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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당신의 남자친구 (85/118)


85. 당신의 남자친구
2022.11.22.



 
화정이 문캐슬 게이트와 연루되어 있다는 게 알려지자 예상대로 드라마에도 영향이 갔다.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비난을 화정이 출연한 드라마가 피해 갈 수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수희를 향해 고의로 차를 몰던 CCTV 영상이 퍼지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했다.

드라마 관계자들은 화정의 부분을 최소화한다고 알렸지만, 사람들은 범죄를 저지른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는 절대 보지 않겠다며 시청 거부에 나섰다.

고공 행진하던 시청률은 그렇게 주춤거리며 수목 드라마의 왕좌 자리도 간신히 지키고 있었다.

아직 드라마가 끝나기까지 6화분이 남아 있는 시점이었다.

시청률을 회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미지수였다.

심각한 사안에 최 사장이 수희를 기획사로 불러들였다.


“이번에 드라마 반응이 정말 좋았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고개를 절절 저은 최 사장이 아픈 머리를 감싸 쥐었다.

드라마까지 미친 악영향과는 다르게 수희에게는 동정 여론이 형성되고 있었다.

수희가 별다른 입장 표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다들 원로 배우의 질투로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우리 쪽에는 타격이 없으니 망정이지. 괜히 너까지 엮여서 큰일 날 뻔했어.”

“사장님.”

가만히 최 사장의 말을 듣고 있던 수희가 입을 열었다.


“드라마 출연료를 전부 기부할 생각이에요.”

“뭐?”

믿을 수 없다는 듯 최 사장이 자라처럼 목을 쭉 내밀었다.

수희 옆에서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철용도 두 눈이 띠용 튀어나왔다.


“돈이 얼만데 그걸 전부 기부를 한다고?”

최 사장이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데도 수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드라마 논란을 잠재우려면 이게 필요해요.”

수희가 나흘 동안 고민해서 낸 결론이었다.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짧은 시간 안에 큰 효과가 나는 방법이 출연료 전액 기부였다.


“수희야, 내가 이해가 안 되는데. 그걸 왜 네가 책임지겠다는 거야.”

잔뜩 진지해진 최 사장이 수희를 설득하려 했다.


“까딱 잘못했으면 네가 사고를 당할 수도 있었어. 지금 최대 피해자는 넌데, 왜 그걸 네가 책임지려고 해.”

수희가 아니었다면 화정은 승만에게 부탁까지 해 가며 <패밀리>에 출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많은 이들이 공들여 만든 드라마가 사람들에게 질타 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의 드라마 속에는 수많은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몇 달간의 노력이 들어가 있었다.

자신만 아니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기에 죄책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 때문에 피해를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시청자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돌아서길 바랐다.


“사장님한테는 피해 안 가도록 제 몫만 기부할게요.”

“내가 하는 말은 그게 아니잖아.”

최 사장은 오랫동안 수희와 일해 왔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였다.


“네가 몇 달을 잠 못 자 가며 찍은 건데, 그 돈을 전부 기부하겠다고 하니까 하는 말이지.”

“사장님, 알잖아요. 저 돈 잘 버는 거.”

싱긋 웃은 수희는 별거 아니라는 듯 굴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최 사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래. 네가 좀 잘 벌긴 하지.”

“버는 만큼 쓰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돈은 또 벌면 되는 거고요.”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이번 작품 저한테 특별해요.”

남들 눈에는 그저 복귀 작품일 뿐이지만, 다시 자신을 배우로 살게 한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드라마 <패밀리>의 작품성이 뛰어나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작품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건 당연한 거였다.


“더 많은 사람한테 이번 작품 알리고 싶어요.”

설득해도 수희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 같자 최 사장이 한발 물러섰다.


“네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사장님은 친한 기자님이랑 인터뷰 하나만 잡아 주세요.”

“인터뷰?”

“소신껏 제 뜻을 밝힌다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제 마음이 닿겠죠.”

수희가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은 갔기에 최 사장은 자세히 묻지 않았다.

