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마저 벗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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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마저 벗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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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마저 벗겨야지
2022.11.15.
“오빠, 금방 구급차 올 거야. 그때까지만 참자. 그때까지만 버티자.”
의식을 잃은 채 자신의 품에 누워 있는 승조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참아 보려 했는데도 어린아이처럼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소리 내 울고 있는데 뺨에 따스한 손길 하나가 닿았다.
눈동자에 가득 담겨 있던 눈물이 아래로 떨어지자, 맑아진 시야 안으로 승조의 얼굴이 담겼다.
“오빠.”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승조가 수희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가 의식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수희는 온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미간을 찌푸린 승조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수희의 눈매를 닦아 주었다.
“왜 울고 있어.”
승조는 자신이 다친 것도 모르는 건지 수희를 걱정하고 있었다.
“오빠 다쳤어. 많이.”
차가 충돌하고 난 직후 순간적으로 전부 잊어버렸던 승조의 기억이 뒤늦게 돌아왔다.
그제야 온몸이 뻐근하고 머리가 욱신거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울고 있는 수희를 보니 승조는 아픈 티도 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픈 것보다 우는 수희를 보는 게 더 힘들어서였다.
“괜찮아, 나는.”
“뭐가 괜찮아, 바보야. 이렇게 많이 다쳤는데.”
성치 않은 그의 몸을 보자 속상함에 수희의 입에선 나무라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왜 그때도 지금도 나밖에 몰라. 자기 몸은 하나도 안 소중해?”
“지금은 그래. 내 몸보다 네가 더 소중해.”
당연하단 듯이 나오는 말에 수희는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불길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도, 사고를 막으려 차를 박은 것도, 전부 수희가 자신보다 소중했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다.
자신이 아프더라도 그때도, 지금도 수희가 살았으니 잘된 일이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구급차 사이렌 소리에 수희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줄줄이 서 있는 차들 사이로 빠져나온 구급차 한 대가 승조의 앞에 세워졌다.
구급차의 뒷문이 열리고 구급대원들이 내려 승조의 상태를 신속하게 확인했다.
구급대원들의 손에 의해 들것에 눕혀진 승조가 구급차로 옮겨졌다.
수희는 승조를 따라 구급차에 올라탔고, 뒷문이 닫힌 구급차가 빠르게 도로를 벗어났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화정은 욱신거리는 코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코를 부여잡자 질척거리는 피가 손바닥에 묻어났다.
눈을 찡그리며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자신의 차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식당 앞에 서 있는 수희를 보고 이성을 잃어 액셀을 세게 밟고 말았다.
그다음엔 어떻게 됐더라…….
“설마, 나 오수희를 정말 친 거야?”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신 터라 화정은 사리 분별이 어려웠다.
창문 너머를 바라봤지만, 사람들에게 가려서인지 수희가 보이지 않았다.
승조의 차가 뒤에서 박은 줄도 모르고 화정은 수희를 친 거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어떡해. 나 어떡해.”
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수희를 향해 차를 몰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부터 술을 마시는 게 아니었다. 술 때문에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해 벌인 일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벌인 화정은 패닉 상태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괜찮아요? 얼른 밖으로 나오세요!”
“차에서 연기 나요.”
망가진 차를 보며 사람들이 창문을 두들겨 댔다.
멀리서 들려오던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화정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화정은 안전띠를 벌벌 떨리는 손으로 풀었다.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문캐슬 게이트부터 살인까지. 배우 이화정의 인생뿐만이 아니라, 사람 박해숙의 인생까지 송두리째 날아가기 직전이었다.
운전석 문을 연 화정은 사람들을 밀치고 앞을 향해 내달렸다.
도로를 뛰어다니는 화정을 보고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손가락질했다.
“배우 이화정 아니야?”
“왜 도망가는 거야?”
“잡아야 하는 거 아니야?”
화정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 중 몇몇은 휴대폰을 들어 촬영까지 했다.
