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복수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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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복수의 서막
2022.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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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밖에 연기 못할 거면 그만해.”
잔뜩 겁먹은 얼굴로 수희가 바라보자 화정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목을 부드럽게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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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손이 삐끗했네. 때리려던 건 아닌데.”
싸늘해진 주위를 둘러보며 화정이 먼저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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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촬영 분위기 망쳤네. 미안해요.”
화정이 가자미눈으로 수희를 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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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못하는 것들을 보면 내가 짜증이 치솟아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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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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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가 마지막 촬영인데 발전이 없어, 발전이.”
스태프들이 웅성거리며 고개를 떨군 수희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쏟았다.
임 감독은 괜히 얼마 남지 않은 촬영을 망치고 싶지 않아 상황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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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 씨, 그래도 보는 눈이 많으니까 촬영장에서는 조심해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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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어요. 제가 임 감독님 봐서 참을게요.”
임 감독은 잘게 떨리고 있는 수희의 어깨를 토닥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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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촬영 들어갈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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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습니다. 할게요.”
수희가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다시 촬영이 시작되고, 역시나 화정은 수희의 대사를 받아 주지 않았다.
한 시간가량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나서야 화정과 함께 하는 신 하나가 끝이 났다.
같은 대사만 몇 번이나 내뱉었던 수희가 기진맥진한 얼굴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화정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유유히 스튜디오를 나갔다.
멀찍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철용이 다가오자 수희가 단번에 표정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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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내가 부탁한 건?”
냉정함을 띤 수희의 눈빛에 철용이 쥐고 있던 휴대폰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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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마. 네 말대로 전부 촬영해 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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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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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이화정 씨가 네 말대로 손까지 올릴 줄 몰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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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몰랐어.”
애원하지 않아도 화정이 바라는 대로 움직여 주었다.
덕분에 수희는 기회를 잡게 되었고, 이 기회를 헛되이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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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처럼 울고만 있지 않아.’
엄마가 떠나던 그때처럼, 대본을 못 읽던 그때처럼.
더는 혼자서 주저앉아 신세를 한탄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했다.
날 믿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더는 무너질 수만은 없었다.
***
며칠 뒤, 화정은 은채가 소개해 준 기자를 만나기 위해 직접 카페를 찾았다.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화정이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안경을 낀 기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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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야에 다니는 기자 중에 가장 이슈를 잘 다루는 기자래요.”
은채의 사촌 오빠 아래에 있는 직원이니 이것보다 더 안전한 거래는 없을 거라 여겼다.
카페에 있는 사람들을 의식한 화정이 선글라스를 벗지 않은 채 기자의 앞에 앉았다.
기자가 재킷 안쪽에서 꺼낸 명함을 공손히 두 손에 받쳐 화정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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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일한 기자입니다. 팬인데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젊은 남자 기자가 자신의 팬이라고 하니 화정의 입꼬리가 스리슬쩍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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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워요.”
화정은 서비스 차원에서 일한 기자의 손을 붙잡아 주며 명함을 챙겼다.
가볍게 악수한 손을 놓아주자 일한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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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수하신 계약서를 제가 직접 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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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든지.”
휴대폰 비밀번호를 눌러 화면을 보여 주자 일한이 두 손을 격하게 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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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사진보다는 직접 원본을 보고 싶습니다.”
별다른 거부감 없이 화정이 종이 한 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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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정말 배우 오수희 씨랑 FL 그룹 장남 한승조 대표가 같이 쓴 계약서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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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밑에 보면 두 사람 사인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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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이 있기는 한데…….”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건지 일한이 영 탐탁지 않은 어투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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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사실 관계를 정확히 따지는 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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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보다 더 확실한 사실 관계가 어디 있어요? 거기 계약서에 떡하니 사인도 박혀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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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약서가 조작된 걸 수도 있으니까요.”
발끈한 화정이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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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걔네 집에서 가져왔다고 했잖아!”
큰 소리에 주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눈이 화정에게로 돌아갔다.
화정은 급하게 머리카락으로 시야를 가려 보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일한은 적잖게 당황하며 빠르게 설명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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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인이 정말인지 전문가를 통해서 검증받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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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증받을 곳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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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전문 기관이 따로 있어요. 결과는 제가 최대한 빨리 받아 볼게요.”
