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불순한 목적
(84/118)
84. 불순한 목적
(84/118)
84. 불순한 목적
2022.11.19.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물질을 이기지 못하고 욕조 밖으로 물이 찰랑대며 빠져나왔다.
바닥을 적시는 물소리에, 먼저 욕조 안에 들어와 있던 수희가 세운 무릎에 턱을 괬다.
밝은 곳에서 제 몸을 보이는 건 처음이기에 일부러 거품까지 욕조에 가득 냈다.
승조가 자신의 뒤에 앉는 게 느껴졌지만 수희는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승조는 빨개진 수희의 귀를 바라보다 아래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평소에는 길게 늘어트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올린 탓에 수희의 새하얀 목덜미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푼 머리도 좋지만 가는 목선을 보니 이건 또 이거대로 보기 좋았다.
승조가 수희의 하얀 목을 손가락으로 짚어 내려가자 수희의 동그란 어깨가 움찔했다.
뒤를 돌아볼 만하건만 수희는 꿋꿋이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수희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던 승조가 입술을 뗐다.
“아야.”
“어디 아파요?”
화들짝 놀란 수희가 얼른 상체를 틀어 승조를 바라봤다.
욕조에 편히 기대고 있는 승조는 너무나 멀쩡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이제 봐 주네.”
그제야 그가 장난을 쳤다는 걸 알고 수희가 투덜거렸다.
“깜짝 놀랐잖아요. 그런 걸로 장난치지 마요.”
수희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려 하자, 승조가 턱 끝을 붙잡고 입술을 겹쳤다.
촉촉하게 맞닿는 입술에 수희가 파르르 속눈썹을 떨며 그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았다.
뜨거운 열기에 빨갛게 생기가 도는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씻는 거 도와준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러긴 했는데…….
막상 욕실에 들어오니 부끄러워져 승조를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다.
꽤 오랫동안 승조에게 매끈한 등을 보인 채 물속에서 소심하게 손가락만 꼼지락댔다.
잠시 고민하던 수희는 천천히 몸을 돌려 승조와 마주 보고 앉았다.
오랫동안 시선을 유지할 수 없어 하얀 거품 위로 고개가 떨어졌다.
“일단은 내가 한 말이니까 지켜야……겠죠?”
손으로 거품 덩어리를 한가득 모으고는 승조의 가슴 위를 살살 문질렀다.
미끈거리는 촉감에 수희의 손이 승조의 복근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수희의 자잘한 움직임에 욕조 안에 담긴 물이 찰박거리며 소리를 냈다.
꽤 열심히 살결을 문지르며 내려가는데, 머리 위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하나가 느껴졌다.
“내 얼굴 너무 빤히 보지 말아요.”
“빤히 볼 수밖에 없는데. 네가 날 안 봐 주니까.”
거품에 박혀 있던 시선을 끌어 올리자 승조가 스르르 입술을 들어 올렸다.
지그시 승조를 바라보던 수희는 갑자기 장난기가 솟구쳤다.
거품이 묻은 손으로 승조의 코를 톡 하고 건들자, 하얀 거품 방울이 그의 코끝에 맺혔다.
“풉.”
하얀 코를 매단 그가 귀여워 웃음을 터트리자, 승조의 두 손이 수희의 겨드랑이 사이로 불쑥 들어왔다.
유난히 간지럼에 약한 수희가 발버둥을 치며 벗어나려 했다.
“하하. 그만, 그만해요!”
맨살을 간질이는 그의 손이 미끈거려서인지 야릇한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승조는 욕조에서 달아나려는 수희의 허리를 꽉 끌어안아 붙잡았다.
물의 표면이 크게 한 번 휘청거리더니 많은 양의 물이 밖으로 튀어 나갔다.
수희의 등에 가슴을 바짝 붙인 승조가 그녀의 목덜미를 베어 물었다.
고운 살결에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욕실 안에서 웅웅거리며 울려 퍼졌다.
자잘하게 웃음을 풀어놓던 수희는 물속에서 꼼지락거리는 나쁜 손을 붙잡았다.
“어쩐지 욕실에 들어온 목적과는 좀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지 않아요?”
작게 흐트러진 그의 웃음소리가 유쾌했다.
“순수한 네 목적이랑은 다르게 내 목적은 좀 불순해서.”
