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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포기 못 해 (79/118)


79. 포기 못 해
2022.11.01.


앙다물려 있던 수희의 잇새가 벌어지자 미끈한 것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머금고, 깨물고, 삼키며 승조는 쉼 없이 수희를 취했다.

아래로 내려온 승조의 입술이 하얀 목선에 붙자 수희의 머리가 뒤로 넘어갔다.

그의 손이 몸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머리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눈을 감고 있자 감각은 더욱 선명해져 그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움찔거리며 떨렸다.

고조되는 분위기에 수희의 발끝은 자꾸만 안으로 말렸다.

밭은 숨을 내쉬던 수희가 그의 시선을 느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느덧 자신의 샤워 가운 매듭이 그의 손에 의해 전부 풀려 있었다.

침실의 불이 전부 꺼진 게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자신의 하얗던 몸이 지금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을 게 분명했다.

밭은 숨을 내쉰 수희가 상체를 들어 올려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수희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그가 그녀의 체향을 마음껏 들이켰다.


“사랑해.”

너무 늦게 알아차린 게 이상할 정도로.


“사랑해, 수희야.”

“오늘 종일 말해 주려는 거예요?”

“그래. 원 없이 말해 줄게.”

어깨를 덮고 있던 수희의 가운이 아래로 내려가고, 그가 수희의 매끈한 허벅지를 짚었다.

하나둘 벗겨지는 껍데기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천천히 겹쳐지는 열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야트막한 신음이 방 안에 차곡차곡 쌓이고, 두 사람의 이마에 맺힌 땀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었다.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시야 안으로 들어오는 승조의 얼굴에 수희가 손을 뻗었다.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에 그가 고개를 틀어 입을 맞췄다.

절정의 끝에 다다를수록 아래에 깔린 이불이 마구잡이로 흩어지고 구겨졌다.

이미 반쯤 이성이 날아간 수희와 달리 승조는 오히려 의식이 또렷해지는 기분이었다.

승조는 수희를 밤새 품에 안고 놓아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16년, 내가 널 기다린 세월만큼, 딱 그만큼만 널 사랑해 줄 생각이었다.


***

천재는 1%의 재능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이 말을 여기에 갖다 붙여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1%의 재능이 99%의 노력을 압도할 정도로 클 줄이야. 그것도 무척이나.

승조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웠는데, 그는 멈췄다 싶으면 또다시 밀려들어 왔다.

마치 갈증이 나는 사람처럼 승조는 수희를 몇 번이나 취했다.

이러다가는 자신이 말라 죽겠다 싶어 수희가 그에게 백기를 들어야 했다.

호텔 미니바에서 생수를 가져온 승조가 침대맡에 등을 기대고 앉은 수희에게 내밀었다.


“고마워요.”

생수를 꿀꺽꿀꺽 들이켜는 수희의 곁으로 승조가 가깝게 붙어 앉았다.

마시고 있던 생수를 협탁 위에 내려 둔 수희가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승조를 바라보았다.


“처음이라면서요.”

“처음이야, 정말.”

같은 초심자의 입장으로 전장에 나갔건만, 상대는 뛰어난 재능이 있을 줄이야.

온몸에 힘이 빠져 버린 수희가 자신과 비교해 아직 생생한 승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 사실 오빠한테 말 다 못 한 게 있는데.”

그의 눈길이 닿자 수희가 입술을 끌어 올리며 따듯한 목소리로 진심을 전했다.


“오빠가 내 옆에 있어 줘서 정말 다행이에요.”

승조가 아니었다면 버텨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갑작스레 닥쳐온 상황을 이겨 내지 못하고 결국엔 포기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당연한 거야.”

승조가 수희의 어깨를 감싸 잡고서는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내가 네 옆에 있는 거.”

반짝 눈을 뜬 수희가 엄지와 소지를 펼쳐 승조에게 내밀었다.


“그럼 나랑 약속 하나 해요.”

“어떤 약속?”

“절대,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옆을 떠나지 않는다는 거.”

수희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까지 받아 내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어서요.”

