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분열의 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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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분열의 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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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분열의 징조
2022.11.26.
“아마 친절하게 대답해 주지 않을까요?”
“…….”
“숨기는 게 없다면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나영이 눈을 반달 모양으로 부드럽게 휘며 웃어 보였다.
악의가 담겨 있지 않은 어투가 오히려 수희의 신경을 살살 긁는 것 같았다.
애써 타들어 가는 마음을 숨긴 수희가 입술 끝을 들어 올렸다.
“제가 오빠한테 물어볼게요. 박나영 씨랑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지요.”
“승조 씨가 절 어떻게 소개할지 궁금하네요.”
자신의 두 손바닥을 활짝 펼쳐 맞댄 나영이 소녀처럼 설레했다.
그 표정을 보며 수희의 입매가 아래로 내려갔다.
“전 가 볼게요.”
나영이 계단 쪽으로 발길을 돌리자 수희가 말없이 고개만 짧게 숙였다.
붙임성이 좋은 건지 나영은 위촉식이 펼쳐진 강당을 벗어나면서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이름 들으니까 기억나네, 박나영.”
어느새 수희의 옆으로 온 은채가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꺼내 놓았다.
“우리나라보다는 해외에서 더 유명한 의상 디자이너잖아. 이번에 올리비아 공연복도 맡아서 반응 장난 아니었는데. 모르는 건 아니지?”
올리비아는 4주 동안 빌보드 차트 1위를 달성한 신인 가수였다.
꽃을 형상화한 드레스로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던 나영은 올리비아로부터 직접 러브콜을 받았다.
LA 콘서트 마지막 무대에서 나영이 디자인한 옷을 입고 나온 걸 수희도 본 적이 있었다.
“누나, 가요.”
지켜보던 준영이 수희와 은채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마치 몹쓸 짓을 한 것처럼 수희에게로 가는 시선이 완전히 차단당했다.
은채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수희가 그간의 일들을 준영에게 말했다는 걸.
“너 입 싸구나?”
자신이 한 행동이 있었지만, 은채는 준영에게 미움받는 게 달갑지 않았다.
<패밀리> 여자 주인공 역을 차지하고 싶었던 건 준영이 남자 주인공이라는 것 때문도 있었다.
준영은 자신의 타입에 가까운 남성이었다.
수희 때문에 줄곧 안 좋은 이미지가 심어졌으니 기분이 언짢아질 수밖에 없었다.
“너한테 들을 말은 아니지.”
건조하게 던지는 수희의 한마디에 은채는 얼굴이 벌게진 채 이를 악물었다.
준영과 함께 단상을 내려가던 수희에게 은채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긴장 좀 해야겠던데?”
계단의 중심에서 멈춰 선 수희가 되물었다.
“내가 왜 긴장해야 하는데?”
“순진한 척하면서 한 대표랑 헤어졌는지 떠보는 거 보면 모르겠어?”
도도하게 턱을 세운 은채가 비소를 날렸다.
“한 대표님한테 관심 있는 거잖아.”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굳이 은채가 직면하게끔 해 주었다.
마치 다른 이의 고통을 즐기듯 은채는 잔뜩 신이 난 아이처럼 보였다.
“관심 있다고 해도 상관없어.”
“…….”
“그게 우리 사이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은 조금도 없거든.”
확신에 가득 차 있는 목소리에 은채는 김빠진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수희는 그길로 강당을 나와 건물 뒤편에 있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옆에서 함께 걷고 있던 준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수희를 바라봤다.
분명 상관없다고 한 건 수희인데 얼이 빠진 것처럼 두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누나, 조심히 들어가요.”
준영이 자신이 세워 둔 차 앞에 서며 수희에게 인사했다.
수희는 그대로 준영을 지나치려다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두 눈이 아래로 처진 수희가 입술을 소심하게 달싹거렸다.
“준영아. 나 조금 전에 완전 괜찮은 척한 거야.”
아무리 승조와의 관계가 견고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을까.
시원스러운 이목구비와 늘씬한 키를 가진 여자였다.
다른 남자들이 봤을 때 충분히 매력을 느끼고도 남을 만큼 아름다웠다.
“나 하나도 상관없지 않아. 너무 신경 쓰여!”
은채의 앞에서 꾹꾹 억눌렀던 속마음이 입 밖으로 불쑥 빠져나왔다.
너무나 심각한 수희와 다르게 준영은 웃음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은채의 앞에서 여유가 넘치던 수희의 모습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차준영, 너 왜 웃는 거야? 나 진짜 진지해.”
준영의 웃음의 의미를 알 리 없는 수희가 볼멘소리를 냈다.
뒤늦게 목을 가다듬은 준영이 수희에게 물었다.
“누나, 같이 밥 먹을래요?”
