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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내 남자친구를 지켜라! (89/118)


89. 내 남자친구를 지켜라!
2022.12.06.


택시가 K 호텔 앞에 세워지자 뒷좌석에서 수희가 내렸다.

그녀는 핸드백에 챙겨 둔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 호텔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교차하던 두 다리가 호텔 문 앞에서 뚝 멈춰 버렸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승조가 자신에게 나영과의 사이를 속였을 리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랑을 말하던 남자였다.

증거도 없는 은채의 말만 믿고 호텔까지 온 자신이 한심했다.

결국에는 그를 믿지 못한 거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발끝을 돌린 수희가 택시에 올라타려 했지만, 타고 온 택시는 이미 출구를 빠져나갔다.

어쩔 수 없이 호텔 안으로 들어오는 다른 택시를 잡아타려던 때였다.

익숙한 검은색 세단을 보고 수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 앞을 향해 걸어갔다.

목적 없이 뚜벅뚜벅 걸어가던 수희는 호텔에 세워진 둥근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 검은색 세단 조수석에서 내리는 사람을 확인했다.

문밖으로 가장 먼저 나온 건 매끈하게 뻗은 긴 다리였다.

누가 보아도 여성의 다리였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설마설마했던 나영이었다.

수희의 고개가 곧장 운전석 쪽으로 돌아갔다.

운전석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고 수희의 눈이 끝도 없이 키워졌다.

승조가 자신에게 다가온 발레파킹 직원에게 키를 넘겨주고 있었다.


‘진짜 오빠잖아.’

수희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려 나영과 나란히 호텔로 들어가는 승조를 바라봤다.


‘왜 두 사람이 호텔에…….’

혼란스러운 수희의 머릿속에 며칠 전 그와 했던 통화 내용이 떠올랐다.


“그럼 우리 금요일에 볼까요? 나 그날 일정 없는데.”


[금요일에는 안 될 것 같은데.]

금요일은 안 된다고 했던 건 나영과의 약속 때문이었을까.

수희는 고개를 격하게 저으며 제 머리를 붙잡았다.


“호텔에 다른 용건이 있어서 왔을 수도 있잖아.”

그가 자신을 두고 잘못된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얼마 전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영이 승조를 보던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쥐어뜯기 직전이었던 수희는 뒤늦게 승조가 안으로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디 갔지?”

기둥 밖으로 몸을 빼낸 수희가 호텔 입구 쪽으로 조심스레 걸어갔다.

유리문 너머로 승조와 나영이 있는 걸 발견한 수희가 숨소리조차 죽이고 뒤를 밟았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도 자석처럼 승조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재빠른 몸놀림으로 승조의 눈을 피해 다니던 수희는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걸 목격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야 화분 뒤에 숨어 있던 수희가 튀어나왔다.

한 층, 한 층 올라가는 숫자는 ‘8’에서 멈췄다.

얼른 밑으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잡고 나서야 수희는 이성이 돌아왔다.


“오수희,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돌아가자.”

돌아가는 거야.

그래야 하는데 왜 발이 딱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냐고.

띵―

수희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도착했다.

스르륵 열리는 엘리베이터를 바라보며 수희는 절로 울상을 지었다.

문이 닫히기 전에 수희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엘리베이터는 작은 소음도 내지 않고 8층까지 금세 도달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잔잔하게 깔린 클래식 음악이 가장 먼저 귓가에 닿았다.

복도를 걸어 나온 수희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이 카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평일 낮 시간대라 그런지 카페 안에는 비어 있는 테이블이 많았다.

카페 안을 둘러보던 수희의 시선이 창가 쪽으로 향했다.

창가 자리에 있는 테이블에 앉은 승조의 앞에는 나영이 앉아 있었다.


‘무슨 이야기 중인 거지?’

일 이야기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나영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수희는 콧잔등 위로 선글라스를 끌어 올리며 슬그머니 승조의 뒤편으로 걸어갔다.

승조의 뒤에 있는 빈 테이블에 앉은 수희가 메뉴판을 보는 시늉을 했다.

