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내가 널 증오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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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내가 널 증오하는 이유
2022.10.15.
“역시, 왔구나?”
화정은 수희를 보고도 놀란 기색은커녕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굴었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솟아오르고 온몸에 잔뜩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이미 피고인 박해숙이 이화정이라는 사실은 승조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탓에 그저 현실이 가슴에 와닿지 않았을 뿐.
막상 눈앞에 불륜의 한 장면이 펼쳐지자, 소리 없는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다.
수희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건 승만과 이야기되지 않은 부분인 건지, 승만이 시뻘겋게 얼굴을 붉히며 화정의 어깨를 밀어냈다.
“어서 들어가!”
화정은 벌어진 가운 앞섶을 손바닥으로 짚으며 우쭐댔다.
“왜 화를 내고 그래. 나도 정식으로 수희랑 인사하고 싶은데.”
“이화정!”
“알겠어. 화 좀 그만 내.”
자신이 나왔던 작은방으로 화정이 들어가자 승만이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자식 앞에서 내연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키자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차후 수희에게도 화정의 존재를 알리려 했지만, 불륜을 들키고 못 볼 꼴까지 보이는 건 계획에 없었다.
“나는 거짓말이기를 바랐어요. 박해숙이, 선배님이라는 사실이요.”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히는 건 이번 한 번만이 아니었다.
승조에게 전해 들은 사실이 잘못된 내용이기만을 바랐다.
이 이상 자신이 추억하는 아빠를 더럽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승만은 수희에게 자비 없이 배신감을 떠안겨 줄 뿐이었다.
“말해 봐요. 정말이에요? 정말, 박해숙이 선배님인 거예요?”
입이 붙어 버린 승만은 끙끙 앓기만 할 뿐, 말 한 마디 못 했다.
“정신 차렸다며. 박해숙이라는 사람 이제 안 만난다며.”
거짓말. 거짓말쟁이.
이제껏 말한 모든 것들이 단순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뭐예요? 나,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요?”
무슨 말을 한들 달라지는 건 없기에 승만은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본 그대로야.”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도 지쳐 버렸다.
이 꼴까지 보였으니 수희에게 더는 화정의 정체를 숨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며 승만이 무척이나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 오랫동안 화정이랑 만나 왔어. 지금도 마찬가지고.”
“…….”
“어차피 너한테 간 이식 못 받으면 난 6개월 뒤에 죽을 거야.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죽고 싶은 게, 내 욕심이니?”
이제 더는 숨길 게 없으니 승만은 두꺼운 가면을 벗어던졌다.
27년 만에 아버지의 본모습을 알게 된 수희는 불결함에 치를 떨었다.
“아빠의 치정을 제가 이해해 주길 바라요?”
“…….”
“당신은 여자 때문에 가족을 버렸잖아. 방치했잖아.”
“…….”
“결국 내 앞에 나타난 건…… 당신이 살기 위해서였잖아.”
욱신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수희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려 애썼다.
더는 아빠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은 사람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날 기만하고 모욕한 사실이 변할 것 같아요?”
억눌러 놓았던 겹겹이 쌓인 분노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어떻게 나한테 그 사람을 엄마라고 부르게 해.”
“…….”
“어떻게!”
아무것도 모르고 승만의 내연녀를 엄마라고 부르고 따랐다.
든든한 선배라며, 승조에게도 자랑스레 이야기하고 다녔다.
사실은 화정이 뒤에서 자신을 비웃고 있는 줄도 모르고.
“화정이가 나한테 직접 부탁했다. 너랑 연기해 보면서 모녀의 기분을 느껴 보고 싶다고.”
“…….”
“착한 사람이야. 마음이 넓은 사람이고. 널 친딸처럼 키우고 싶다고 했을 정도니까.”
“당신…… 진짜 내가 알던 아빠가 맞긴 한 거야?”
수희는 자신이 알고 있던 추억들이 전부 미화된 것만 같았다.
자신만의 세상에 갇힌 채 살아가는 저 사람이 아빠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제 수희,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어둠 속에 피어오른 촛불처럼 승만은 희망이라는 단어를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네가 간 이식만 해 준다면 내가 화정이와 헤어지마.”
