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나랑 한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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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나랑 한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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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나랑 한 약속
2022.11.12.
한 시간 전.
화정과 대화를 끝낸 임 감독이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승조가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잠깐 나갔다 올게.”
수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승조가 자리를 벗어나 식당을 나갔다.
승조가 나간 문을 빤히 바라보는데, 수희의 시야 밑으로 맥주병이 깔렸다.
“누나, 한잔 마실래요?”
고개를 돌리자 맥주병을 들고 있는 준영이 보였다.
수희가 빈 잔을 들어 올리자 준영이 맥주를 따라 주었다.
잔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들어 올린 수희가 조심스레 물음을 건넸다.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
맥주병의 끝을 잔에서 떼어 낸 준영이 질문의 의도를 알기 어려워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어떤 거요?”
수희가 제 입으로 말하기 어려워하자, 준영이 “아.” 하며 입술을 떨어트렸다.
잠시 머뭇거리나 싶더니 준영이 입술 끝을 부드럽게 말아 올렸다.
“저한테는 크게 상관이 없거든요. 누나가 김시운 작가님의 딸이든, 아니든.”
“…….”
“누나가 오수희라는 점은 바뀌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말해 주니까 조금 감동이다.”
촬영하는 동안에도 늘 수희를 배려하던 준영이었다.
일정이라면 수희 못지않게 바쁠 텐데, 촬영은 늘 수희의 스케줄에 맞춰 주었다.
촬영이 끝나 갈 때쯤에는 대본이 수정된 부분이 있을 때마다 늘 먼저 알려 주었다.
준영이 아니었다면 이번 촬영을 끝내기까지 많은 고비를 겪었을지도 모른다.
“누나 연기 본 사람이면 다 알 거예요.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자리 아닌 거.”
“정말 그럴까?”
걱정이 아예 안 될 수는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사람들의 입에서 없는 말까지 꾸며져 나오는 건 시간문제였으니까.
그걸 이미 직접 겪어 보기까지 한 터라,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수희에게 힘을 실어 주듯 준영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누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럴 거예요.”
이슬이 흘러내리는 맥주잔을 만지작거리며 수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가끔은…… 세상에는 날 사랑하는 사람보다는 날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아서. 그래서 조금 겁이 나.”
“그 사람들이 누나 인생에서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입에 발린 말 같은 게 아니었다.
진심이었고, 준영이 그랬다.
이 말이 수희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된다면 몇 번이고 말할 수 있었다.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 줘요. 달려갈 테니까.”
혹시나 수희가 전에 했던 말을 잊었을까, 준영이 다시 한번 강조해 말했다.
준영이 해 준 말 덕분인지 수희는 굳어 있던 얼굴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없이 차준영 씨랑 너무 대화가 길어.”
어느새 수희의 앞에 앉은 승조가 준영을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남자는 남자가 아는 법. 준영의 저 두 눈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승조는 잘 알고 있었다.
보호 본능. 그걸 덧씌운 눈으로 수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대화한 지 10분도 안 됐어요.”
준영은 두 손을 가볍게 펼쳐 보였다.
“길어요, 10분도.”
파바밧.
어디서 많이 봤다 싶은 불꽃이 어김없이 터졌다.
“준영 씨, 이 테이블로 와요!”
다행스럽게도 임 감독이 준영을 부르는 바람에 주고받던 뜨거운 시선이 툭 끊겼다.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술잔을 들어 올리고 있었고, 자연스레 수희와 승조의 근처에는 빈자리들이 남게 되었다.
승조는 임 감독과 함께 있는 준영에게 멈춰 있던 눈길을 수희에게로 옮겼다.
“오늘처럼 차준영 씨가 부러운 적은 처음이야.”
“준영이를요? 왜요?”
큰 눈을 깜박이고 있는 수희를 보고 승조가 답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네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서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까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어. 정확히 말하자면, 싫었지. 그 손을 가져오고 싶을 만큼.”
수희와 함께 있으면 늘 유치해지는 기분이었다.
상황을 알고 있는데도 자신의 마음은 너그럽지 않았다.
아름답고 예쁜 너를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게 꼭꼭 숨겨 놓고 싶다가도.
보석함 속에서만 빛날 네가 너무나 아까워 세상에 꺼내 놓고 싶기도 했다.
“오늘 너무 예뻤어. 그래서 더 질투가 났어.”