승조의 손이 수희의 손아귀에서 미끄러지며 빠져나갔다.
물속에 들어온 승조의 손이 자유로이 움직이자, 절로 수희의 상체가 앞으로 숙어졌다.
두 볼이 달아오르는 건 뜨거운 온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목적 달성을 위해 제 몸을 지분대며 만져 대는 승조의 손 때문일 것이다.
“아!”
점차 깊숙이 파고드는 손끝에 수희가 어깨를 안으로 잔뜩 말았다.
겹쳐진 몸 사이로 거품들이 바스러지며 짓눌렸다.
찰랑대는 물살이 강해질수록 욕조 밖으로 나와 있는 수희의 몸은 점점 더 발갛게 익어 갔다.
“하.”
길게 숨을 내쉰 수희가 승조에게 고개를 돌리자 그의 입술이 겹쳐졌다.
이슬이 맺혀 있던 수희의 눈꺼풀이 닫히고, 귓가에 잘박거리는 물소리가 점차 강렬해졌다.
욕실에서 머무는 시간이 점차 길어지고, 흰 수증기가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
수희는 오랫동안 물에 몸을 담가서인지 침대에 눕자마자 노곤하게 잠이 쏟아졌다.
협탁 위에 있는 스탠드 조명이 침실 내부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승조와 마주 보고 누워 있던 수희는 잠시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아, 그러고 보니 사고는 어떻게 처리된 거예요?”
욕실에서 사고의 정황에 대해서는 들은 터였다.
화정이 자신을 치려고 했지만, 어쨌거나 사고를 낸 사람은 승조였다.
경찰 조사를 받지 않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으니, 뺑소니로 처벌받지 않을까 걱정이 된 것이다.
“걱정할 거 없어. 지금쯤 차 비서가 회사 고문 변호사랑 경찰서로 갔을 거야.”
“그럼 다행이네요.”
“대신, 이번 일로 드라마까지 영향이 갈지도 몰라.”
승조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블랙박스까지 있으니, 화정은 구속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화정이 출연한 드라마에 불똥이 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지만 수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수희가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내가 고집부렸던 것 같아요.”
승조의 품 안에 깊게 얼굴을 묻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문캐슬 게이트를 하루빨리 수사해 달라고 했을 텐데.”
괜히 드라마가 끝나는 날에 맞춰 게이트를 터트리려고 했던 자신의 탓 같았다.
팔을 들어 올린 수희가 다친 승조의 이마를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그랬더라면 오빠도 이렇게 안 다쳤을 텐데.”
“다른 사람한테 피해 주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잖아.”
드라마에는 많은 사람의 손길이 들어간다. 감독, PD, 배우, 스태프들까지.
화정의 문캐슬 게이트가 터지게 된다면, 가장 먼저 드라마에 타격이 올 게 분명했다.
그러나 더는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 제 사람만은 지켜야겠다 싶었다.
수희가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승조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결심한 듯 얼굴을 굳힌 수희가 승조를 향해 말했다.
“문캐슬 게이트, 이번 일이랑 같이 터트리는 걸로 해요.”
“괜찮겠어?”
“드라마 주인공은 나잖아요. 내가 힘 좀 써야죠.”
두 주먹을 불끈 쥔 수희가 단단한 목소리를 냈다.
흘러가는 것을 막아 두는 것은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더는 화정의 처분을 미룰 수 없었다.
그로 인해 벌어질 여파는 자신이 어떻게든 수습할 생각이었다.
“계획이 있는 거야?”
승조의 물음에 수희가 곰곰이 고민하다가 소리 없이 빙긋 웃었다.
“이제부터 만들어 보려고요.”
***
승조의 실행력은 실로 대단했다.
다음 날, 시곗바늘이 숫자 ‘12’를 넘어가기도 전이었다.
매니저가 사 올 초밥을 기다리며 거울로 다친 코를 바라보던 화정이 짜증을 부렸다.
“코가 이게 뭐야, 정말.”
코에 실금이 가 띵띵 부풀어 올라 코로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차에 치여 바닥을 굴렀는데도 불구하고 몸에는 타박상만 입은 상태였다.
컨디션도 나쁘지 않으니 의사는 원하면 언제든 퇴원시켜 주겠다고 했다.
손거울로 얼굴을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병실에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박해숙 씨?”