결국 돌고 돌아온 결과가 이거였다.
당신이 내 앞에 10년 만에 나타난 이유.
당신이 또다시 거짓말로 날 회유하는 이유.
한 번에 끓어올랐던 열은 차게 식어 갔다.
“쓸데없는 희망 버려요. 나, 이식 안 해요.”
“…….”
“그러니까 기대 같은 거 가지지 말고, 주형이랑 내 앞에 나타나지 마요.”
더는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은 눈으로 승만을 직시했다.
“주형이 앞에 나타나서 이식해 달라고 하면, 내가 알고 있는 것들 전부 말해 버릴 거예요.”
“…….”
“주형이한테는 아빠로 남게 해 줄 테니까, 그 기회 버리지 마요.”
승만은 돌아서는 수희를 잡지 않았다.
더는 잡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게 실패로 돌아갔다는 생각에 승만이 짐승처럼 포효했다.
복도가 쩌렁대게 울려 퍼지는 승만의 외침에도 수희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온 수희가 주차장에 세워진 자신의 차로 다가갔다.
주머니에 있던 키를 꺼내는데 손이 달달 떨려 와 버튼을 누르기도 쉽지 않았다.
겨우 버튼을 누른 수희가 운전석 문을 열던 순간이었다.
“승만 씨랑 사랑에 빠진 건 네 엄마보다 내가 먼저였어.”
운전석 손잡이에서 손을 떼어 낸 수희가 고개를 돌렸다.
화정이 빨간 가운이 아닌 멀쩡한 옷을 입고 수희의 앞에 나타났다.
그러고는 무척이나 태연한 얼굴로 수희가 묻지도 않은 말들을 술술 꺼내 놓았다.
“대학교 때 사귀게 됐는데, 유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됐어.”
“…….”
“장거리 연애라는 게 힘들더라고.”
수희의 앞으로 걸어오며 화정이 웃고 있던 낯을 싹 고쳤다.
“근데 돌아오고 나니까 네 아빠, 결혼했더라?”
“…….”
“속도위반으로.”
굳어진 얼굴로 화정이 수희를 노려보았다.
“네가 생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한 결혼이라고 했어.”
지금까지 알고 있던 화정의 얼굴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수희를 증오하는 것 같기도 했고, 그 이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매일같이 후회한다고 나한테 말했어. 너만 아니었으면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고.”
“…….”
“승만 씨, 네 엄마를 사랑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더라. 오히려 미워했지. 단 한 번의 실수로 자신의 인생을 망쳐 놨다고.”
“더러운 입 다물어요.”
더는 듣고 있을 수 없었던 수희가 화정의 말을 가로막았다.
인상을 팍 찌푸린 화정이 두 눈을 부릅뜨며 수희를 쏘아보았다.
“어디 어른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니? 네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어?”
“저한테 어른 대우받을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한테 예의 차릴 생각 추호도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이제 이 엄마가 네 버릇 싹 다 고쳐 놔 줄 테니까.”
엄마라는 단어는 아무한테나 붙여도 되는 말이 아니었다.
승만과 재혼한다고 해도 수희는 엄마라고 부를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똑똑히 들어, 수희야.”
“…….”
“이제까지 네 아빠가 이혼하지 않은 건 저 착한 마음씨 때문이야.”
화정이 애잔한 눈빛으로 위로하며 수희의 얼굴을 다정히 쓸어내렸다.
살갗에 낳는 화정의 손이 마치 교만한 뱀처럼 느껴졌다.
“너희를 이혼한 가정 아들딸로 만들지 않겠다는, 승만 씨의 착한 마음.”
진실은 그게 아니었다. 화정은 임신이 어려운 몸이었다.
승만을 만나고 아이를 가지기 위해 노력했지만 천사는 찾아오지 않았다.
한 번도 승만이 입에 올린 적 없지만, 사실 장손인 주형을 버리지 못해 이혼을 미룬 것이었다.
“너 때문에 못 한 결혼, 이제 하게 될 거야.”