손을 승조의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자 그가 가볍게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엄지까지 꾹 짓누르고 나서야 수희가 만족스럽다는 듯 승조를 껴안았다.


“도장 찍었어요. 나 안 떠날 거라고.”

“네가 가라고 해도 어디 안 가.”

수희의 이마에 입을 맞춘 승조가 기분 좋은 미소를 입에 담았다.

모든 게 뜻대로 풀리다 보니 안심 같은 걸 하고 있었다.

이제는 우리에게 시련은 없을 거라, 이별은 없을 거라고…….

그러나 모든 게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거센 바람은 다시금 몰아쳐 왔다.

***

화정은 빌라 앞에 뿌려진 사진을 찾느라 승조가 떠난 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집으로 올라왔다.

바닥을 기어 다니느라 흙으로 엉망이 된 바지를 털어 내며 현관문을 열었다.

불이 꺼져 있어야 하는 집 안에 전등이 환히 들어와 있자 화정은 의아했다.

거실로 들어서자 주방에서 된장찌개를 끓이고 있던 승만이 뒤를 돌아보았다.


“왔어?”

승만이 찾아올 줄 몰랐던 화정이 일일이 주워다 모은 사진을 주머니 안에 쑤셔 넣었다.


“다 됐으니까 거기 앉아 있어.”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의 연락에 답장 하나 없던 승만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집까지 와 요리하는 모습을 보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얼결에 식탁 앞에 앉는데, 승만이 다 만든 요리를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다정하게 숟가락까지 화정의 손에 쥐여 준 승만이 자리에 앉으며 눈짓했다.


“밥도 못 먹었을 텐데, 어서 먹자.”

평소에도 이렇게까지 섬세하게 자신을 챙기지는 않았기에 화정은 의아하기만 했다.

승만은 먼저 숟가락을 들었다 도로 내려놓으며 운을 뗐다.


“촬영장에서 수희 때린 거, 나 때문에 그런 거지?”

“응?”

“위로해 주고 싶어서 온 거야. 나 때문에 사람들한테 욕먹는 것 같아서.”

꼭 그런 건 아니었다.

힘든 티 하나 내지 않고 뻔뻔하게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는 얼굴이 보기 싫었다.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건 망신을 주는 것밖에 없었기에 손을 올린 것이었다.

그 때문에 인터넷에 폭행 영상이 올라왔지만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뺨 한 대로 끝낸 게 아쉬울 뿐이었다.


“나도 손 올리고 싶지 않았는데, 수희 걔가…… 사람들 없을 때 나한테 욕을 하는 거 있지.”

“무슨 욕을 했는데.”

“너무 심한 욕을 해서, 내가 입에 담을 수가 없어.”

승만은 고개를 숙이며 화정에게 사과했다.


“내가 애를 잘못 키웠어. 어렸을 땐 그러지 않았는데.”

“승만 씨가 사과할 게 뭐가 있어. 다 내 탓인걸.”

상냥한 말씨로 승만을 다독거린 화정이 흘러나오려는 미소를 힘겹게 참아 냈다.

이로써 멀어졌던 승만과의 거리는 더욱 끈끈하게 좁혀지게 되었다.

인터넷을 떠도는 자신의 폭행 동영상이 승만과 화해할 계기가 되어 줄 줄이야.

화정에게 더 이상의 명예는 필요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평생 함께할 수 있는 가족이었다.

완벽한 가정, 그걸 승만과 만들고 싶었다.

승만은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화정의 손등 위에 제 손바닥을 얹었다.

부드럽게 화정의 손등을 쓸어내리며 승만이 굳게 정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주형이한테 말해 보려고 해.”

“뭘 말이야?”

“간 이식해 달라고.”

화정이 그동안 입이 닳도록 말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던 승만이었다.

대를 이어 줄 주형이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하던 승만이 달라졌다.


“나 살고 싶어졌어.”

수희가 자신의 불륜 사실을 알았을 때까지만 해도 삶을 포기하려 했다.

수희의 마음이 돌아서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고, 더는 수많은 약들로 생명을 연장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자신의 곁에 남아 있는 화정을 보고 다시금 약한 마음을 다잡았다.


