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너만 없었더라면
(81/118)
81. 너만 없었더라면
(81/118)
81. 너만 없었더라면
2022.11.08.
“수희가 김시운 작가님 딸인 거 있죠.”
일제히 사람들이 입을 쩍 벌리며 수희에게 고개를 돌렸다.
화정이 승만의 비밀을 밝힐 줄 몰랐기에 수희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수희의 침묵에 사람들은 화정의 말에 신빙성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거기에다 남자친구는 드라마 제작사 대표.”
화정이 수희의 앞에 앉아 있는 승조를 콕 집어 말했다.
잔잔한 물결처럼 사람들이 점차 웅성거리며 말소리를 더해 갔다.
“아무리 실력이 있는 배우라지만, 아닌 건 아닌 거잖아요.”
고개를 잘잘 저으며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인 화정이 목소리를 좀 더 높였다.
“든든한 백을 가진 덕분에 주연 자리에 떡하니 앉은 어린 배우가 내 마음에 조금 안 들었나 봐요. 어른답지 못하게 수희한테 엄하게 대했어요.”
사람들은 김시운 작가의 딸이 수희라는 사실에 꽂혀 있었다.
뒤이어 붙는 화정의 말들을 한 귀로 흘리고는 저들끼리 숙덕거렸다.
“김시운 작가님의 딸이라고 해도 수희는 수희인데 말이에요.”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웃어 보인 화정이 자리에 앉았다.
쏟아지는 시선들을 버틸 수가 없어 수희는 도망치고 싶었다.
정작 화정은 김시운 작가의 연인이었지만, 그 사실을 제 입으로 밝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걸 지금 밝힌다고 해서 실추된 체면이 바로 서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수희와 화정의 유쾌하지 않은 관계에 대해 신나게 떠들어 댈 게 분명했다.
추측이 난무하는 말들이 무성하게 피어오르기 전에 임 감독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자, 우리 분위기가 너무 업 돼 있어서 다운시킬 필요가 있어.”
적당히 술에 취한 임 감독이 사람들의 이목을 다시 끌어왔다.
임 감독은 옆에 앉은 화정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 화정 씨가 뭘 잘못 알고 하는 말 같아.”
두 눈을 동그랗게 뜬 화정이 어금니를 콱 깨물며 임 감독을 올려다봤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오수희 씨를 여자 주인공으로 추천한 건 김시운 작가님이 아니라 나라는 뜻이지.”
얼어 있는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임 감독이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내가 좀 보는 눈이 있잖아.”
그제야 사람들의 엄정했던 낯빛이 밝게 변했고, 하나같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순간에 흐름을 가져간 임 감독에게 화정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임 감독, 이렇게 쉽게 넘길 문제가 아니지. 나도 김시운 작가한테 들은 게 있는데.”
임 감독은 일어서려는 화정의 어깨를 부드럽게 짓누르며 일러두었다.
“캐스팅 권한은 작가에게도 있지만, 감독인 나에게도 있어.”
임 감독은 큰 소리로 말하며 사람들이 동조해 주길 원했다.
“여기서 오수희 씨 연기에 납득 못 하는 사람 있어? 이번 <패밀리> 여자 주인공 역할, 오수희보다 잘할 수 있는 배우가 누가 있을까?”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희를 향해 엄지를 들어 올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경직되어 있던 수희가 그제야 긴장을 풀어 놓았다.
“자, 한 잔씩 듭시다!”
이야기의 흐름을 끊으려는 듯 임 감독이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사람들은 서로의 잔을 부딪치며 시끌벅적하게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야심 차게 꺼낸 패를 너무나 허망하게 날린 화정은 식당을 박차고 나갔다.
임 감독도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화정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화정 씨.”
화정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계획을 전부 망쳐 버린 임 감독을 보자 화정은 눈이 돌아 버렸다.
“너 돈이라도 처먹은 거야?”
다짜고짜 날아오는 험한 말에 임 감독의 눈가가 찌푸려 들었다.
“돈을 처먹다니.”