단단히 여문 일한의 목소리에 화정은 저도 모르게 믿음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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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요,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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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얼마나 감사했던 건지 일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는 허리를 푹 수그렸다.
그런데 허벅지가 둥근 테이블을 밀어내며 위에 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화정에게 쏟아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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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씨! 진짜!”
치마 위로 와락 쏟아진 아메리카노에 화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한은 비지땀을 흘리며 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주워 화정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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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휴지를 확 낚아채 간 화정이 굽신거리는 일한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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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는, 안 젖었어요?”
일한은 자신의 손에 들린 계약서 앞뒷면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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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방울도 안 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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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화장실 다녀올 테니까 가방 좀 맡아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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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는 일한을 두고 화정이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안으로 화정이 사라지자, 일한이 건너편 소파에 있는 화정의 휴대폰을 가져갔다.
화정의 휴대폰을 재킷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은 일한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소파에 앉았다.
***
야외 촬영장에 도착한 화정은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매일같이 상황을 보고하던 일한과 연락이 끊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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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갑자기 연락 두절이야?”
잔뜩 짜증이 난 화정이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밴에서 따라 내린 매니저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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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이거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매니저가 보여 준 휴대폰을 건성으로 보고 있던 화정의 눈이 점차 커다래졌다.
이내 매니저의 휴대폰을 가져간 화정이 바들바들 떨며 야외 촬영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획 돌아 버린 화정이 개인 촬영 중이었던 수희를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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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네가 올린 거지?”
화정은 수희의 멱살을 잡으려 했지만, 준영의 저지에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카메라 화면 안으로 들어온 화정 때문에 촬영은 자연히 중단됐다.
수희는 화정이 보여 주려는 동영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얼마 전 화정이 수희의 머리를 대본으로 내리쳤던 그 일이 고스란히 녹화되어 인터넷을 떠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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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러세요, 선배님.”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수희가 대꾸하자 화정은 더욱 열이 뻗쳤다.
스태프들은 화정의 격분에 뒤늦게 휴대폰으로 동영상들을 확인하고 수군거려 댔다.
수희는 동영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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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이 절 때리는 걸 누가 찍었었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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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네가 한 짓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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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그때 맞고 있었는데 어떻게 제가 찍어서 올리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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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매니저나 코디가 찍었겠지!”
촬영장 근처에 모여든 시민들은 소란에 하나둘 휴대폰을 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휴대폰이 자신을 향하는지도 모르고 화정이 큰소리를 내려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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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 그만하세요.”
붙잡고 있던 화정을 뒤로 밀어내며 준영이 묵직한 한마디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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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증거가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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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랗게 어린놈이 어디라고 끼어들어?”
화정이 눈을 부라리며 준영에게 다가가자 임 감독이 나서서 화정을 나무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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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 씨. 이 정도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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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감독까지 쟤 편드는 거야? 쟤가 영악하게 동영상 올린 거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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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진 않잖아. 우리도 다 본 사실이고.”
쌀쌀맞은 임 감독의 반응에 화정은 자신을 둘러싼 스태프들을 바라봤다.
역시나 임 감독과 마찬가지로 화정에게 적대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시민들까지 자신을 주시하고 있으니 더는 수희를 몰아붙일 수도 없었다.
이를 갈며 수희를 노려보고 있는데, 서서히 수희의 입술이 올라섰다.
자신을 향해 미소를 보이는 수희를 보자 화정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제야 화정은 깨닫고 말았다. 이 모든 게 오수희의 작전이었다는 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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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악!”
자신의 차 안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던 화정이 두 손으로 핸들을 내리쳤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무릎 위에 올려 둔 핸드백을 조수석 창문으로 던져 버렸다.
핸드백 안에 있던 것들이 조수석으로 와르르 쏟아졌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화정은 조수석 위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들어 일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
길게 이어지던 신호음마저 끊기자 화정은 다시 조수석으로 휴대폰을 던져 버렸다.
두 사람의 가짜 열애 계약서까지 손에 얻고 나니 모든 게 다 제 뜻대로 흘러가는 듯했다.
그러나 계약서를 찍어 둔 휴대폰은 잃어버렸고, 일한은 어제부터 연락이 닿지 않았다.
