 물러서자 승조가 현관에 들어서며 물었다.
“저녁 아직이지?”
“네. 방금 집에 왔거든요.”
어제 있었던 일의 여파가 채 가시기 전이었기에 밥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을 생각해 죽을 사 온 승조를 보니 입맛이 없어도 먹어야겠다 싶었다.
승조가 주방에 있는 아일랜드 식탁에 종이 가방을 내려 두며 안에 있는 죽을 꺼냈다.
사람은 두 명이건만 죽은 족히 네 명이 먹고도 남을 양이었다.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요?”
“뭘 먹고 싶을지 몰라서, 먹고 싶은 걸로 골라 먹으라고.”
역시나 그는 어제 있었던 일로 수희에게 마음을 쓰고 있는 듯했다.
승조가 신경 써 주니 종일 복잡하게 얽혔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이렇게 자주 보면 나 기대하게 돼요. 안 오면 서운해할지도 몰라요.”
수희의 옆에 서 있던 승조가 수희의 머리에 손을 얹어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냥 기다리고 있어. 매일 찾아올 테니까.”
“그 말 무르기 없기예요.”
“잔뜩 귀찮게 해 줄 테니까 내쫓지만 마. 내쫓는다고 나갈 생각도 없지만.”
귀찮게 한다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알 리가 없는 수희는 크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절대 안 내쫓을게요.”
승조는 식탁에 숟가락을 내려 둔 뒤 의자를 뒤로 뺐다.
“죽 먹자.”
수희가 자리에 앉자 그제야 승조도 건너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채 다섯 숟가락도 뜨기 전이었다.
누군가 빠르게 도어 록 버튼을 누르더니 벌컥 하고 힘차게 문을 열어젖혔다.
단박에 열린 문에 놀란 수희가 고개를 돌리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주형이 서 있었다.
“주형아.”
수희가 의자에서 일어서자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주형이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누나는 지금 밥이 넘어가?”
식탁에 놓여 있던 단호박죽이 주형의 손에 의해 바닥에 납작 엎어져 버렸다.
“오주형!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갑작스러운 주형의 행동에 수희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방금 아빠 만나고 오는 길이야.”
승만의 이야기에 수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누나는 알고 있었다며. 아빠가 간암 3기인 거.”
주형이 전부 알아 버렸다는 사실에 수희는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은 거야.”
“누나가 아빠 간 이식 안 해주면 6개월 뒤에 죽는 거.”
“…….”
“그걸 알면서도, 아빠한테 간 이식 안 해주겠다고 한 거!”
주형이 수희에 대한 분노를 보이며 이를 갈았다.
승만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수희가 주형에게만은 불륜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을 거라는 걸.
그러니 주형에게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말을 흘린 것이다.
“내 몸이야. 내가 한 선택에 네가 간섭할 자격은 없어.”
“뭐가 그렇게 소중한데.”
“뭐?”
“가족보다 누나 껍데기가 그렇게 소중해? 그래서 간 하나 못 떼어 줘? 심장을 달라는 것도 아니잖아. 그깟 간 조금 떼어 달라는 거잖아.”
“그깟? 지금 너, 그깟 간이라고 했어?”
승만의 불륜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주형은 참을 수 없는 경멸을 느꼈다.
“엄마도 누나가 죽였잖아! 누나가 연기 안 하겠다고 했으면 엄마 죽지도 않았어.”
“진정해, 오주형.”
수희가 동생의 흥분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주형은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날뛰었다.
“엄마 죽기 전에도 내가 부탁했잖아. 연기 그만하라고. 그때 그만뒀으면 엄마 살 수 있었어!”
“다 지난 일이야. 이 이야기 이제 그만해.”
돌아서려는 수희를 향해 주형이 악에 받친 외침을 쏟아 냈다.
“누나가 살인자랑 다를 게 뭐가 있어!”
“너, 지금 뭐라고…….”
“살인자! 살인자!”
“…….”
“아빠까지 죽여서 나 고아 만들 생각이냐고!”
짝!
주방에 쩌렁대게 울려 퍼지는 파열음에 수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