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 흔들리는 믿음 (88/118)


88. 흔들리는 믿음
2022.12.03.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 때문에 수희의 시야가 그대로 차단되었다.

승조와 나영이 어떤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게끔 사람들은 휴대폰으로 수희의 얼굴을 찍어 대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 방영 중인 <패밀리>의 인기가 더해져 구름 같은 인파를 불러온 듯했다.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할 틈도 없이 이곳저곳에서 종이들을 들이밀었다.


“사인 좀 해 주세요!”

“너무 예뻐요, 오수희 씨.”

평소라면 유연하게 대처할 테지만, 수희의 머릿속에는 승조와 나영밖에 없었다.

당황한 수희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 눈동자만 굴리고 있을 때였다.

움찔대는 수희의 손에 누군가의 손이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어 온 승조가 보였다.

회사 대표의 등장에 수희를 둥글게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이 옆으로 비켜섰다.


“수희야, 이리 와.”

승조가 수희의 손을 잡은 채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을 헤치고 나왔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수희의 뒤를 잇자 우뚝 멈춰 선 승조가 몸을 틀었다.

싸늘한 냉기가 도는 표정에 직원들의 발이 공중에서 뚝 멈췄다.


“지금부터 따라오면 해고 처리해 달라는 뜻으로 간주하겠습니다.”

해고라는 소리에 직원들은 병정들처럼 뻣뻣하게 빙글 돌아 제 갈 길을 갔다.

뭉쳐 있던 사람들이 거짓말처럼 흩어지자 승조가 그제야 발을 떼어 냈다.

그의 손에 이끌려 따라가던 수희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따라오면 해고하려고 했어요?”

“겁만 주려고 한 말이야.”

사람들이 타지 않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승조가 말을 덧붙였다.


“대신 대표 말을 무시하는 간 큰 직원이 있다면 개인 면담 정도는 가져 줘야지.”

지금 무시무시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수희는 고개를 떨어트려 자신의 손을 감싼 승조의 손을 바라봤다.

손을 활짝 펼친 수희가 승조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시선을 끌어 올리니 승조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좋은데, 그동안 어떻게 버텼던 걸까.

발끝을 들어 올린 수희가 승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진짜, 진짜 보고 싶었어.”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흘러나오고, 가슴은 콩닥콩닥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승조가 허리를 숙여 수희와 입술을 겹쳤다.

아랫입술을 살그머니 머금고 떨어지는 입술에서 박하 향이 퍼졌다.


“내가 훨씬 더 보고 싶었어.”

귓가에 소곤대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달콤해 입 안이 저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수희는 승조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발을 빼냈다.

승조를 만난 기쁨에 박나영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다.

승조가 원치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영이 그의 품에 안겼었다.

같은 여자이기에 알 수 있었다. 승조에게 안긴 순간 바뀌던 표정의 의미를.

떨림, 설렘, 긴장감, 여러 감정이 뒤엉킨 채 나영은 승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영은 승조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의 잘못은 조금도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하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차에 올라타고 나서도 수희는 내내 표정이 어두웠다.

승조가 예약해 둔 식당 앞에 도착하자 수희가 안전띠를 풀었다.

문고리를 붙잡은 수희가 차에서 내리기 전이었다.


“수희야.”

그의 부름에 수희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 있어?”

눈치 빠른 승조가 수희의 기분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심지어 차 안에서 내내 창밖만 보고 있었으니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더 이상했다.

가슴에 응어리진 말을 더 늦기 전에 승조에게 해야겠다 싶었다.


“이번에 위촉식 가서 박나영 씨를 만났어요.”

“…….”

“박나영 씨가…… 오빠랑 아는 사이라고 하던데.”

발치에 머물러 있던 초점을 승조에게 돌렸다.


“박나영 씨랑 오빠, 어떻게 아는 관계예요?”

“이번에 FL 패션몰에서 박나영 씨 브랜드를 단독으로 론칭하게 됐어.”