눈은 메뉴판에 적힌 글자를 향해 있었지만, 귀는 쫑긋 세워 나영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종일 회사에서 일만 하다가 나오니까 좋네요.”

우리 오빠랑 있어서 좋은 게 아니라?


“밖에서 보자고 한 거 잘한 것 같아요.”

따지고 보면 여긴 호텔 안이지.

수희는 차마 두 사람 앞에 나타나지는 못하고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승조가 무어라 대답할지 기다리고 있는데 곁으로 카페 직원이 다가왔다.


“주문 도와드릴까요?”

친절한 직원의 목소리가 천둥소리보다 더욱 크게 들렸다.

뒤에 앉은 승조를 의식한 수희가 메뉴판에 적힌 아메리카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차갑게 드릴까요, 따뜻하게 드릴까요?”

승조의 눈치를 보며 수희가 숨소리를 가득 넣고 속삭였다.


“차갑게요.”

은밀하게 메뉴를 전달하자 눈치껏 직원이 고개를 끄덕인 후 사라졌다.


“제가 빙빙 돌려 말하는 데는 소질이 없습니다.”

직원이 사라지고 승조의 목소리가 귓바퀴를 파고들어 왔다.


“박나영 씨한테 한 가지 여쭤 봐도 됩니까?”

“네, 뭐든 물어보세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나영이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늘 무심하게만 굴던 승조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저한테 사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수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바짝 마른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나영의 말을 기다렸다.


“……저도 빙빙 돌려 말하는 거 못 해요.”

“…….”

“저 승조 씨한테 관심 있어요.”

갑작스러운 승조의 물음에 당황하긴 했지만 나영은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승조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차 비서가 빠진 오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팅이 끝나면 승조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생각이었다.


“좋아해요.”

긴장을 한가득 머금은 말은 끝이 자잘하게 떨리고 있었다.


“승조 씨를 많이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아요.”

메뉴판을 들고 있던 수희의 손이 땀으로 미끈거렸다.

나영이 이성적인 호감을 느끼고 있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고백을 할 줄은 몰랐다.

승조가 여지 따위 주지 않았을 거라 믿지만, 왠지 모르게 그에게도 서운한 감정을 느꼈다.


‘나 완전 이기적이잖아.’

다른 사람에게 고백을 받은 건 수희가 먼저였다.

한데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승조에게 섭섭해하다니…….


‘최악이다.’

최악은 두 사람의 대화까지 엿듣고 있는 자신이었다.

수희는 승조의 대답을 듣지 않기 위해 재빨리 의자를 밀고 일어서려 했다.

드르륵.

그런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기도 전에, 뒤편에서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나영 씨가 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어디 가세요?”

갑자기 자리를 뜨는 승조를 보고 나영의 눈동자가 혼란스러운 듯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오늘부로 ‘HARI’ 론칭은 영업팀에서 전적으로 맡을 겁니다.”

“네? 승조 씨가 전적으로 ‘HARI’를 맡고 책임져 주시는 거 아니었나요?”

파리에서 성공적으로 론칭한 HARI를 한국에서 가장 먼저 선점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원하는 계약서가 나올 때까지 미팅을 계속했고, 부하 직원이 아닌 승조가 직접 나영과 소통했다.

나영의 불편함을 최소화해 빠른 시일 내에 론칭하기 위해서였다.


“그 사항을 전부 재고하려고 합니다.”

“왜요?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승조는 태연스레 의자에 걸려 있던 재킷을 입었다.


“그건 박나영 씨가 제게 사적인 감정을 가지기 전에 가능했던 부분입니다.”

“……제 고백이 문제가 된다는 거예요?”

“저한테는 문제가 됩니다. 충분히.”

눈물을 가득 머금은 눈으로 나영이 승조를 빤히 올려다봤다.


“너무 갑작스럽잖아요. 이렇게 저랑 거리 두는 거.”

“…….”

“승조 씨는 제가 받을 상처는 중요하지도 않아요?”

원망이 섞인 목소리에도 승조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지금 저한테는 내 사람이 상처받는 게 훨씬 더 중요해서 말이에요.”

