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불행하게 만들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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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불행하게 만들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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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불행하게 만들지 않아
2022.10.18.
묵직한 눈꺼풀을 들어 올린 수희의 시야에 익숙한 천장이 들어왔다.
정신을 잃고 난 후, 그가 침실로 데려온 듯했다.
느릿하게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승조가 자신의 손을 붙잡은 채 앉아 있었다.
수희가 눈을 뜬 걸 확인한 승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나질 않아서 병원에 데려가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었어.”
수희가 자신의 품에서 정신을 잃은 지 세 시간이나 지난 후에야 눈을 떴다.
승조는 쓰러진 수희를 데리고 응급실로 가려 했지만, 의식이 끊기기 직전 수희가 병원은 가지 않겠다 고집했다.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는 수희의 허리를 승조가 받쳐 주었다.
“더 누워 있어.”
고개를 저은 수희가 몸을 바로 세웠다.
“촬영 때문에 계속 못 잤더니 피곤했나 봐요.”
의자에 앉은 승조는 수희가 먼저 운을 뗄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침실 안에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불을 움켜쥔 수희가 저린 숨이 섞인 말을 뱉어 냈다.
“오빠 말이 다 맞았어요. 이화정이…… 박해숙이었어요.”
“…….”
“나 또 아빠한테 속았어요. 정리했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지끈거리는 머리에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으며 말을 이었다.
“이화정이 엄마가 살아 있을 때 만났다고 했어요. 엄마는 이화정을 만나고 나서 제가 배우 일을 그만두길 바랐던 거예요.”
누구보다 그녀의 성공을 바라던 엄마의 태도가 단박에 바뀐 게 이상하다 싶었다.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엄마에게 자신을 들먹이며 협박했을 것이다.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떼어 낸 수희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려 왔다.
“나 못 하겠어요. 그 사람을 엄마라고 부르는 일.”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드라마 촬영을 중단하고만 싶었다.
이틀 뒤에 촬영장으로 나가 화정의 품에 안길 생각만 하면 소름이 끼쳐 올랐다.
“그런데 그 사람 때문에 날 망치는 일은 더더욱 하고 싶지 않아요.”
포기할 수 없는 건, 그 사람 때문에 이제껏 이뤄 온 것을 놓고 싶지 않아서였다.
“난 왜 행복해질 수 없는 걸까요.”
“…….”
“이제 숨 좀 쉴 것 같았는데, 이제 좀 살 것 같았는데.”
가슴께가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수희가 주먹으로 가슴을 내려쳤다.
주먹 쥔 수희의 손을 붙잡은 승조가 자신 쪽으로 끌고 가며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내가 널 불행하게 만들지 않아.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승조가 지금까지 바란 건 단 하나였다.
수희의 행복. 그 행복이 부서져 내리는 걸 승조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진 않을 생각이었다.
“수희야,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
딩동― 딩동―
승조가 준비해 준 아침을 먹고 다시 잠이 들었던 수희는 초인종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이불을 걷고 일어난 수희가 침실을 나오는데도 초인종 소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거실에 붙어 있는 인터폰을 보고서야 수희는 은채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을뿐더러, 누군가를 만날 기운조차 없었다.
그러나 이제 와 미리 한 약속을 취소할 수도 없었다.
수희는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어 주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은채를 맞이했다.
“오래 기다렸지. 어서 들어와.”
“왜 이렇게 늦게 문을 열어.”
투박한 말씨로 수희를 핀잔한 은채가 얼른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잔뜩 짜증이 솟아올랐던 은채가 제 팔을 비비며 거실로 걸어갔다.
“혹시 약속 잊고 자고 있었던 건 아니지?”
수희가 어색하게 웃으며 무언의 긍정을 보내오자, 은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획 돌렸다.
“요새 바빴으니까 이해해 줄게.”
“고마워. 뭐 좀 마실래?”
수희가 주방으로 가자 은채가 거실에 있는 소파에 털썩 앉으며 답했다.
“오렌지주스 있어?”
“포도주스는 있는데, 그걸로 줄까?”
