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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미묘한 기류 (80/118)


80. 미묘한 기류
2022.11.05.



 
주형이 식탁 위에 물잔을 올려놓으며 승조의 앞에 앉았다.

자신의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라고 하니 승조를 보낼 수가 없었다.


“할 말이 뭐예요?”

이때까지만 해도 주형은 별일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자신의 누나도 아니고 승조였다. 남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뭘 얼마나 알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이어 들려오는 내용은 하나도 빠짐없이 충격적이었다.


“수희에게 간 이식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그 이야기 때문이라면 저는 더 할 말 없어요.”

“다 듣고 말해.”

승조가 단호하게 말을 가로막자 주형의 입이 자연스레 닫혔다.


“수희는 원래 촬영이 끝나고 나서 간 이식을 하려고 했어.”

“그런데 왜 마음을 바꾼 건데요? 막상 수술하려니까 겁이 난대요?”

“넌 수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냉정할지 몰라도 배우는 자신의 껍데기로 먹고사는 직업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몸에 보험을 드는 배우들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수희는 자신을 흠집 내는 일을 감수하면서까지 승만에게 이식해 주는 것을 선택했다.


“무슨 뜻이에요, 그 말?”

발끈하는 주형의 모습에 승조가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머님이 살아 계실 때, 네 아버지가 불륜을 저질렀어.”

“……뭐, 뭐요?”

“그 불륜 상대는 지금 수희와 드라마를 찍고 있는 배우 이화정이고.”

충격에 입을 벌린 주형은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증거도 없이 승조가 자신의 집까지 찾아오진 않았을 것이다.

놀라운 이야기를 전부 받아들일 틈도 없이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이 쏟아져 나왔다.

승만에게 느끼는 배신감보다 수희에 대한 의문이 먼저였다.


“누나는 그걸 알면서 왜 직접 말 안 하고 당신한테 시킨 건데요?”

“수희는 내가 여기 온 사실을 몰라.”

“…….”

“수희라면 널 위해서 끝까지 숨겼겠지.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으면 했어.”

후에 주형을 찾아갔다고 말한다면 수희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

수희가 끝까지 감추고 있던 부분을 들췄으니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었다.

전부 다 알고 있는데도 행동으로 옮긴 건, 그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주형이기 때문이었다.


“수희는 모든 사실을 알고 나서 가장 먼저 네 걱정을 했어.”

“나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잖아요. 알았으면 누나한테 그런 말을 안 했을 거라고요!”

억울하다는 듯 주형이 목소리를 높이는데도 승조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물어봤어야지. 네 누나가 왜 그런 선택을 한 건지, 그것부터 물어봤어야지.”

고저 없이 다그치는 승조의 음성에 주형은 입이 붙어 버렸다.


“오승만 씨가 곧 연락할 거야.”

주형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빠랑은 매일 연락하고 있어요. 이틀 뒤에 만나려고 약속도 잡아 뒀고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승조가 흥미도 없는 얼굴로 알려 주었다.


“아마 너에게도 간 이식을 부탁할 거야. 수희에게 했던 것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주형이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아빠한테 간 이식해 준다고 했을 때, 아빠는 괜찮다고 했어요.”

“지금은 달라졌을 거야. 일단 사는 게 가장 중요할 테니까.”

점차 죽음이 다가오는 사람에겐 눈에 보이는 게 없을 것이다.

무슨 이유로 이제껏 주형에게 부탁하지 않은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살고자 한다면 분명 머지않아 주형에게도 간 이식을 부탁할 것이다.


“아버지를 살리고 싶다면 살려.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자리에서 일어선 승조가 수그러진 주형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 선택에 대한 몫을 수희도 나눠 가진다는 것만 알아 둬.”

자식에게 상처를 남기고도 살겠다는 승만의 욕심에 수희가 다치는 걸 더는 지켜볼 수 없었다.

주형이 수술대에 오른다고 한다면 수희가 다시 한번 크게 흔들릴 게 분명했다.

수희에게 남은 진정한 가족은 주형 하나뿐이기에, 지켜 주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돌아선 승조가 문을 닫고 나가자 주형이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한 움큼 움켜잡았다.

쉼 없이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욱신거리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진 휴대폰이 진동하자 주형이 머리를 들어 올렸다.

