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 화정의 몰락 (77/118)


77. 화정의 몰락
2022.10.25.



 


“다시 인사드립니다. 한승조 대표님 비서 차효섭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차 비서는 예의를 차리며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화정이 벌건 눈으로 승조와 차 비서를 번갈아 봤다.


“이거 지금 사기야! 날 속이고 휴대폰을 훔치고 부숴?”

“이 정도에 화내긴 이릅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요.”

“뭐?”

승조가 차 비서에게 고개를 돌리자, 차 비서가 서류 가방에서 사진을 꺼냈다.

사진을 받아 든 승조가 한 장 한 장 여유롭게 눈에 담았다.


“6개월 전에 있었던 문캐슬 게이트, 기억하고 계시겠죠?”

문캐슬을 승조가 입에 올리자마자 화정은 마른침을 삼키며 달달 떨었다.


“그,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꽤 깊게 연루되어 있던데요.”

얼음꽃이 핀 듯 차디찬 음성에 화정은 소름이 끼쳐 올랐다.

한승조가 모든 걸 알고 자신을 협박하고 있다는 걸 화정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저 손에 들린 사진들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떻게 그 일을 잊을까. 몇억을 쏟아부어도 관계자의 입을 막을 수가 없어, 경찰청장 늙은이에게 붙어 교태까지 부려 가며 힘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게 왜 승조의 손에 들어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승조의 손에서 떨어진 사진 한 장이 바닥에 툭 내려앉았다.


“문캐슬 게이트에 연루된 사람들과 룸에서 술을 마시고.”

얼른 화정이 줍자마자 또 한 장이 떨어졌다.


“직접 신인 배우들을 데리고 들어오는 모습도 아주 적나라케 찍혀 있네요.”

“……!”

숙였던 허리를 세운 화정이 팔을 확 뻗어 승조의 손에 들린 사진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자 승조는 보란 듯 손에 들려 있던 사진들을 공중으로 흩뿌렸다.

하늘 위에서 펄럭거리던 사진들이 마치 꽃가루처럼 바람을 타고 날아다녔다.

화정은 사진을 잡아 보겠다고 펄쩍거리며 뛰다가 발목을 삐끗해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바닥에 쓰러진 화정의 손 위로 사진 한 장이 툭 떨어졌다.

술에 잔뜩 취해 자신의 뒤를 봐주던 경찰관과 허리를 껴안고 찍은 사진이었다.


“이 사진들을 어디서 구한 거야. 사진들은 분명히 내가 전부 없앴는데.”

“어떻게 경찰청장의 입을 막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전부 소용없게 됐습니다. 그 경찰청장이 직접 제게 넘겨준 사진들이니까요.”

경찰청장은 두 달 전에 벌어진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대표로 퇴직하게 되었다.

승조가 찾아가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경찰청장은 미련 없이 사진을 넘겨주었다.


“이화정 씨한테 어울리는 곳은 TV 속이 아니라 교도소 같아 보입니다.”

화정은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수희를 건드리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힘들게 덮어 왔던 과거가 이렇게 쉽게 밝혀질 줄이야.

방금까지만 해도 분노가 일었던 화정의 눈동자에 눈물이 어려 있었다.


“승만 씨, 그 사람이 알면 안 돼. 그 사람은 내가 이런 일 한 줄 몰라.”

“지금 부탁하는 겁니까?”

“그래, 부탁하는 거야. 부탁할게. 수희 근처도 안 갈게. 눈앞에서 사라질게.”

화정은 잘못을 빌며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빌어 댔다.

눈물까지 뚝뚝 흘리며 화정은 승조에게 기어가 다리를 부여잡았다.


“이제 그 사람 살날이 얼마 안 남았어. 나 끝까지 그 사람 곁에 남아야 한다고.”

승만이 모든 걸 알게 된다면 다시는 만나 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자신의 젊음과 사랑을 바쳤던 남자였다. 자존심을 다 버려서라도 승조를 설득해야 했다.

승조가 반걸음 뒤로 물러서자 화정의 손아귀에서 바짓가랑이가 빠져나갔다.


“부탁이 너무 늦었습니다.”

“…….”

“이미 사진은 드라마 마지막 방송이 끝나는 날에 기사로 나갈 수 있도록 조치했으니까요.”

막바지 촬영 중인 드라마는 이제 막 사람들에게 선보여지고 있었다.

문캐슬 게이트와 지금 떠도는 수희와의 불화설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불화설 정도는 며칠이 지나면 사람들에게서 잊히겠지만, 문캐슬 게이트와 화정이 연관됐다는 게 알려진다면 드라마에도 악영향을 끼칠 게 분명했다.