“한승조한테 돈 처먹은 거 아니면 그딴 말을 왜 하는데.”
화정은 확신 같은 게 있었다.
자신이 부려 먹던 은채를 채 갔던 것처럼 임 감독 역시 꾀어 갔을 거라 생각했다.
불같이 화를 내도 모자라지 않지만 임 감독은 오히려 차분하게 대응했다.
“이화정. 우리 적당히 선은 지키면서 살자.”
“뭐? 선?”
임 감독은 드라마 새내기 감독이었을 때부터 화정과 많은 작품을 함께 했다.
오랜 시간 동안 화정을 봐 온 사람이기에 애정 어린 충고를 날렸다.
“너보다 한참 어린 애한테 하는 지금 행동이 올바르다고 봐?”
“임 감독, 지금 내가 유치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화정의 두 눈썹이 꿈틀댔다.
“우리 다 늙어서 이제 막 빛을 보고 뜨고 있는 애 앞길에 그늘지게 하지 말자고.”
“하하. 임 감독, 쟤 김시운 작가 딸이라고! 내가 없는 소리 했어, 지금?”
오히려 잔뜩 독기가 오른 화정이 격양된 목소리로 날뛰었다.
단순히 취기로 이성을 잃은 줄 안 임 감독이 등을 돌렸다.
“다음에 이야기해. 제정신일 때.”
“나 멀쩡해! 멀쩡하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화정을 두고 임 감독은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수희는 사람들 속에 섞여 행복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난 이렇게 엉망진창인데, 너는 웃고 떠들고 있어?’
덜컥,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 수희의 머리채라도 붙잡고 싶었다.
그런데 이성을 잃어버리기 직전, 임 감독이 들어간 문을 열고 승조가 나왔다.
마치 하찮은 것을 보듯 건네 오는 승조의 시선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이화정 씨한테는 고마운 마음도 없잖아 있습니다.”
“…….”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신 건지, 하는 행동들이 다 제 예상 안의 것들이라서요.”
제 심기를 거스르는 말에 화정은 참지 못하고 승조의 멱살을 붙잡았다.
“너 임 감독한테 얼마를 먹인 거야. 뭘 해 준다고 했길래 저 자식이 너희 편을 들어!”
그의 옷깃을 붙잡은 두 손은 너무나 쉽게 승조의 손에 의해 떨어져 나갔다.
마치 더러운 것을 떼어 내듯, 구겨진 옷을 털어 내는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김시운 작가 딸이 수희라는 건 제가 미리 말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 언제.”
“얼마 안 됐습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미리 말해 놨는데, 역시 이화정 씨는 쉽게 포기하는 법을 모르네요.”
임 감독에게 따로 사람들 앞에서 수희를 대변해 달라고는 부탁하지 않았다.
그것까지 부탁할 정도로 수희의 캐스팅에 대해 의문을 가질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쌓아 온 커리어들은 김시운 작가가 만들어 준 게 아니었다.
잠시 잠깐 논란을 불러올 순 있겠지만, 수희를 끌어내릴 수 있는 수단은 될 수 없었다.
그걸 임 감독도 납득하기에 수희를 감싼 것이다.
“내가 전부 밝힐 거야.”
벌게진 얼굴로 화정이 씩씩 숨을 내쉬었다.
“김시운 작가 딸이 오수희고, 오수희랑 너랑 판 짜고 사람들 속인 거 다 말할 거라고!”
귀를 찌르는 고음이 쩌렁대게 울려 퍼졌다.
승조는 아무런 감흥 없는 얼굴로 읊조렸다.
“하시죠. 제가 드린 한 달이라는 유예 기간마저 빼앗기고 싶다면.”
승조가 화정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건 전부 문캐슬 게이트 때문이었다.
자신의 과거를 지울 수 없기에 화정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승조는 발길을 돌리며 화정에게 고요히 경고했다.
“가만히 계셔도 알아서 제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들어 드릴 겁니다. 그러니 뭔가를 하려고도 하지 마세요.”
얼굴에 닿는 승조의 차가운 시선은 화정의 온몸을 딱딱하게 굳어지게 만들었다.