―아빠

액정에 뜬 두 글자에 주형은 조심스레 휴대폰을 붙잡았다.

***

드라마 <패밀리>의 마지막 촬영은 결혼식장에서 이뤄졌다.

수희와 준영의 촬영으로 대기 시간이 길어지자, 은채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려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가 싶더니 다시금 양쪽으로 활짝 펼쳐졌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은채가 구석으로 비켜섰다.

애써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자신의 옆에 선 사람을 무시하려 했다.


“너 내 전화 왜 피하니?”

벽을 보고 있던 시선을 옮기니 화정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불같이 화를 낼지 모르기에 은채는 최대한 화정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했다.


“메시지 드렸잖아요. 바쁘다고.”

팔짱을 낀 화정이 허리를 숙이며 한쪽 눈썹을 산처럼 들어 올렸다.


“어디 싹수없이 메시지로 퉁쳐.”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은채가 후다닥 밖으로 내렸다.

화정은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가는 은채를 뒤따라가서는 머리채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어딜 도망가.”

엘리베이터 밖에는 CCTV가 없는 걸 확인하고, 좀 더 강하게 은채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아악! 이거 놔요!”

“너는 네가 살인 미수범인 거 밝혀지는 게 전혀 안 무섭나 보다.”

“놓으라고요!”

화정은 은채의 머리를 힘껏 아래로 내던지듯 놓으며 협박했다.


“화재 일으킨 범인이 너라는 거, 내가 감독님한테 말해 줄게.”

“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은채가 숭덩숭덩 나오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빼냈다.

제 몸에 손을 대자 은채는 눈에 뵈는 게 없어졌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은채가 화정의 앞으로 걸어갔다.


“증거는 있어요? 내가 불 질렀다는 증거.”

“내가 목격잔데 무슨 증거가 필요해?”

“그럼 지금 가서 감독님한테 말하세요. 전부.”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화정의 눈살이 설핏 찌푸려 들었다.


“너 뭐가 그렇게 당당해?”

은채는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정리하며 화정을 훑어 내렸다.


“한 대표님이 그러던데요? 당신이 가진 증거는 없을 거라고. 있다 해도 자기 힘으로 충분히 없앨 수 있다고.”

갑자기 승조가 이야기에 끼어들자 화정은 부정하지 못한 채 굳어 버리고 말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화정을 보며 은채는 기가 찬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선배님, 한 대표님한테 무슨 책잡힌 거라도 있어요?”

한승조는 자신의 휴대폰 내용물을 전부 봤을 것이다.

그 안에 화재와 관련된 사진은 없었을 테니 증거는 없을 거라고 판단한 거다.

독기를 품은 화정은 치밀하고 계획적인 승조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전 제발 선배님 계획에서 빼 주세요. 저한테까지 구정물 튀니까요.”

“뭐? 구정물?”

자신에게 완전히 우세가 기울었다는 걸 알고 은채가 화정의 신경을 박박 긁어 댔다.


“지금까지 연기하셨으면 좀 쉬셔도 되잖아요. 그런데 저는 아직 젊고 예쁜데, 선배님이랑 엮이면 억울하죠.”

“너어……! 내가 이대로 무너질 것 같아?”

소란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는 듯 은채가 한 손을 펼쳐 보였다.


“선배님 혼자서 일어서든지 무너지든지 하시고, 저는 제 갈 길 가려고요.”

“야. 강은채. 거기 안 서? 강은채!”

화정이 악을 질러 보았지만, 은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치솟아 오르는 화를 분출하지 못한 화정은 바르르 몸을 떨어야 했다.


“이대로 순순히 당하고만 있으라고?”

지금까지 연기에 모든 걸 바치고 살아왔다.

그런데 어린것들이 자신의 연기 인생을 끊어 놓으려 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연인과 생이별하게 만들고 콩밥까지 먹이려고 하고 있었다.


“가만히 못 있지. 내가 누군데.”

바득바득 이를 간 화정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예식장으로 올라갔다.

드라마 <패밀리>의 모든 촬영이 끝났다.

예식장에서 마지막 단체 사진 촬영까지 모두 마친 뒤에 스태프들의 박수 세례가 이어졌다.