솔직한 승조의 고백에 수희는 내심 뿌듯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손을 뻗은 수희가 테이블 위에 있는 승조의 손을 붙잡았다.
“다음에는 오빠 손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갈 건데 질투하지 마요.”
“당연하지. 네가 나 말고 누구랑 결혼해.”
절대 못 놔주지. 내가 널 어떻게 잡았는데.
승조가 피식 웃어 보이자, 수희가 진지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한테는 오빠밖에 없죠. 암.”
당연한 말인데도 수희의 말에 승조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버진 로드를 걷던 수희의 모습이 영상처럼 펼쳐지는 것 같았다.
수희의 고운 손을 잡은 게 준영이 아니라 자신이기를 바랄 만큼 그녀는 그 누구보다 빛났다.
아름다웠다는 말 하나로는 표현하지 못할 만큼 예뻤다.
“네가 웨딩드레스 입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정말 결혼하고 싶더라.”
“…….”
“네가 내 손을 잡고 버진 로드를 걸으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분명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로 남을 거야.”
진지한 그의 목소리에 수희는 괜스레 부끄러워져 장난스럽게 말했다.
“지금 결혼하자고 프러포즈하는 거예요?”
“설마. 프러포즈를 여기서 할 수는 없지.”
프러포즈는 제대로 해 줄 생각이었다.
네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큰 사랑을 받는 존재인지 깨달을 만큼.
승조는 이미 잔뜩 술기운이 달아오른 사람들을 둘러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오전에 촬영도 있다고 했으니 미리 수희를 데리고 나갈 생각이었다.
“식당 앞으로 차 가져올게. 여기 있어.”
“저 그럼 임 감독님한테 인사드리고 나갈게요.”
“그래. 천천히 나와.”
식당을 나온 승조는 근처에 있는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이젠 불어오는 바람이 손끝까지 얼릴 만큼 제법 매서워졌다.
주차장으로 들어선 승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히터를 틀어 차 온도를 올렸다.
안전띠를 하고 페달 위에 발을 올리는데, 옆에 세워진 차 쪽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제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옆에 세워진 차는 화정의 것이었다.
마치 급발진하듯 화정의 차가 브레이크 한 번 밟지 않고 도로로 파고들었다.
운전을 위해 술을 마시지 않은 승조와 달리, 화정은 병을 모아 둘 정도로 술을 잔뜩 마셨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승조는 차를 출발시켜 화정의 차를 뒤쫓아 갔다.
점차 벌어지는 거리를 좁히기 위해 승조가 페달 위에 올린 발에 힘을 실었다.
때마침 바로 앞에서 정지 신호가 떴다. 화정이 이대로 차를 세운다면 운전석에서 화정을 끌고 나올 생각이었다.
술에 취한 화정이 걱정돼서가 아니라, 화정으로 인한 다른 피해를 막기 위해서였다.
승조가 붉게 빛나는 신호에 브레이크를 밟으려는데, 앞서가고 있던 화정의 차가 오히려 속력을 냈다.
두 차와의 간격이 늘어나게 되고, 화정의 차 보닛이 옆 차선을 넘어갔다.
승조의 시선이 자연스레 옆으로 옮겨 가고, 식당 앞에 서 있는 수희가 보였다.
브레이크를 밟지 않는 화정의 차가 직선으로 그인 차선을 지르밟았다.
머리로 판단을 하고 결론을 내릴 겨를도 없었다.
화정이 부러 수희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자마자 화정의 차를 따라 핸들을 꺾었다.
있는 힘껏 액셀을 밟자 가열된 엔진의 소음이 차 안을 가득 메웠다.
빨라지는 속도에 승조의 차 앞머리가 화정의 뒤에 바짝 붙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화정의 차가 인도를 넘어서는 일은 없도록 해야 했다.
제 눈앞에서 수희를 잃는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됐다.
아슬아슬하게 화정의 차 뒤에 붙었는데도 승조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
화정의 차가 인도의 낮은 턱을 밟기 직전이었다.
끼기이이익.
승조가 뒤늦게 브레이크를 밟자, 화정의 차 뒤 범퍼에 승조의 차머리가 박혔다.
콰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화정의 차가 정지선에서 한참 밀려 나갔고, 승조의 차는 장애물로 인해 반 바퀴를 빙글 돈 후에야 멈춰 섰다.