나영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고 승조가 돌아섰다.

그때, 수희의 앞으로 상냥한 미소를 입가에 올린 카페 직원이 다가왔다.

수희는 두 손을 격하게 흔들어 보이며 직원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의사를 표현했다.

그 모습에 직원은 한참을 멈칫대더니 살금살금 다가와 테이블 위에 커피 잔을 올려 두었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뒤에 있는 승조의 뒷머리를 보며 소곤거리는 건 덤이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수희는 승조가 제발 뒤돌아보지 않기를 바랐다.

주변이 고요해져 슬그머니 눈을 뜨는데, 갈색 커피 위로 까만 그림자가 덮였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녀의 간절한 바람을 무시한 승조가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커피는 내가 나중에 사 줄게.”

“……오빠.”

수희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냈다.


“가자.”

승조는 수희에게 왜 여기 있냐고 묻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걸 아는 것처럼 다른 말 없이 수희의 손을 감싸 잡았다.

다정하게 감싸 쥔 그의 손을 바라보며 수희가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승조와 달리 나영은 수희가 따라온 것을 전혀 몰랐던 건지 얼굴이 붉어졌다.

수희가 없는 틈을 타 용기 내 고백했는데, 승조에게 보란 듯 거절당하고 말았으니 당연했다.

자신을 이끄는 따스한 온기를 따라 수희가 발걸음을 떼어 냈을 때였다.


“나는 왜 안 되는데요?”

기세 좋게 내지르는 나영의 목소리에 수희가 고개를 돌렸다.


“우리 꽤 잘 통할 것 같지 않아요?”

이미 수희까지 자신의 고백을 들었으니 더 이상 제 마음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나영은 당당하게 턱 끝을 들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담해요. 오수희 씨보다 제가 더 승조 씨 옆자리 완벽히 채울 수 있어요.”

끝까지 나영에게 돌아서지 않던 승조가 발끝을 돌려 나영을 마주했다.


“그걸 왜 박나영 씨가 채웁니까.”

“어차피 두 사람 서로 사랑해서 만나는 사이도 아니잖아요.”

“누가 그럽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고.”

얼음송곳처럼 차갑고 날 선 음성에 떳떳하던 나영의 태도가 한결 수그러들었다.


“아, 알 수 있어요. 두 사람 전혀 사랑하는 사이 같지 않으니까.”

은채가 비밀이라고 했으니 그녀의 이름을 꺼낼 수도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추측에 승조가 미간을 구기며 입을 열려 했다.


“사랑해요.”

수희가 서 있던 자리에서 한 발 앞으로 걸어갔다.

승조에게 내내 붙어 있던 나영의 시선이 수희에게로 옮겨 갔다.

수희는 흔들림 하나 없는 눈빛으로 나영을 바라보며 단단한 목소리를 냈다.


“나, 이 사람 많이 사랑해요.”

승조의 손을 감싸 잡은 수희의 손에 점차 힘이 실렸다.


“나 아니면 다른 누구도 오빠 옆자리 대신 못 해요.”

단언하는 수희에게 나영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만 할 수 있는 거고, 나만 이 사람 곁에 있을 수 있으니까.”

“…….”

“그러니까 박나영 씨, 이제 그만하세요.”

하얗던 나영의 얼굴에 서서히 붉은빛이 돌았다.

꼭 승조에게 추태라도 부리고 있었던 것처럼 수희가 나서서 자신을 차단했다.

정말 승조의 여자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게 못마땅했다.


“오빠, 가요.”

여전히 꽉 잡은 승조의 손을 이끌며 수희가 카페를 빠져나가려 했다.


“승조 씨.”

그러나 포기를 모르는 건지, 나영이 승조를 다시금 불렀다.


“지금 이대로 가면 HARI는 FL 패션몰에서 론칭하기 어려울 거예요.”

나영의 협박에 승조가 아닌 수희가 돌아보았다.


“HARI를 론칭하고 싶다면, 저랑 마저 미팅해요.”

질투 어린 나영의 눈이 수희에게 꽂혔다.


“오수희 씨는 보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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