건장한 체격의 남성 두 명을 보자마자 화정은 제 발 저리듯 몸을 움찔 떨었다.
“왜, 왜요?”
그들이 경찰 공무원증을 내밀자 화정은 불길함을 느꼈다.
경찰 하나가 번쩍이는 은색 수갑을 뒷주머니에서 꺼내더니 화정의 손목에 채웠다.
“당신을 살인 미수 및 성매매 알선 혐의로 체포합니다.”
뒤이어 경찰이 미란다 원칙에 대해 읊어 댔지만, 화정의 귀에는 단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화정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드라마 때문에 승조가 당장에 자신을 고소하진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승조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걸 너무나 늦게 알아차렸다.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가 눈앞에 훤히 그려지자 화정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 이화정이에요. 나 몰라요? 내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짓을 해!”
이제 와 격하게 부인해 보지만, 경찰은 마저 화정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서에 가서 들어 볼게요.”
조금의 흥미도 없는 경찰의 무뚝뚝한 반응에 화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는 사람을 어떻게 데려가겠다는 거야. 나 못 가! 못 간다고!”
하루라도 시간을 벌어 미국이든, 중국이든, 필리핀이든, 어디로든 도망쳐야 했다.
지금까지 벌어 둔 돈이 많으니 어렵지 않게 한국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정의 생각만큼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의사한테 상태 전달받았습니다. 충분히 구속 수사 진행할 수 있다고요.”
“내가 아프다니까? 구속은 무슨!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라고.”
“구치소 병동에서도 충분히 치료 가능하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경찰들은 화정의 양쪽 팔을 각각 붙잡은 채 병실 밖으로 끌고 나갔다.
뒤로 몸을 눕힌 화정은 끌려가지 않으려 악을 쓰고 버텼다.
“놔! 이거 놓으라고! 지금 이거 성추행이야!”
경찰들이 들은 척도 하지 않자 화정은 양다리를 공중에서 내저었다.
“나 너희들 다 고소할 거야. 성추행으로 고소할 거라고!”
화정의 목소리에 인근 병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나와 수군거려 댔다.
눈에 보이는 것 없이 난리를 치던 화정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수그렸다.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화정이 경찰들 손에 이끌려 병원을 빠져나갔다.
***
구속 영장이 발부된 화정은 꼼짝없이 서울 구치소로 호송됐다.
곧바로 화정은 잘나간다는 변호사 세 명을 붙였다.
큰돈을 부를 땐 덥석 물더니 여론 반응이 좋지 않자 한 명이 떨어져 나갔다.
“심신 미약으로 가면 그나마 승산이 있을 것 같아요.”
“맞습니다. 최대한 감형을 받을 수 있게 노력하는 게 방법입니다.”
변호사들을 접견하고 있던 화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감형이라니! 나는 여기서 나갈 거라니까?”
또다시 시작된 화정의 히스테리에 변호사들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화정은 손가락으로 변호사들을 찌를 듯 가리켰다.
“당신들한테 쏟은 돈이 얼만데 날 여기서 못 빼내? 내가 썩어 빠진 감방에서 과자 사 먹으려고 그 돈 번 줄 알아? 어?”
한 귀로 듣고 흘리던 변호사들은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고 탄식했다.
화정에게 붙잡힌 지 벌써 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한참 동안 잔소리를 쏟아 내던 화정은 기운 없이 의자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무조건 나 여기서 빼내.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힘없이 대꾸하는 변호사들에게 화정이 물었다.
“승만 씨한테는 연락 따로 없었어?”
“아, 방금 구치소로 오기 전에 오승만 씨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반가움과 그리움이 공존하는 화정의 눈가에는 눈물이 금세 그렁그렁 맺혔다.
“뭐라고 해? 몸은 괜찮대? 나 언제 만나러 올 수 있대?”
변호사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마른 입술을 천천히 떼어 냈다.
“이화정 씨 보지 않겠다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뭐? ……그리고?”
“그리고 전화를 끊으셨습니다.”
구치소로 들어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승만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구구절절 자신의 사연을 종이에 적어 보냈는데도 그에게 답이 오지 않았다.
자신이 어디에 수감돼 있는지 알면서도 승만은 면회 한 번 오지 않았다.
수감된 지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화정은 깨달았다.
자신이 승만에게 버림받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