어려운 부탁이 아니기에 최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조율해서 알려 줄게.”

“그럼, 사장님만 믿고 가 볼게요.”

최 사장은 자신의 책상 위에 쌓인 대본들을 바라봤다.

드라마 촬영이 끝나자마자 수희 앞으로 많은 양의 작품들이 수급되고 있었다.


“다음 작품은 천천히 할 거지?”

길었던 드라마 촬영이 끝난 지 얼마 안 됐기에 최 사장은 당연하다는 듯 물었다.

그 당연한 물음에 대한 답이 곧장 돌아왔다.


“아뇨. 바로 할 거예요.”

“바로? 쉬지도 않고?”

햇살을 머금은 듯 밝은 미소를 입가에 담은 수희가 말했다.


“저 일하는 게 너무 좋거든요.”

연기가 너무나 좋았다.

사람이 숨을 쉬며 살아가는 것처럼, 자신은 연기를 하며 살아가는 것 같았다.

그 당연한 일을 반년이 넘어서야 하게 되었으니 놓을 수가 없었다.

***

출연료 전액 기부로 인해 수희는 고액 기부 클럽인 ‘아너스 클럽’에 가입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소식을 수희의 인터뷰와 함께 인터넷에 퍼 날랐다.

[드라마 방영 기간에 일어난 출연자 중 한 분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다들 많이 놀랐다. 불편함을 느낄 시청자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패밀리> 팀은 늦은 시간까지 편집 작업을 이어 가고 있다. <패밀리>는 많은 사람의 애정 어린 손길로 탄생한 드라마다. 논란으로 인해 다른 이의 땀과 눈물이 담긴 작품이 외면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간절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전해졌으면 해 출연료 전액을 기부하게 되었다.]

수희의 기부가 알려진 다음 날에는 준영까지 출연료를 전액 기부했다.

심지어 은채까지 1억을 기부하면서 시끄러웠던 화정의 논란은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그리고 7화가 방영되자 그 전의 과오를 씻듯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게 되었다.

전화위복에 성공한 드라마 <패밀리>는 위를 향해 더욱 올라갈 일만 남아 있었다.


“수희 씨, 개인 사진 먼저 찍을게요.”

걱정을 한시름 덜어 놓은 수희가 사진 기사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오늘은 고액 기부를 한 사람들이 모여 기부단 위촉식을 가지는 날이었다.

수희가 단상 위로 올라가자 기부 단체의 회장이 직접 수희에게 꽃다발과 표창장을 건네주었다.

회장과 악수를 하자 사진 기사가 바쁘게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댔다.

가볍게 위아래로 손을 흔들고 떼어 놓자 회장이 단상 앞에 앉아 있던 준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준영 씨랑도 셋이 같이 사진을 찍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회장의 정중한 물음이 이어지자 준영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수희를 바라봤다.

수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준영이 단상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왔다.

수희 옆에 서는 준영을 보며 회장은 뭐가 그리 좋은지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제가 두 사람 팬입니다. <패밀리> 아주 잘 보고 있어요.”

얕게 허리를 숙였다 펴는 회장의 행동에 수희와 준영까지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찍겠습니다.”

사진 기사가 앵글을 잡자 세 사람이 나란히 서서 카메라를 바라봤다.

열심히 세 사람을 담아내는 카메라 뒤편에 선 은채는 영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수희가 스타트를 끊어 놓은 <패밀리> 출연자 기부 릴레이 때문에 은채까지 떠밀리듯 1억을 내놓았다.

기획사 사장이 미래를 위해 투자하라고는 했지만, 그녀에게는 너무나 큰돈이었다.

그럼에도 모처럼 어려운 결심하고 기부했건만, 초대받은 위촉식에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올해 기부금 중 가장 많은 액수를 낸 수희와 준영을 향해 있었다.

드라마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주인공은 늘 수희였다.


‘화정 선배, 오수희 망가트리겠다고 떵떵거리더니, 재기 불가능한 건 오히려 자기잖아.’