반쯤 정신을 놓은 화정은 도로를 뛰어다니다가 클랙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직진 신호를 받은 흰 경차가 갑자기 튀어나온 화정을 보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두 발이 굳어 버린 화정은 움직이지 못한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차를 바라만 봤다.
쾅.
결국 멈추지 못한 차가 화정의 몸을 들이받았다.
화정의 다리가 지면에서 떨어지더니 공중으로 몸이 붕 떠올랐다.
바닥 위로 털썩 떨어진 화정의 몸이 두세 바퀴를 빙글 돌았다.
차에 치였는데도 불구하고 화정은 도피를 위해 그나마 멀쩡한 팔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엉망이 된 무릎으로 바닥을 밀고 일어서려는데, 화정의 시야 끝에 검은 구두가 걸렸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경찰 두 명이 화정의 앞에 서 있었다.
“괜찮습니까? 도와드리겠습니다.”
경찰이 화정의 두 팔을 부여잡자, 화정이 발악을 하며 몸을 비틀었다.
“놔! 놓으라고! 놔!”
발버둥을 치려 했지만 차에 치이면서 다리가 다친 건지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윽고 구급차 한 대가 화정의 앞에 세워졌고, 경찰은 친절히 화정을 구급차 안에 태웠다.
“나 안 다쳤어! 하나도 안 아프다고!”
뒷문이 쾅 하고 닫히자 소음이 차단되면서 구급차 유리로 화정의 입 모양만 보였다.
졸지에 구급차 안에 갇히게 된 화정은 원치 않게 병원으로 향하게 되었다.
***
승조를 태운 구급차가 출발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환자 감시 장치를 보고 있던 구급대원이 운전석에 있는 동료에게 말했다.
“맥박, 혈압 떨어지고 있습니다. 좀 더 빨리 가 주세요.”
구급대원이 산소 호흡기를 꺼내 승조에게 씌워 주었다.
수희는 점차 제 손안에서 온기를 잃어 가는 그의 손을 꽉 붙들고 있었다.
불안을 숨길 수 없었던 건지 수희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한참 눈을 감고 있던 승조가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나 괜찮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갈라진 그의 음성에 수희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당신은 왜 항상 괜찮다고만 해. 하나도 안 괜찮으면서. 아프면서.”
“나 지금 혼나는 건가.”
한 꺼풀 기세가 꺾인 수희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는 오빠가 걱정돼서 그런 거지, 화낸 건 아니에요.”
그의 손등을 쓸어내린 수희가 후한 결심 하나를 했다.
“오빠가 잘 버티기만 하면 내가 소원 들어줄게요.”
“소원?”
“지금 말하지 마요. 병원 가면, 그때 이야기해요.”
호흡이 불안정한 그가 다시 정신을 잃을까 싶어 수희가 그의 말을 막았다.
승조는 수희를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오빠?”
아주 멀리서 들려오듯 수희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
“MRI 촬영 결과 다행히 뇌에는 큰 이상이 없습니다. X-ray도 다른 곳 이상 없이 깨끗하고요.”
의사의 말에 수희는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연거푸 허리를 푹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나 몸에 다른 통증이 있다면 입원해서 상태를 지켜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네, 감사합니다.”
커튼을 걷고 의사가 나갔는데도, 수희는 숙인 허리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
무릎을 두 손으로 붙잡은 수희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정말 다행이다.”
“내가 약속했잖아.”
뒤에서 들려오는 승조의 목소리에 수희가 벌떡 허리를 세웠다.
찢어진 살갗을 꿰맨 승조의 이마에는 하얀 거즈가 붙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 곁은 안 떠날 거라고.”
“내가 진짜 얼마나,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
“머리에서는 피가 철철 나고, 눈도 못 뜨고 있는데…… 진짜 잘못되는 줄 알았다고요.”
병원에 도착하기 직전에 수희의 부름을 듣지 못할 만큼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날 며칠 화정의 일과 업무에 치여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배정받은 응급실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수희가 얼른 허리를 손으로 받쳐 주었다.
“어디 가려고요?”
“집에 가 봐야지.”