“밥?”
저녁을 먹을 시간이긴 했지만 갑작스러워 수희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지금 기분 별로잖아요. 같이 매운 거 먹으면서 풀어요.”
매운 거라.
그렇지 않아도 열을 내서 그런지 허기가 지는 것 같았다.
고민할 틈 없이 수희가 고개를 크게 한 번 끄덕였다.
“그래, 좋아. 가자.”
***
화장실로 들어온 은채가 세면대에 물을 틀어 손을 씻어 냈다.
위촉식에 가장 먼저 도착한 건 준영과 은채였다.
은채가 먼저 말을 건네는데도 준영은 고개만 까딱일 뿐 입술 한 번 떼지 않았다.
자신이 다가가려 하면 마치 벌레라도 보듯 경멸의 눈길을 보내왔다.
“짜증 나, 진짜. 내가 어디 가서 이런 취급 당할 사람이냐고.”
세면대 레버를 신경질적으로 아래로 내리고는 벽에 설치된 핸드타월을 벅벅 뽑아냈다.
두툼하게 뽑아낸 핸드타월로 손을 닦아 내는데, 칸막이 화장실에서 나영이 문을 열고 나왔다.
은채는 세면대로 걸어오는 나영을 주시하며 핸드타월을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거울을 보며 손을 씻고 있던 나영은 은채의 진한 시선을 느꼈다.
세면대 물을 끈 나영이 숙이고 있던 허리를 세우며 거울 속에 비친 은채를 바라봤다.
온화한 눈빛을 내뿜으며 나영이 감격에 젖은 목소리를 냈다.
“아까 못 한 말이 있는데, 저 강은채 씨 팬이에요. <패밀리> 너무 재미있게 잘 봤어요.”
해외에서 잘나가는 디자이너가 자신을 칭송해 주니 은채는 우쭐해졌다.
“고마워요. 저도 나영 씨 옷들 너무 잘 보고 있어요.”
“정말요? 이거 영광인데요?”
소리 내 후후 웃던 나영이 잠시 망설이다가 털어놓았다.
“전 솔직히 이번에 좀 속상했어요.”
“어떤 점에서요?”
“여자 주인공 역할, 오수희 씨보다는 은채 씨가 훨씬 소화를 잘했을 것 같아서요.”
역시 디자이너라 그런가 보는 눈이 좀 있네. 오수희보다는 나지.
꽉 막힌 속을 뚫어 내듯 은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수희가 백이 좀 있어서 제가 감히 오를 곳이 못 되더라고요.”
“백?”
궁금하다는 듯 나영이 동그랗게 눈을 뜨자 은채가 신랄하게 입을 놀렸다.
“알다시피 오수희 남자친구는 제작사 대표잖아요?”
“그렇죠.”
“거기에다가 오수희 씨 아빠가 <패밀리> 드라마 작가인 거 있죠.”
커다란 비밀을 들은 듯 나영이 두 손으로 입가를 막았다.
“이런 거 저한테 알려 주셔도 되는 거예요?”
나영이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볼륨을 확 줄여 속삭였다.
김시운 작가 얘기는 이미 화정이 회식 장소에서 폭탄 발표를 해서 알음알음 퍼진 상태였다.
“어디 가서 말할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저 입 무겁거든요.”
그건 전혀 아닌 것 같은데.
믿기지 않는다는 눈을 얼른 집어넣은 은채가 나영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내가 다른 비밀 하나도 알려 줄까요?”
“뭔데요? 알려 주세요.”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나영이 집중했다.
“보기에는 애틋해 보이겠지만, 둘이 보통 연인 사이는 아니에요.”
이해하기 어려운 말에 나영은 가만히 듣기만 할 뿐이었다.
“서로의 이득을 위해 둘이 계약을 했거든요.”
“계약요?”
“계약 연애, 라는 거죠.”
한 글자 한 글자 끊어 말하는 은채는 잔뜩 들뜬 얼굴이었다.
“계약 연애라니, 그게 가능한 거예요?”
“서로 이루고 싶은 게 있는데, 연애하는 척이 뭐 대수예요?”
승조가 위험에 빠진 수희를 두 번이나 구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사람이 눈앞에서 위기에 처했으니 도움을 준 것뿐이라고 여겼다.
일반적으로 봤을 땐 조금 과도한 반응이긴 했지만, 두 사람이 계약으로 이루어진 관계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수희도 나영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던 게 아닐까.
모든 게 다 추측일 뿐이지만, 은채에게 진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두 사람에게 파탄을 안겨 줄 나영의 등을 떠밀면 그만이었다.
은채는 아직도 놀란 얼굴을 지우지 못한 나영에게 한 번 더 강조해 알려 주었다.