그 박수의 주인공은 주연 배우들이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수희는 시원섭섭한 미소를 지으며 스태프와 감독에게 인사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푹 수그렸던 허리를 들어 올리는데, 수희의 어깨에 화정이 손을 얹었다.

다정하게 수희를 끌어안은 화정을 보고 다들 동그랗게 눈을 뜨며 분위기를 살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접촉해 오니 수희는 자신의 어깨에 붙은 손을 떼어 낼 수도 없었다.

화정은 그걸 노린 건지, 보란 듯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수고했어, 수희야. 끝까지 너무 멋있었어.”

이제 와 태도를 바꾸는 모습이 이질적이기 그지없었다.

웃는 얼굴 뒤에 숨겨져 있을 검은 마음을 수희는 잘 알고 있었다.

굳어 가는 입매를 들어 올린 수희가 겨우겨우 목소리를 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지켜보던 임 감독이 수희와 화정을 번갈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두 사람 화해한 거야?”

일방적인 화정의 폭행이었기에, 화해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수희의 발언을 막아 버리듯 화정이 수희를 지그시 보다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가 언제 싸웠었나요? 그때 수희한테 뭐라고 했던 건 다 잘되라고 그랬던 거죠.”

수희는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화정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선배님도 수고하셨습니다.”

당장이라도 헛소리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자신만 참으면 아름다운 유종의 미를 맞이할 수 있었다.

화정은 수희가 밀어낸 손을 내려다보더니 보일 듯 말 듯 비소를 지어 보였다.

수희에게 등을 돌린 화정이 임 감독에게 말했다.


“우리 촬영도 끝났는데 전체 회식 하죠. 제가 쏠게요.”

단체 회식을 제안하자 스태프들이 들뜬 표정으로 웅성거렸고, 술을 좋아하는 임 감독의 얼굴도 활짝 폈다.


“회식 좋지! 시간 되는 사람들은 같이 가죠.”

스멀스멀, 발밑에 깔려 있던 어둠이 서서히 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마지막 촬영을 축하하는 회식이라고는 하지만, 화정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어 보였다.


“수희 너도 갈 거지?”

여러 개의 시선이 수희에게로 몰려든 때였다.


“저도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조용한 예식장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수희의 고개가 버진 로드 끝으로 향했다.

긴 다리를 뻗은 승조가 성큼성큼 수희의 곁으로 다가왔다.

턱시도를 입지도 않았는데 버진 로드를 걸어오는 승조에게 모두가 압도되고 말았다.

수희의 옆에 선 승조가 화정을 보며 물었다.


“저도 마지막 촬영을 축하하고 싶은데, 제가 가도 상관없겠죠?”

상관있다는 말이 나온다면 오히려 이상할 상황이었다.

승조의 얼굴만 봐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화정은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그럼요. 우리 드라마 큰손도 같이 가야죠.”

짧은 찰나 승조와 화정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흩어지고, 화정은 미소를 지운 채 돌아섰다.

***

통째로 빌린 고깃집은 술에 취해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화정이 무슨 짓을 벌이기라도 할까 봐 수희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화정은 수희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임 감독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군 건가.’

잠시 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화정이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주목! 주목!”

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이 화정의 큰 목소리에 시선을 모았다.


“스태프 여러분들, 배우분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벌써 취한 건지 허리를 꾸벅꾸벅 숙이던 화정이 옆 테이블에 있던 수희를 손으로 가리켰다.


“특히 내가 가장 아끼는 첫째 딸, 수희. 고생 많이 했어. 다들 박수!”

화정이 손뼉을 치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손뼉을 쳤다.

사람들의 눈길이 수희에게 쏠리고, 박수 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한마디를 기다리고 있자 수희가 입술을 천천히 떼어 내려 했다.

스르르 입술을 들어 올린 화정이 핏대를 세우며 사람들에게 똑똑히 전했다.


“내가 사실 수희한테 편견을 좀 가지고 있었어요.”

무슨 소리인가 싶어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짧은 찰나였다.

화정이 폭탄 같은 비밀을 터트려 버린 건.


“수희가 김시운 작가님 딸인 거 있죠.”

내가 살 수 없으면 끌어안고라도 떨어져야지.

난 끝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 할 거야.

그게 내가 다시 올라설 수 있는 발판이 된다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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