“일적으로 알게 된 사이인 거예요?”

“박나영 씨라는 디자이너를 알고 있었을 뿐, 만난 건 계약하고 나서부터야.”

나영이 승조의 회사에 있는 걸 본 순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수희가 걱정하고 있던 사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걸.

다 알고 있는데도 속이 답답한 건 나영이 승조에게 품고 있는 사심 때문일 것이다.


“나영 씨가 오빠랑 아는 사이라고 하는데, 정작 나는 들은 게 없으니까요.”

“일 이야기니까, 너한테 말하지 않았던 거 같아.”

“그래도 나영 씨가 직접 아는 사이라고 할 정도면 친한 거 아닌가 해서요.”

그와 싸우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는데 왜 자꾸 어조가 톡톡 튀는 걸까.

오해를 풀고 나면 이 시끄러운 속이 조금은 잠잠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명치에 단단한 돌 하나가 얹어진 느낌이었다.


“그것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던 거야?”

승조가 수희를 달래 주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미 나영과는 일과 관련된 관계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엘리베이터 앞에서 두 사람을 봤다고 말한다고 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


“어떻게 좋아요. ……다른 여자가 내 남자친구랑 아는 사이라고 하는데.”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민 수희가 툴툴거렸다.


“질투는 나만 할 줄 알았는데.”

“나도 질투를 하거든요?”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며 수희가 기분을 풀어 보려 노력했다.

승조가 수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질투하는 건 좋은데, 다른 여자랑 내 사이 오해는 하지 마.”

“…….”

“너 말고 다른 여자 신경 쓸 정신 없어.”

진심이었다.

바쁜 와중에 잠깐이라도 시간이 날 때면 수희를 떠올리기 바빴다.

박나영은 그저 이성이 아닌 업무로 엮인 사람일 뿐이었다.

수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승조가 손을 거두며 차의 시동을 껐다.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응.”

쌓아 두었던 섭섭함을 애써 털어 내며 수희가 차에서 내렸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직원은 미리 준비된 룸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주문한 수희는 출출한 배를 쓰다듬었다.

어서 요리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승조가 물수건으로 손을 닦아 내며 물었다.


“어제 차준영 씨 만났다고 했지.”

뒤에 올 말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수희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만나서 무슨 이야기했어?”

자신이 없는 동안 수희가 가장 자주 만나고 많은 대화를 나눈 사람은 준영일 것이다.

게다가 어제는 준영과 저녁을 먹느라 자신의 연락까지 받지 못했다.

휴대폰을 보지 못할 정도라면 분명 중요한 이야기를 나눴을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아……. 그게.”

곧장 답이 돌아올 거라 여겼는데 수희는 바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좋아해요, 누나.”

나영이 신경 쓰여 준영에게 고백받은 것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수희의 얼굴에 승조의 진중한 눈빛이 내려앉았다.


“수희야.”

답을 갈구하는 부름에 수희는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샘솟았다.


“하하.”

어색한 웃음이 룸 안에 공허하게 퍼져 나갔다.

하지만 수희의 웃음에 따라 웃을 승조가 아니었다.

웃음이 뚝 끊어진 수희는 승조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고백받았어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용케 들은 승조가 두 팔꿈치를 식탁에 댄 채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볼까?”

 

***

<패밀리> 후반부 후시 녹음 중인 수희는 며칠 전에 함께 점심을 먹었던 승조를 떠올렸다.


“무서웠지, 오빠 표정.”

구구절절한 수희의 설명을 들으면서 승조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준영과의 관계가 이전과 변화가 없다는 걸 알고 더는 캐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티끌만 한 오해도 생기지 않도록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은채가 녹음 부스 안에서 후시 녹음 중인 틈을 타 수희는 승조에게 메시지를 보내 놓았다.


[나 이제 곧 일정 끝날 것 같아. 오빠는?]

그도 휴대폰을 보고 있던 건지 생각보다 빨리 답이 돌아왔다.