주형을 미워해야 마땅했지만, 화정은 주형보다 수희를 더욱더 혐오하고 있었다.
그건 애란이 수희를 잉태하는 바람에 승만과 결혼해서일 것이다.
“그러면 어차피 날 엄마라고 불러야 할 텐데, 미리 예행연습했다고 생각해.”
“내가, 당신을 엄마라고 부를 줄 알아? 착각하지 마. 나 당신 엄마로 인정 안 해.”
“당장 내일모레 있을 촬영에서 나한테 엄마~ 하면서 아양 떨어야 할 텐데?”
“당신들, 천벌받을 거야.”
흔들리는 숨을 내쉬는 수희의 손톱이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었다.
한 발자국 더 다가온 화정이 수희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밀어냈다.
“하는 대사가 어떻게 지 엄마랑 똑같은지. 모녀가 참…… 진부하다.”
수희가 자신의 머리를 미는 화정의 손을 움켜잡았다.
손아귀에서 어그러지는 손에 화정이 바들바들 떨다가 팔을 안으로 당겼다.
벌겋게 변한 손을 붙잡은 화정이 한쪽 입꼬리를 비집어 올렸다.
“촬영 때 보자, 우리 딸.”
화정이 돌아서는 순간, 수희의 뇌리에 한 가지 말이 강하게 꽂혔다.
화정은 마치 애란을 만났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당신, 우리 엄마랑 만났어?”
발길을 다시금 제자리로 돌린 화정이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너 엄마랑 똑같이 생겼더라. 짜증 날 정도로.”
수희는 시간이 멈춰 버린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화정이 떠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수희가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눈길이 허공에 닿고, 눈동자가 눈물로 가득히 채워졌다.
“연기 그만둬. 엄마 죽는 꼴 보기 싫으면.”
미친 사람처럼 온 집 안을 부수고 다니며 수희에게 연기를 그만두길 강요했던 애란.
애란이 정상 자리에 도달한 수희를 끄집어내려던 때가 소장이 나온 때와 맞물렸다.
작년 11월, 애란은 내연녀가 화정이라는 것을 알고 직접 만났다.
애란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꺼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수희에게 한 태도로 본다면 분명 더한 짓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 애란은 이런 상황만은 벌어지지 않길 바라며, 그토록 바라던 배우를 그만두길 원했던 것이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수희는 애란이 선물해 준 꽃을 생신제에 올렸다.
“널 잘 챙겨 주는 엄마 같은 사람 있다고 꼭 말해 줘. 그래야 하늘에 계신 엄마도 안심하고 널 나한테 맡기시지.”
그런 줄도 모르고 잔뜩 들떠 모정을 그리워하며 화정에게 위로를 받았다.
엄마, 라고 부르며.
애란이 하늘 위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고 있을까.
아랫입술을 짓눌러 깨문 수희의 머리 위로 동그란 빗방울이 소리 없이 낙하했다.
***
무슨 정신으로 집까지 운전해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운 수희가 꽉 붙들고 있던 핸들을 놓았다.
정신이 빠진 것처럼 생기 없는 얼굴로 운전석에서 내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틀었다.
갑자기 내린 비로 지하 주차장에는 습하고 답답한 공기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엘리베이터 근처에 세워진 차에서 승조가 내리더니 수희의 곁으로 다가왔다.
멀리서 다가오는 그를 보자마자 수희는 지금껏 참아 왔던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만 같았다.
“오빠.”
희미하게 자신의 목소리가 퍼지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승조가 옆으로 누울 것처럼 비스듬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그가 붙어 있던 발걸음을 재빨리 떼어 내며 수희에게 달려왔다.
그제야 수희는 기우는 건 자신의 몸이라는 걸 깨달았다.
허물어지는 시야 사이로 자신을 부르며 뛰어오는 승조가 보였다.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수희의 몸이 가까스로 승조의 품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수희야. 수희야!”
수희의 어깨를 붙잡은 승조가 팔을 흔들어 보지만, 그녀는 미동도 없이 굳게 눈을 감아 버린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