승조가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화정은 주먹 쥔 손을 벌벌 떨어 댔다.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가 저들의 얼굴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화를 참지 못하고 회식 자리를 엉망으로 만들 게 분명했으니까.
화정은 멈춰 있는 발걸음을 떼어 내, 식당에서 네 블록 떨어져 있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세워진 차에 올라타 시동을 켜려다 술을 마셨다는 걸 깨닫고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해.”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행동을 보인다면 승조는 곧바로 문캐슬 게이트를 터트릴 것이다.
회식이 끝난 줄도 모르고 화정은 한참 동안 어두운 차 안에 앉아 있었다.
Rrrrr―
주머니 안에서 울리는 휴대폰 벨 소리에 절망에 잠겨 있던 화정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승만에게서 온 전화에 화정이 목을 가다듬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지금 어디야.]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어두운 목소리에 화정은 불길함을 직감했다.
“회식한다고 했잖아.”
[주형이가 간 이식 안 하겠대.]
희미하게 퍼지는 음성은 금방이라도 끊길 것처럼 힘이 없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화정은 휴대폰을 움켜잡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저번에는 누나가 아니면 자기가 이식하겠다는 말도 했다며.”
흔들리는 숨소리가 휴대폰 너머로까지 전해졌다.
[전부 다 알았어. 너와 내 관계. 다시는 자기 앞에 나타나지 말래.]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화정은 말을 더듬었다.
“수, 수희가 말 안 했다며.”
[알 게 뭐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주형이가 이식 안 하겠다잖아!]
감정이 격해진 걸 보니 술을 마신 것도 같았다.
와장창하고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승만의 고함이 이어서 전해졌다.
[너랑 놀아난 내가 바보였어! 이럴 줄 알았으면 애란이랑 애들이랑 같이 사는 거였는데.]
“스, 승만 씨. 지금…… 나랑 만난 걸 후회하는 거야?”
[그래. 땅을 치고 후회해! 네가 그때 애란이를 만나서 협박만 안 했어도 돌아갈 수 있었어!]
“그건 당신도 잘했다고 했잖아.”
[그땐 내가 너한테 미쳐 있었을 때니까. 하지만 시간만 되돌릴 수 있다면 다시는 널 만나지 않을 거야. 알아?]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화정은 악담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다.
[내가 죽는다면 다 네 탓이야. 네가 날 죽인 거야.]
“승, 승만 씨. 내가 갈게. 가서 이야기해. 응?”
이야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승만이 먼저 전화를 끊어 버리고 말았다.
다시 전화를 걸어 봤지만, 승만은 받지 않았다.
마음이 급했던 화정은 차에 시동을 켜고 무작정 액셀을 밟아 댔다.
주차장을 나온 차가 무자비하게 도로로 들어섰다. 뒤에서 차들이 클랙슨을 울려 댔지만, 화정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점점 더 강하게 액셀을 짓밟는데, 식당 앞에 서 있는 수희가 보였다.
두 눈에 눈물이 한가득 차올랐다.
핸들을 붙잡은 손은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변해 버렸다.
입술을 잘근잘근 짓눌러 깨물던 화정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주룩 흘러내렸다.
“다 오수희, 너 때문이야.”
애란이 애만 배지 않았어도 승만과 결혼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승만과 이미 결혼해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게다가 덮어 뒀던 문캐슬 게이트도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너만 없었더라면. 너만 없었더라면…….”
오수희, 오수희, 오수희!
모두 다 네가 망쳐 놨다. 내 계획을, 내 가족을, 내 인생을.
액셀에 올려진 발은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었음에도 브레이크로 옮겨 가지 않았다.
오히려 거친 엔진 소리를 내며 화정의 차가 점차 속도를 높였다.
빠른 속도로 도로를 내달리는 차에 수희의 고개가 절로 화정의 차 쪽으로 돌아갔다.
차의 환한 전조등의 수희의 몸을 덮쳤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전속력으로 속도를 낸 화정이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끼기이이익.
콰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