자신을 덮쳐 온 환한 불빛에 눈을 감았다 뜬 수희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도로 한복판에 멈춰 선 두 차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검은색 세단 앞에 박혀 있는 찌그러진 번호판을 보고 수희는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다리에 힘을 잃고 비틀거리던 수희는 마비돼 버린 도로 위로 뛰어들었다.
“오빠! 오빠!”
앞 범퍼가 완전히 망가져 버린 승조의 차로 달려간 수희가 운전석으로 갔다.
금이 간 유리창 너머로 핸들에 머리를 댄 채 엎드려 있는 승조가 보였다.
보닛이 들린 앞 범퍼에서는 검은 연기가 더욱 거세게 피어올랐다.
운전석에서 승조를 데리고 나오기 위해 차량의 문을 힘주어 당겼다.
그러나 손잡이가 덜컥거리기만 할 뿐, 안쪽에서 문이 잠긴 탓에 열리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수희가 창문을 두 손으로 두드리며 승조를 목 놓아 불렀다.
“오빠, 일어나 봐! 오빠! 한승조!”
덜컥, 덜컥.
손잡이를 잡아당기는 힘에 수희의 몸이 앞뒤로 흔들렸다.
눈에 맺혀 있던 눈물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입술 밖으로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빠, 제발 일어나야 해. 일어나! 일어나! 오빠!”
승조는 완전히 정신을 잃은 건지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굉음에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나와 사고가 난 차량들을 보며 웅성거렸다.
식당 밖으로 나온 준영은 도로의 중심에 서 있는 수희를 발견했다.
사고가 난 자리를 피해 차들이 느릿한 속도로 달리고 있는 도로로 준영이 발을 들였다.
수희의 옆으로 달려간 준영은 운전석에서 쓰러져 있는 승조를 확인했다.
“누나, 잠깐만 뒤로 가 있어.”
운전석 문고리를 잡은 준영이 수희가 했던 것처럼 밖으로 잡아당겨 보았다.
이번에도 수희와 같은 결과를 낳았으나, 준영은 포기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준영은 다른 물건을 찾을 틈도 없이 금이 간 창문을 주먹으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둔탁한 소리 사이로 유리가 갈라지는 파열음이 파고들었다.
쩍, 하고 유리가 갈라지고 강한 힘 한 번에 유리가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준영은 창문 너머로 팔을 넣어 문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찌그러진 문을 열자 수희가 지체 없이 승조의 몸에 둘린 안전띠를 풀었다.
“오빠. 정신 차려 봐.”
승조의 상체를 세운 수희는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투둑, 승조의 와이셔츠 위로 새빨간 피가 떨어져 내렸다.
창문에 부딪히며 찢어진 이마에서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목울대가 덜덜 떨리며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일전에 느꼈던 불안감이 다시금 수희를 삼켰다.
그가, 죽을 수도 있다.
수희는 허리를 숙여 운전석에 있는 승조를 끌어안았다.
무릎을 꿇자 좌석 아래로 몸이 내려온 승조가 수희의 품에 안겼다.
아스팔트 바닥에 앉은 채로 힘없이 축 늘어진 승조를 한 아름 끌어안았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처럼 수희의 눈에서 눈물이 쉼 없이 쏟아져 내렸다.
“나랑 약속했잖아.”
“…….”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나 안 떠날 거라고 그랬잖아!”
그의 옷깃을 붙잡아 당기며 처절하게 소리쳤다.
수희의 외침은 대답을 듣지 못하고 너무나 외로이 울려 퍼지기만 했다.
“나 혼자 두지 마. 나한테 이제 남은 건 오빠밖에 없어.”
내 편, 내 사람, 내 사랑.
소중하게 아껴 두느라 못 한 말도 있는데, 이렇게 떠나게 놔둘 수 없었다.
“119, 119 좀 불러 줘, 준영아. 빨리 와 달라고 해 줘. 응?”
발을 동동 구르듯 승조를 안은 수희의 몸이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준영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울고 있는 수희를 보고 안타까움에 목이 멨다.
“오빠, 금방 구급차 올 거야. 그때까지만 참자. 그때까지만 버티자.”
어깨가 그의 피로 축축이 젖어 드는 게 느껴졌다.
목덜미에 닿는 그의 숨소리가 점점 미약해지는 게 이내 사그라질 것만 같았다.
수희가 승조에게 고개를 틀자, 버겁게 안고 있던 그의 몸에서 완전히 힘이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