“나 오렌지주스가 너무 마시고 싶은데.”
은채가 소파에 팔을 대며 수희를 향해 상체를 틀었다.
마치 오렌지주스를 사다 달라는 듯 은채의 눈동자가 찬란하게 빛났다.
약속을 잊고 있었다는 죄책감도 있었기에, 수희가 포도주스를 꺼내지 않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건물 아래에 편의점 있으니까 갔다 올게.”
두 손을 모은 은채가 방실방실 미소를 보였다.
“정말 고마워.”
침실에서 지갑과 겉옷을 가지고 나온 수희가 현관으로 걸어갔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천천히 와, 천천히.”
현관문이 닫히자 은채는 밖에서 들리는 수희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희미해진 발소리에 은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사람처럼 우왕좌왕하던 은채는 수희가 들어갔었던 침실로 향했다.
침실로 들어오자마자 은채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기회는 어쩌면 오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수희의 약점만 잡는다면 화정이 잡은 자신의 목줄을 끊어 낼 수 있었다.
화장대를 뒤적거리던 은채가 이불장을 열고 안에 있던 이불을 모두 끄집어냈다.
눈에 불을 켜고 찾아봤지만 깨끗하게 정리된 곳 어디에도 약점은 보이지 않았다.
무작정 집 안에서 약점을 찾는 건 잘못된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
임신 스캔들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린 적 없는 수희였다.
애초에 약점 같은 건 없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화르르 달아올랐던 투지가 점차 식어 가고, 이불 속을 뒤적이던 은채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아, 분명히 약점 못 잡아 오면 날 또 지지고 볶고 난리를 칠 텐데.”
빨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은채의 시선이 침대 옆 협탁으로 향했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밀고 일어선 은채가 협탁을 열어 안에 있는 것을 뒤적거렸다.
안에 들어 있던 거치적거리는 물건을 치워 내자 투명 파일 안에 들어 있는 종이가 보였다.
투명 파일을 꺼내 본 은채의 눈썹이 점차 구겨지더니, 이내 활짝 펴졌다.
“이거다.”
현관문을 열고 수희가 들어오자, 은채가 급히 소파에 던져둔 코트를 입었다.
“나 갑자기 스케줄이 생겨서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아.”
“지금 바로 가야 하는 거야?”
“응, 미안.”
아무렇게나 코트를 걸친 은채가 급하게 발을 구두에 끼워 넣었다.
“주스라도 마시고 가지.”
“마신 걸로 칠게.”
잠깐 주스 마실 시간도 없는 건지 은채가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일이 있다고 하니 잡을 수도 없어 수희는 은채를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된 수희가 아일랜드 식탁 위에 오렌지주스를 내려 두었다.
집 안을 둘러보던 수희의 시선이 자신의 침실 쪽에 머물렀다.
반듯했던 수희의 미간 사이가 설핏 찌푸려 들었다.
“내가 문을 안 닫아 놨던가.”
반쯤 열려 있는 문을 닫으려던 수희는 안으로 몸을 들여놓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방 안인데도 낯설게만 느껴져 주위를 둘러보았다.
“설마, 아니겠지.”
은채가 자신의 허락도 없이 방 안에 들어올 리도 없었다.
화정의 일로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 수희가 발길을 돌렸다.
툭.
발끝에 치인 물건이 데구루루 굴러 방문과 부딪쳤다.
방을 나가려던 수희는 걸음을 멈추고, 문틀에 닿아 있는 볼펜을 주웠다.
“이게 왜 여기 있지.”
협탁 안에 넣어 둔 볼펜이 어째서인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수희는 닫혀 있던 협탁을 열어 볼펜을 넣어 두려 했다.
허리를 굽혔던 수희는 안에 놓여 있던 것 중 하나가 보이지 않아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발이 달리지 않은 이상 그게 사라질 리가 없었다.
단 한 번도 이 안에서 꺼낸 적이 없으니 다른 곳에 있을 리도 없었다.
혹시나 해 침실 이곳저곳을 뒤져 봤지만 어디에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은채 씨랑은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지금 이 순간, 준영이 했던 조언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
찬 바람이 불어닥치는 한강 둔치에 선 은채가 누군가를 찾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 이렇게 안 와.”