“나영 씨한테도 기회가 있다는 뜻이에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잔잔한 물가에 돌을 던진 듯 나영의 목소리가 팍 튀었다.
“제가 어떻게 그래요.”
맞네, 이 여자. 한 대표님 좋아하는 거.
마음이 없다면 한승조에게 이성의 감정이 없다고 했을 것이다.
“어때서요? 두 사람 진짜 연인 사이도 아니고 결혼한 사이는 더더욱 아닌데.”
조금만 더 등을 떠밀면 두 사람의 관계에 발을 들여놓을 것 같았다.
“그래도…….”
“시도도 안 해 보고 포기하려는 거예요?”
“…….”
“그러다 정말 오수희한테 뺏길 수도 있는데?”
고민하듯 한참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나영이 두 손을 안으로 말아 쥐었다.
“고마워요, 은채 씨. 비밀 저한테 알려 줘서.”
“고백해 보려고요?”
슬쩍 떠보는 말을 나영이 덥석 물었다.
“해 봐야죠. 두 사람 진실한 관계도 아닌데, 제가 못 끼어들 건 없죠.”
망설일 때는 언제고 나영은 자신감이 넘쳤다.
“잘 생각했어요. 한 대표님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이참에 확 잡아요.”
“안 그래도 이번 주 금요일 미팅 때 따로 보기로 했거든요. 그때 말해 볼게요.”
“어디서 보기로 했는데요?”
“K 호텔 커피숍요. 그건 왜요?”
좋은 생각이 떠오른 건지 은채는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제가 좀 도와주려고요.”
***
“아! 매워.”
물잔을 붙잡은 수희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발을 동동 구를 정도로 매운맛에 수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 손에 든 젓가락으로 벌건 떡을 쿡 찍어 눌렀다.
준영은 매운 떡볶이와 물을 번갈아 먹는 수희를 보며 쿡쿡 웃음이 나왔다.
“누나, 매우면 다른 걸 시킬까요?”
수희를 데리고 온 곳은 준영이 중학생 때부터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분식집이었다.
혀가 아리자 수희가 하얀 이로 혀끝을 꾹꾹 눌렀다.
“아냐. 매운 거 먹으니까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수희는 결국 잔에 담긴 물을 불이 난 목 안에 전부 털어 넣었다.
“하아. 네 덕분에 좀 머리가 상쾌해지는 것 같아.”
“박나영 씨라는, 그분 때문에요?”
부정하지 않고 수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빠한테 관심 있는 것 같아서 좀 걱정돼.”
“한 대표님은 그분한테 조금도 관심 없을 텐데요?”
젓가락으로 수희가 흰 달걀의 겉면을 콕콕 찍어 눌렀다.
“그렇긴 하지만……. 솔직히 박나영 씨, 예뻤잖아. 좀 많이.”
“예뻤나?”
팔꿈치를 테이블에 댄 준영이 손에 턱을 괴고 빤히 수희를 바라봤다.
“난 누나가 훨씬 예쁘던데.”
볼록 바람을 넣은 볼을 꺼트리며 수희가 시선을 끌어 올렸다.
하하, 어색하게 소리 낸 수희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너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왜 놀랐는데요?”
“방금 한 말 오해하기 딱 좋잖아.”
“오해가 아니에요.”
“응?”
젓가락이 미끄덩하고 통통한 달걀을 빗겨 나갔다.
지그시 닿는 준영의 눈길을 수희는 피하지 못했다.
“누나는 나한테 안 예뻤던 적 없어요.”
담백하게 스며드는 고백에 깊게 들이쉰 수희의 숨이 무언가에 걸린 듯 멈춰 버렸다.
어디까지가 장난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진지하게 받아치면 분위기를 수습하기 어려울 것 같아, 수희는 끝까지 장난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너, 누나한테 장난치는 거 아냐.”
그때, 테이블 위에 있던 휴대폰이 울려 왔다.
―승조 오빠
수희의 눈꺼풀이 아래로 깔리고, 하얀 액정 위에 박힌 검은색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상황을 피하고자 수희가 휴대폰으로 손을 뻗는데, 준영의 손이 휴대폰을 덮어 버렸다.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오던 휴대폰 불빛이 꺼져 버렸다.
“나 누나한테 장난이었던 적 단 한 번도 없어.”
그제야 확실히 알아차렸다.
준영은 진심이었다는 걸.
“누나 처음 만난 그때도, 지금 이 순간도.”
“…….”
“나한테 오수희는 여자였어요.”
잠깐의 침묵이 둘 사이를 채우고, 수희는 고요히 두 눈을 키웠다.
준영의 말 뒤에 붙을 말이 무엇인지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
“좋아해요.”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좋아해요, 누나.”
뜨거운 속처럼 다른 곳도 어지러웠다.
마음속이, 머릿속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