따분한 얼굴로 위촉식의 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은채는 하품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무심코 머문 시선 끝에는 쇼트커트에 단정한 옷차림을 한 여성이 머물렀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해 한참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데 사진 기사의 목소리가 상념을 깨트렸다.


“전부 올라가셔서 사진 한번 찍을게요.”

단상 앞에 앉아 있던 열 명가량의 사람들이 단상 위로 올라간다.

회장은 당연하게도 중심에 수희와 준영을 세워 놓았다.

은채는 자리를 잡고 서는 사람들을 헤치고 수희의 옆으로 다가갔다.


“수희야.”

자연스레 수희를 부르며 은채가 수희의 옆에 자리 잡았다.


“너 카메라에 예쁘게 잘 나오더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은채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은채는 아직까지 계약서를 훔쳐 화정에게 준 것에 대한 사과를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협박을 당했다지만 자신에게 미안한 기색 하나 없는 은채를 곱게 볼 수가 없었다.


“다들 여기 보세요. 살짝 스마일.”

때마침 사진 기사가 손을 들어 주목시키자 수희가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카메라 플래시가 연달아 터진 뒤 사진 기사가 엄지와 검지를 말아 OK 사인을 보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단상 위에 있던 사람들이 흩어지고, 수희 역시 준영과 단상을 내려가려 했다.


“오수희 씨.”

뒤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에 수희가 뒤를 돌아보았다.

쇼트커트를 한 여성이 반갑게 미소 지으며 수희에게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TV에서는 많이 뵀는데, 실물이 훨씬 예쁘세요. 저 박나영이라고 해요.”

가지런한 이가 드러날 만큼 환히 웃어 보이는 얼굴에서 수희는 호의를 느꼈다.

경계심 없이 수희가 나영의 손을 잡자, 나영이 붙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말했다.


“승조 씨한테 수희 씨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갑자기 튀어나오는 승조의 이름에 수희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수희는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처음 봤을 뿐만 아니라 승조에게서 나영이라는 여자에 대해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 승조 씨한테 제 이야기를 들었다고요?”

난생처음 듣는다는 얼굴로 서 있는 수희를 보자 나영이 난처해하며 손을 뒤로 뺐다.


“아, 제가 눈치가 없었나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문 나영이 사람들이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속삭였다.


“혹시…… 승조 씨하고 헤어지신 건가요?”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을 하듯 조심스러운 질문이 수희에게는 무례하게만 느껴졌다.

동그랗게 눈을 뜬 나영은 조마조마한 얼굴로 수희의 답을 기다렸다.

단순히 궁금해서 묻는 말일 수 있는데 수희는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구나 싶었다.

예의상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담은 수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잘 만나고 있어요.”

분명 대답을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나영은 오히려 궁금증이 가득해 보였다.


“이상하네요. 그럼 승조 씨가 제 이야기를 안 했을 리 없는데.”

왜 당연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을 거라 생각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우리가 못 나눌 대화를 한 것도 아닌데.”

의미심장한 얼굴로 나영은 혼자서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뒤늦게 자신의 미소가 오해를 불러왔다는 걸 알고 나영이 들어 올린 입매를 손으로 가렸다.


“미안해요. 제가 눈치가 없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전혀 미안하지 않은 눈을 하고 있으니 더욱 기분이 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또 다음에 봬요.”

손목에 있던 시계를 보던 나영이 몸을 튼 찰나였다.


“잠깐만요.”

커져만 가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수희가 입을 열었다.


“오빠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너무나 쉬운 물음일 텐데 나영은 눈을 위로 끌어 올리며 많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수희의 마음은 얼마 남지 않은 성냥개비처럼 초조해져만 갔다.

한참을 시간을 끌던 나영이 답을 내렸다.


“역시, 오늘 가서 직접 물어보세요.”

허탈한 것도 잠시.


“아마 친절하게 대답해 주지 않을까요?”

“…….”

“숨기는 게 없다면요.”

뒤이어 붙는 말에 심장의 끝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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