승조가 침대 위에 올려진 재킷을 가져오려는데 수희가 말렸다.
“작은 사고도 아니었는데, 입원하고 상태 지켜보는 게 낫지 않아요?”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괜찮아.”
“그래도.”
“정 걱정되면 오늘 같이 있고.”
눈썹 사이를 좁힌 수희가 진지해진 얼굴로 물었다.
“목적은 그거죠?”
승조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수희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들켰네.”
붙었다 떨어지는 입술에 수희가 침대 외곽에 쳐져 있는 커튼을 바라봤다.
당황하는 수희의 모습에 승조가 다시 입을 맞추려 하자, 수희가 손바닥으로 승조의 입을 얼른 막았다.
“오빠, 여기 병원이에요.”
“그래. 나머지는 집에 가서 해.”
멀쩡하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나 보다.
능글맞은 그의 모습이 평소와 다름없다는 걸 느꼈다.
그가 이만하길 다행이라 여기며 수희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소중하게 그를 껴안은 수희가 승조에게 부탁했다.
“다시는 나 때문에 다치지 마요.”
“걱정할 거 없어. 이런 일, 이제 일어나지 않을 거니까.”
악몽도 깨어나면 끝나는 것처럼, 수희의 불행도 곧 행복으로 바뀔 차례였다.
***
집으로 들어선 승조는 입고 있던 겉옷과 재킷을 바닥에 벗어 두었다.
승조가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고 팔을 빼내는데, 신음이 나올 만큼 찌릿한 통증이 전해졌다.
소파에 핸드백을 올려 두던 수희는 깜짝 놀라 승조의 팔을 붙잡았다.
“어디 아픈 거죠?”
“어깨가 좀 아프네.”
사고가 나면서 문과 어깨가 부딪치는 바람에 근육이 다친 건지, 만지면 욱신거렸다.
뼈에는 이상 없으니 X-ray에 나오지 않은 듯했다.
수희는 승조의 와이셔츠를 조심스레 벗겨 주며 꼼꼼하게 챙겨 주었다.
“잠옷 필요하죠? 두꺼운 걸로 가져다줄까요?”
수희가 잠옷을 가지러 침실로 발걸음을 떼어 내자, 승조가 수희의 손목을 붙잡으며 제 앞으로 다시 데려왔다.
“일단 좀 씻고 싶은데.”
“그럼 목욕물 받아 줄까요?”
뭐든 다 해 줄 것처럼 구니, 응석이라도 부리고 싶었다.
“일단, 마저 벗겨 줘야지.”
승조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자 수희도 따라 고개를 숙였다.
검은색 바지에 눈길이 닿자, 수희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바지를?”
“벗겨 줘야지.”
벗겨 줘야…… 씻긴 하는데.
잠잠했던 수희의 두 눈동자에 소용돌이가 찾아왔다.
눈을 확 뜬 수희가 승조의 가슴을 두 손으로 밀어내며 욕실 쪽으로 몸을 획 돌렸다.
“이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잖아요!”
“못 하겠는데, 팔이 아파서.”
아프다는 말에 잠시 흔들렸던 수희가 고개를 격하게 저어 냈다.
“몰라요. 그건 내가 못 해 줘요.”
수희는 마치 도망치듯 욕실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욕실 문이 닫히는가 싶더니 밖으로 수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지 입술을 꼼지락대기 바빴다.
“음, 그러니까…….”
나오려는 말을 입 안에서 한참 굴리던 수희는 새빨개진 얼굴로 승조에게 손짓했다.
자신을 부르는 손에 이끌려 승조가 수희에게로 다가갔다.
누가 듣고 있는 것도 아닌데 수희가 승조의 팔을 살짝 끌어당겼다.
“좀 더 가까이.”
승조가 수희에게 고개를 기울이자, 수희가 발끝을 들어 올렸다.
승조의 귓가에 달곰한 바람이 윙윙거리듯 수희의 목소리가 귓바퀴를 간지럽히며 흩어졌다.
“씻는 건 내가…… 도와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