힘들게 촬영하는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까지 피해가 닿을까 싶어, 부러 드라마 종영 날로 기사를 준비해 둔 것이다.


“오늘부터 한 달 정도 남았네요. 이화정 씨가 경찰 조사를 받는 날까지 말입니다.”

무덤덤하게 꺼내 놓는 말들이 화정의 가슴에 칼날처럼 푹푹 박혔다.

눈물이 맺혀 있던 화정의 눈에 허망함이 담겼다.


“그 시간 동안 오승만 씨와 좋은 시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마치 사형 선고라도 받은 사람처럼 화정의 두 눈은 생기를 잃어버렸다.

돌아선 승조가 차 비서가 문을 열어 준 차에 올라타려던 순간이었다.

고개를 격하게 저어 보이던 화정이 사실을 부정하며 소리쳤다.


“정말 그 사진들을 전부 언론사에 넘겼다고?”

아닐 거야. 아니야. 아니어야 해.

그 사진이 세상에 나오면 난 더는 승만 씨 곁에 남을 수 없어.


“그거 나오는 순간 다 끝이야! 내가 가만히 안 둔다고!”

검지를 세운 화정이 차에 올라타는 승조에게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승조는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 문을 연 차 비서가 영업용 미소를 지어 보이며 친절히 말을 전했다.


“제가 기사 나오면 메시지로 링크 보내 드리겠습니다.”

결국 폭발해 버린 화정이 움켜쥐고 있던 사진을 차 비서에게 던졌지만, 근처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발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승조를 태운 차가 주저앉아 있는 화정의 옆을 지나쳐 유유히 빌라를 빠져나갔다.

근처에서 산책 중이던 사람들이 화정을 눈으로 흘겼지만 화정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주머니 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곧장 은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집에 쳐들어갈 생각이었는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은채가 전화를 받았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야!”

다짜고짜 내지르는 소리에도 은채는 태연히 설명했다.


[저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저한테는 한승조 대표가 학폭을 터트리겠다고 협박했으니까요.]

“너는, 중간에 기자가 바뀐 걸 알고 있었던 거야?”

[그건 오늘 사촌 오빠한테 들었어요. 한승조 대표가 더 큰 정보를 넘겨준다고 연락이 왔대요.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래요.]

그 정보란 자신이 얽힌 문캐슬 게이트를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한승조 대표가 저희 오빠 언론사 지분까지 며칠 사이에 10%나 사들이는 바람에 거절할 수도 없었대요.]

마녀사냥의 재물로 오르는 건 수희가 아닌 자신이었다.

종이 쪼가리 한 장에 기뻐하는 사이, 승조는 뒤에서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악!”

화정의 광기 어린 발악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

컷 소리에 철용이 수희의 곁으로 와 겉옷을 챙겨 주었다.

야외 촬영장에서 이어진 긴 촬영에 지칠 만도 하건만 수희는 웃는 얼굴이었다.


“오전에 이화정 씨랑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기분 좋아 보이네.”

크게 고개를 끄덕인 수희가 겉옷을 입으며 답했다.


“이제 정말 다 끝났다 싶어서.”

오늘 승조가 모든 걸 정리한다고 했으니, 화정도 더는 자신을 흠집 낼 수 없을 것이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수희는 촬영장 한편에 보이는 승조를 발견했다.

촬영을 시작했을 땐 보이지 않았는데, 벌써 화정과 이야기를 끝내고 온 듯했다.

철용은 옆으로 비켜서며 승조 쪽으로 손바닥을 눕혔다.


“얼른 가 봐. 내일은 오후 촬영이니까 재미있게 놀고.”

“알겠어. 내일 연락할게, 오빠.”

수희는 철용의 대답도 듣지 않고 승조에게 한달음에 달려가 안겼다.

자신의 품에 안긴 수희를 소중하게 껴안으며 승조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촬영은, 잘 끝냈어?”

“덕분에요.”

수희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승조가 옆에 세워 둔 차의 조수석 문을 열었다.


“피곤하지. 집으로 가자.”

“응.”

조수석 문을 승조가 열어 주자 수희가 차에 몸을 실었다.

안전띠를 매자 운전석으로 돌아온 승조가 차에 시동을 켰다.

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수희가 그에게 궁금했던 걸 물었다.


“어떻게 뉴스야로 기사를 터트릴 거라는 걸 알았어요?”

“강은채와 연관되어 있다면 뉴스야일 거라고 생각했어.”

FL 그룹이 엮인 일이니 쉽사리 언론사들이 나서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러니 강은채와 관련 있는 뉴스야나, 큰 언론사들의 손을 잡을 거라고 판단했다.