흐름이 점차 수희에게 유리하게 진행되는 것 같은 건 자신의 착각인 걸까.
불안함에 손톱을 물어뜯던 중에 조수석에 있던 휴대폰이 울려 댔다.
화정은 액정에 뜬 일한의 이름에 얼른 휴대폰을 들어 귀에 가져다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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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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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전화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일이 너무 바빠서 연락 못 드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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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얼마나 바쁘길래 메시지 한 통을 못 봐?”
잔뜩 분개한 화정이 소리를 내지르자, 일한은 한껏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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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죄송합니다. 기사가 FL 그룹이랑 엮여 있다 보니, 사장님이랑 조율하기 어려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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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기사를 낼 수 있다는 거예요, 없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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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오수희 씨한테 타격이 가도록 기사 초안 작성했습니다. 시간 가능하시면 지금 만나 뵐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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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우리 집 주소 보낼 테니까, 그쪽으로 와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화정이 주소를 메시지로 보낸 뒤 안전띠를 맸다.
기필코 수희를 굴복시키고 말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액셀을 거칠게 밟아 댔다.
원래 촬영장에서 차로 25분이 걸리는 곳인데, 10분이나 단축해 빌라 앞에 도착했다.
운전석에서 내린 화정은 일한의 차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빌라 입구로 들어선 검은색 세단 한 대가 화정의 차 앞에 세워졌다.
화정은 그 차가 일한의 차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운전석 문을 열고 일한이 내리기를 기다렸는데, 어째서인지 뒷좌석에서 의외의 인물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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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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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한승조가 자신의 집을 알고 나타난 것일까.
설마, 뒷조사라도 한 건가.
얼떨떨한 화정의 앞에 선 승조가 어디선가 많이 본 종이 한 장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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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수희 약점이라도 잡고 싶었습니까?”
저 종이는 분명 일한에게 넘겨주었던 계약서 원본이었다.
무슨 일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이 화정이 손을 확 뻗어 계약서를 낚아채려 했다.
그러나 쉽게 승조의 손에서 빼앗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뒤로 반걸음 물러선 승조가 보란 듯 주머니에 있던 라이터를 꺼냈다.
종이 끝자락에 불이 붙자 순식간에 승조의 손안에서 계약서가 사라졌다.
다 타 버린 종이처럼 화정은 전투력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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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당신이 잡은 약점이 사라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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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가 그거 하나뿐인 줄 알아?”
사본으로 찍어 둔 게 자신의 휴대폰에 있었다.
그 휴대폰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동요를 일으키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가상해서인지 승조는 웃음이 나왔다.
검은색 코트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자 화정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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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내 휴대폰을 어떻게 네가 가지고 있어.”
승조는 친절히 대답해 줄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화정이 휴대폰을 가져가려 하자, 승조가 쥐고 있던 휴대폰을 놓쳤다.
정확히는 일부러 놓은 것이었다.
이미 초기화된 휴대폰의 메모리 칩까지 빼놓은 줄도 모르고 화정이 엎어져 휴대폰을 주우려 했다.
눈앞에 보이는 휴대폰으로 손을 뻗는데, 승조의 구둣발이 휴대폰의 정중앙을 찍어 눌렀다.
와작 하고 부서져 버린 액정을 승조가 사정없이 몇 번을 더 짓밟았다.
멍청하게 휴대폰을 보고 있던 화정이 턱 끝을 들어 올렸다.
망가져 버린 휴대폰을 발끝으로 치자 미끄러지며 화정의 손에 닿았다.
화정을 내려다보며 승조가 한심하다는 듯 눈살을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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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모습, 추한 거 압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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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네가 이걸 다 가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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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가 계약서랑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건지 궁금합니까?”
승조가 몸을 반쯤 틀어 자신의 뒤편에 서 있는 차를 바라봤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운전석 문이 열리더니 그곳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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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일한 기자. 왜…… 한승조랑 같은 차에서.”
화정은 한 방 얻어맞은 얼굴로 말을 다 잇지도 못했다.
승조는 뿌듯한 얼굴로 자신의 옆에 선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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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일한 기자가 아니라 제 직속 비서, 차효섭입니다.”
전부 승조의 계획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자신이 만나려던 기자가 승조에 의해 바꿔치기 당했다는 걸 화정은 너무나 늦게 깨달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