[난 미팅하러 가는 중이야. 미팅하고 나서는 바로 회사로 가야 할 것 같네.]

오늘도 못 만나는 건가.

이틀 전에 보긴 했지만, 그것도 한 시간이 전부였다.

겨우 한 시간으로 그리움을 채울 수 있을 리 없었다.


“수희 씨, 내레이션 들어갈게요.”

“네.”

음향 감독의 말에 수희가 휴대폰을 주머니 안에 넣으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녹음 부스에서 나온 은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수희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내레이션 내용들은 미리 승조가 준 녹음 파일로 익혀 두었기에 어려운 건 없었다.

앞에 보이는 드라마의 한 부분을 보고 수희는 감정을 실어 내레이션을 입혔다.

수희가 내레이션을 끝내자 음향 감독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녹음 부스 안에 울렸다.


“수희 씨, 수고했어요.”

후반부 후시 녹음을 모두 마치고 수희가 쓰고 있던 헤드폰을 빼냈다.

녹음 부스를 나오는데 이미 후시 녹음을 마친 은채가 입구에 떡하니 서 있었다.

할 이야기가 있어 보였지만, 수희는 조금도 상대해 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감독님 수고하셨습니다.”

“수희 씨도 수고했어요. 어서 들어가 봐요.”

감독과 인사를 나눈 수희가 소파에 올려 둔 핸드백을 챙겨 녹음실을 나왔다.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수희는 은채가 따라 나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시하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려는데, 은채가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 이야기 좀 해.”

어깨에 얹어진 은채의 손을 치워 낸 수희가 돌아섰다.


“무슨 이야기.”

짤막한 대답에 은채는 오히려 비웃음을 날렸다.


“한 대표님 만나러 가는 건 아니지?”

“내가 누굴 만나든 무슨 상관인데.”

“왜 그렇게 까칠하게 굴어. 나는 그냥 네가 딱해서 정보 좀 주려던 것뿐인데.”

딱해?

수희의 매끈한 이맛살이 구겨지자, 은채가 연민 어린 시선으로 빤히 바라봤다.


“한 대표님 지금 어디라고 해?”

입을 다문 수희를 대신해 은채가 자문자답을 했다.


“일하고 있다고 하지? 근데 아닐걸?”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재촉하는 수희에게 은채가 폭탄 같은 사실을 터트렸다.


“한 대표님 지금 K 호텔에 있을 거야.”

“…….”

“박나영 씨랑.”

심장이 얼음으로 가득 메워진 것처럼 시렸다.

누군가 제 몸을 쥐고 바닥으로 쿵 떨어트린 것도 같았다.

어디에도 근거는 없었다. 자신과 승조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한 거짓말일 수도 있었다.


“어서 가 봐야 하지 않겠어? 박나영 씨랑 호텔에서 뭘 할지 뻔하잖아.”

“넌 네 인생이 보잘것없나 봐.”

“뭐?”

“그러니까 내 인생에 관심 가지는 거 아니야?”

눈에 불을 켠 은채가 다시금 수희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수희가 먼저 은채의 말을 가로막았다.


“제발 네 불쌍한 인생부터 돌아봐.”

은채와 말을 섞는 것도 오늘로 끝이라 다짐했다.

돌아선 수희가 엘리베이터로 걸어가자, 뒤에서 은채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야. 너 뭐라고 했어. 불쌍한? 하! 누가 누구보고 불쌍하대!”

기를 쓰고 소리를 질러 댔지만, 수희는 그길로 방송국을 빠져나왔다.

지하에서 철용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수희는 방송국 앞에 세워진 택시에 올라탔다.


“어디로 갈까요?”

운전석에 앉은 기사의 물음에 수희는 몇 번이나 고민했다.


“아가씨?”

상체를 튼 기사가 수희를 보자, 그녀는 붙어 있던 입술을 떨어트렸다.


“K 호텔로 가 주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