얇은 코트를 여미며 몸을 웅크리는데, 자신의 뒤편으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검은색 페도라를 쓴 화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은채의 인사를 무시하고 화정이 대뜸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은채는 품 안에 있던 투명 파일을 꺼내 화정의 손바닥 위에 얹어 주었다.
“계약서?”
은채가 수희의 집에서 가져온 것은 수희와 승조가 오래전에 작성했던 가짜 연애 계약서였다.
다섯 개의 조항을 읽고 있던 화정이 웃음을 터트리며 배를 붙잡았다.
“하하하하.”
“말이 가짜 연애지, 이거 스폰이나 똑같지 않아요?”
“너 진짜 큰 건 하나 했구나?”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계약서를 소중하게 투명 파일 안에 집어넣은 화정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터트려야지. 크게.”
화정이 자신과 뜻이 같다는 생각에 은채는 설렘을 숨길 수가 없었다.
“저희 사촌 오빠가 뉴스야 사장이에요. 거기서 믿을 만한 기자 한 명 소개해 달라고 할게요.”
“그래. 내 연락처 알려 줘. 내가 직접 전해 줄 테니까.”
“네. 저한테 맡겨 주세요.”
종일 화정에게 시달렸던 건 잊은 건지, 이번엔 은채가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
은채는 수희의 추락을 드디어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을 숨기지를 못했다.
***
밤이 지나가고, 오지 않길 바라던 하루가 시작됐다.
스튜디오 구석에서 대본 녹음 파일을 듣고 있던 수희의 옆으로 화정이 다가왔다.
화정의 기척을 느꼈지만, 수희는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한숨도 못 잔 얼굴이네.”
수희의 속을 벅벅 긁어 놓을 참인지 화정이 딱하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어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봐.”
펼쳐 놓고 있던 대본을 덮은 수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귀에 꽂은 이어폰을 주머니에 넣고 화정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나 무시하니?”
가시처럼 날 선 화정의 물음에도 수희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그래, 네가 촬영 들어가고 나서도 날 무시할 수 있을지 보자.”
팔짱을 낀 화정이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수희를 지그시 노려봤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촬영은 무난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화정을 부르는 엄마라는 호칭에도 이전과 다를 것 없이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게 아닌데.’
오히려 동요하는 건 화정이었다.
엄마라고는 못 하겠다고 어린아이처럼 울며 촬영을 중단시킬 줄 알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의 연기가 수희에게 말려들 것만 같았다.
조급한 마음이 수희에게도 보인 것인지, 수희가 미묘한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카메라는 수희의 뒤에 있었기에, 수희의 얼굴을 담지 못했다.
덜컹, 시선이 흔들린 화정이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컷, 좋아요.”
임 감독의 지시에 카메라는 타이트 샷을 찍기 위해 두 사람 앞에 세워졌다.
이어서 촬영이 들어가고, 수희가 대사의 첫머리를 뱉자마자 화정이 손을 들어 올렸다.
“나 도저히 얘랑 연기 못 하겠어.”
잔뜩 얼굴을 일그러트린 화정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수희를 깎아내렸다.
“너 배우 몇 년 찬데 연기를 이딴 식으로 해?”
“제가 연기를 어떻게 했는지 알려 주시면 고치겠습니다.”
전혀 타격 없는 얼굴로 딱딱하게 대꾸하자 화정의 입꼬리가 달달 떨렸다.
“시선 하나, 손짓 하나, 말투 하나하나,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잖아!”
격해지는 분위기에 임 감독이 다가와 말렸다.
“왜 그래, 화정 씨.”
화정은 말릴 틈도 없이 임 감독의 손에 들려 있던 대본을 낚아채 수희의 머리를 내리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수희의 고개가 돌아가고, 스튜디오 내부에 냉랭한 공기가 파고들었다.
헝클어진 수희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화정이 가소롭다는 눈빛을 쏘아 댔다.
“그렇게밖에 연기 못할 거면 그만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