“화정아, 남은 생은 널 위해서 살게.”

낭만적으로 들리는 말에 화정은 불쑥 눈물이 나오려 했다.

승만은 화정의 손을 잡고 들어 올렸다. 고개를 내리니 어느새 자신의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보였다.


“어머.”

화정이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자 승만이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주형이한테 간만 받고 나면 결혼하자.”

승만과 연애하는 동안 그가 해 준 선물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 속에 반지는 없었다.

매번 말로는 애란과 이혼하겠다고 했지만, 승만은 정작 화정과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고, 화정은 느끼고 있었다.


“정말, 결혼하는 거지?”

“해야지, 결혼. 네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데.”

행복도 잠시, 화정은 괜스레 걱정이 몰려왔다.


“주형이가 수술한다고 할까.”

“주형이라면 당연히 수술한다고 할 거야.”

“오수희 걔, 분명히 자기 동생한테 우리 사이 전부 말했을 거야.”

“주형이가 연락받는 거 보니까 말 안 한 거 같아.”

어렸을 때부터 제 동생을 끔찍이 아끼던 애였다.

알릴 생각이었다면 고소장을 보자마자 주형에게 알렸을 것이다.

화정은 자신의 두 손바닥을 맞부딪치며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잘됐다. 수술만 받으면 당신 살 수 있을 거야.”

“살아야지. 이때까지 미뤄 둔 결혼 하려면.”

승만의 말이 끝나자마자 식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울렸다.

자리에서 일어선 승만은 휴대폰을 가지고 잠시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 문이 닫히자 화정은 주머니 안에 넣어 둔 망가진 휴대폰을 꺼냈다.

전원 버튼을 세게 눌러 봤지만, 화면에는 여전히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망할.”

조용히 욕을 삼킨 화정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불안함에 떨었다.

자신이 목표로 삼은 결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위기만 넘어간다면, 승만과 결혼할 수 있었다.


“거의 다 왔는데, 내가 이대로 포기할 것 같아?”

승만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절망에 빠져 있던 화정은 사라졌다.

지금 화정에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일을 덮겠다는 일념 하나밖에 없었다.

***

이튿날, 이른 오후.

연달아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에 주형이 짜증이 섞인 얼굴로 현관문을 열었다.


“아침부터 누구야!”

“아침이 아니라, 벌써 오후 2시야.”

주형은 자신의 집 앞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는 눈을 아래로 짓눌렀다 떠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승조의 형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승조를 보고 주형은 적잖게 당황했다.


“연락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와도 되는 거예요?”

“연락은 이틀 전에 미리 했어. 받지 않긴 했지만.”

“제가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거든요.”

이미 애란의 생신제 때 휴대폰 번호를 교환했지만, 주형은 거짓말을 둘러대 빠져나가려 했다.

승조는 주형이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전화를 안 받길래 직접 찾아온 거야. 잠깐 시간 좀 내줘.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제가 지금 바빠서요. 다음에 이야기해요.”

“길게 시간 안 뺏어. 잠깐이면 돼.”

승조가 현관 안으로 한 발 들여놓으려고 하자, 주형이 얼른 문고리에 두 손을 얹었다.


“전 집에 아무나 들이지 않습니다.”

“보통 매형을 아무나라고 하나?”

“아직 결혼 전이니까 매형은 아니죠.”

“저번에 먼저 매형이라고 불렀던 건 처남인데.”

승조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말 하나하나를 즉각 받아쳐 내자 주형은 할 말이 사라져 버렸다.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문을 닫으려 손잡이를 두 손으로 힘껏 당겨 봤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게 왜 안 닫혀.”

좀 더 힘껏 끌어당겼던 주형은 문을 붙잡고 있는 승조의 손을 뒤늦게 발견했다.

주형이 승조의 손을 치워 내려던 찰나였다.


“오승만 씨, 그러니까 네 아버지에 대해 할 말이 있어.”

시선을 들어 올린 주형이 승조와 마주했다.


“꼭 네가 들어야 해.”

승조의 낮은 음성이 주형을 설득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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