다른 언론사의 지분은 딱히 필요가 없었다.

FL 그룹이 시민들에게 좋은 인식으로 남아 있는 건, 이미 FL 그룹에서 여론을 잡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화정이 다른 언론사로 찾아갔다면, 바로 승조에게 연락이 왔을 것이다.


“전부 다 오빠 말대로 됐어요. 내가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면, 이화정 씨가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 거요.”

“그렇다고 손을 올릴 줄은 몰랐어.”

철용이 찍은 동영상을 보고 난 후, 승조는 더욱 처절하게 화정을 짓밟아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 덕에 이화정 씨 이미지도 갉아먹을 수 있게 됐으니 된 거죠.”

“네가 아팠잖아.”

걱정스러운 승조의 목소리에 수희가 크게 고개를 저었다.


“별로 아프지도 않았어요.”

“또다시 그런 일 있을 때는 참지 않아도 돼.”

이미 여론은 수희 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수희가 반항한다 한들 타격은커녕 오히려 수희의 편을 들 것이다.


“어차피 내일이 마지막 촬영인걸요.”

“아쉽지는 않아?”

이만큼 고통받았으면 후련해야 하는 게 맞는데, 어째서인지 아쉬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홧김에 승만이 집필을 그만두면 어쩌나 걱정도 했지만, 마지막 화까지 완벽한 대본을 만들어 냈다.

끝끝내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김시운 작가의 글은 늘 수희에게 울림을 주었다.


“조금요. 아주 조금 아쉬워요.”

마지막 촬영에도 화정과 함께였지만, 더는 두려움에 떨지 않을 것이다.

나약한 자신을 버린 건 아주 오래된 일이었다.


“며칠 사이에 좀 큰 것 같네.”

키가 클 리도 없는데 승조가 정면을 주시하며 수희의 머리를 토닥였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에 수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요. 한창 클 나이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웃음을 터트렸다.

창가로 고개를 돌린 수희는 빽빽이 채워진 건물들을 보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


“떠나고 싶다.”

공기처럼 가볍게 흘려보낸 말이 승조에게도 닿았나 보다.


“어디로 떠나고 싶은데?”

“음.”

잠시 고민하던 수희가 말을 이었다.


“그냥, 오빠랑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곳이면 다 좋아요.”

입술을 길게 늘이며 환하게 웃어 보이는 수희를 보니 원하는 곳은 어디든 데려다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일 오후에 촬영이 있다고 들었으니 멀리는 가지 못할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승조는 유턴 표시가 그려진 도로에서 핸들을 틀었다.


“가자,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곳.”

 

***



“진짜 여기 들어와도 되는 거예요?”

승조가 수희를 데려온 곳은 FL 그룹이 가지고 있는 아쿠아리움이었다.

이미 폐장 시간이었기에 손님들은 없었지만, 내부의 불은 환히 켜져 있었다.

직원조차 없는 입구로 들어서며 수희가 한참을 쭈뼛거리자 승조가 웃음을 지었다.


“관계자한테 연락해 뒀으니까 그렇게 도둑처럼 안 굴어도 돼.”

“여기서 내가 뭘 훔쳐 가겠어요.”

“거북이 한 마리 업고 갈 수도 있지.”

승조가 모래사장 위를 걸어 다니는 지상 거북이를 눈짓했다.


“차라리 펭귄 한 마리를 업고 갈래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펭귄 무리를 보고는 수희가 종종걸음으로 뛰어갔다.

중학교 때 가족들과 딱 한 번 아쿠아리움에 가 본 적이 있었다.

아쿠아리움을 나오면서 승만이 펭귄 인형을 안겨 줬던 게 기억이 났다.

저 멀리에 있는 오션 터널을 보고는 수희가 신이 난 목소리로 승조를 불렀다.


“오빠, 여기 와 봐요.”

나비처럼 이곳저곳을 누비는 수희를 보니 승조의 입가에선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오션 터널로 들어선 승조가 이미 터널의 중심에 선 수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터널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가오리를 올려다보는 수희의 눈망울에는 설렘이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주변으로 쏟아져 내리는 빛을 보며 승조는 단 한 가지의 사실이 가슴에 와닿는 걸 느꼈다.

늦지 않게 이 말을 수희에게 전하고 싶었다.


“수희야.”

수희가 뒤돌아서자 승조가 한 글자 한 글자 소중히 꺼내 놓았다.


“좋아해.”

네 미소도, 네 향기도, 네 전부를 좋아한다.

아니, 어쩌면 좋아하는 것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사랑해.”

내가 스스로 알아차리기 전부터, 너를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해, 오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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