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차선책
(90/118)
90. 차선책
(90/118)
90. 차선책
2022.12.10.
“HARI를 론칭하고 싶다면, 저랑 마저 미팅해요.”
수희가 거슬린다는 듯 나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오수희 씨는 보내고요.”
HARI의 브랜드 가치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대표인 승조가 공을 들일 정도니 HARI를 놓치고 싶지 않을 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승조의 일에 방해꾼이 되고 싶지 않았다.
괜히 자신의 등장으로 그를 곤란하게 만든 것만 같아 수희는 망설여졌다.
승조와 함께 카페를 나가는 것이 옳은 일인지 판단하고 있을 때였다.
“아까 충분히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여전히 수희의 손을 잡은 채 승조가 나영에게 말했다.
“HARI와는 제가 직접 소통하지 않겠다고요.”
“지금 HARI를 론칭 못 한다고 해도 상관없다는 건가요?”
절박해 보이는 나영과는 달리 승조는 느긋하기까지 했다.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계약을 파기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 상관없습니다.”
“…….”
“위약금은 물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하도록 하죠.”
나영이 붙잡을 틈도 없이 승조가 수희를 데리고 카페를 벗어났다.
홀로 남은 나영은 유유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두 사람을 넋 놓고 바라봤다.
은채는 분명 두 사람의 관계가 일반적이지 않다고 했다.
한데 계약에 얽혀 있는 것치고는 수희는 자신에게 질투를 느끼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승조와 자신을 따라 호텔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저게 다 연기라는 거야?”
늘 감정 없이 자신을 바라보던 승조였다.
그런데 수희를 향한 승조의 눈길은 사랑에 푹 젖어 있는 듯했다.
은채의 말이 어쩌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처음으로 들었다.
****
승조의 뒤를 졸졸 따라 나오긴 했지만, 카페에 혼자 남은 나영이 마음에 걸렸다.
“정말 이대로 가도 되는 거야?”
“왜 안 돼. 내가 가겠다는데.”
승조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수희가 걱정스레 호텔 입구를 바라봤다.
“박나영 씨가 그랬잖아. FL 패션몰이랑 론칭 않겠다고.”
“그게 박나영 씨 뜻이라면 그렇게 되겠지.”
“잡지 않아도 되는 거야? 오빠한테 중요한 사람 아니야?”
HARI와의 컬래버레이션은 FL 패션몰에서 가장 큰 이벤트였다.
하나 승조에게는 제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게 있었다.
“박나영 씨와의 일에는 충분히 차선책을 둘 수 있어.”
“…….”
“그런데 네가 내 차선책이 되면 안 되지. 난 네가 우선이야.”
유유히 물결치는 파도의 표면처럼 수희의 마음이 잔잔하게 일렁거렸다.
그가 다시 나영에게 가야 한다고 한다면 보내 줄 수는 있었다.
하나 마음 한편으로는 그가 자신을 떠나가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누군가와 나누고 싶지 않은 건 당연했다.
“그렇게 말해 주면…… 내가 엄청 고맙잖아.”
“고마워 안 해도 되는 거야. 당연한 거니까.”
자신을 향한 승조의 마음이 돌을 가득 채워 넣은 벽처럼 견고하다는 건 이미 봐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편에 불안이 찾아왔다.
이대로 쉽게 두 사람의 관계가 끊어질 것 같지 않아서였다.
수희는 자신을 물들이는 불안감을 애써 지워 내며 물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오빠 지켜보고 있던 거.”
“호텔 기둥 뒤에 숨어 있을 때부터.”
“처음부터잖아.”
알아볼 수 없도록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었지만 승조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호텔 밖에서 급하게 숨는 수희를 보고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었다.
그러다 확신을 한 건 8층으로 올라가기 전,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거울처럼 광이 도는 금색 엘리베이터 문에 수희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최대한 못 본 척해 주고 싶었지만, 모를 수가 없었어.”
“따라온 거 미안해. 미행까지 하려던 의도는 없었어.”
극구 부인해 보지만 승조가 서운함을 느낀다면 자신의 탓이 틀림없었다.
승조를 바라보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수그리는데 그의 음성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기분 나쁘지 않았어. 오히려 귀여웠지.”
자신의 눈을 피해 로비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것도, 카페에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소곤거리던 것도, 승조의 눈에는 전부 사랑스럽기만 했다.
“뭐가 그렇게 귀여웠는데?”
첩보 영화를 찍는 것처럼 수희에게는 긴박감 넘치기만 했다.
“비밀이야.”
“흠.”
수희가 더 알려 달라고 하더라도 그는 알려 줄 것 같지 않았다.
이대로 이야기가 끝난 줄 알았는데 승조가 왠지 기대감에 부푼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한테 할 말이 더 있지 않아?”
“더?”
곰곰이 떠올려 보지만 별달리 할 말은 없었기에 수희가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자비로운 승조가 수희에게 힌트를 줬다.
“아주 크게 이야기하던데.”
“…….”
“사랑한다고.”
그 힌트가 답을 전부 주는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수희의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승조에게 늦지 않게 사랑한다고 말해 주려 했다.
분명 소중한 순간의 정점에 섰을 때 이야기하려 했건만 이렇게 폭탄처럼 터트리게 될 줄이야.
“난 낭만적인 분위기에서 말하고 싶었어. 잊어 줘.”
“난 아주 좋았는데?”
“좋았다고?”
“네가 사랑한다고 하는데, 장소가 뭐가 중요해.”
수희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억지로 하게 할 수는 없는 말이니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수희가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주길 말이다.
어찌 보면 그저 말의 형태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그 말이 너무나 듣고 싶었다.
“그냥, 자주 말해 줘. 내가 알 수 있게.”
승조가 팔을 뻗자 수희가 그에게 다가가 안겼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대자 종일 긴장하고 있던 몸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으려는데, 귓가에 승조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저번에 소원 들어준다고 했던 거 기억하지.”
기억을 더듬지 않아도 승조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교통사고가 일어난 뒤, 구급차에서 의식을 잃는 승조에게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었다.
“그랬었나?”
어물쩍 넘어가려고 했지만, 승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정확히 이렇게 말했었지. ‘오빠가 잘 버티기만 하면 내가 소원 들어줄게요.’라고.”
놀랍도록 정확한 기억력에 수희의 입술이 스르르 벌어졌다.
“어떻게 내가 한 말까지 기억해요?”
“지금처럼 네가 나 몰라라 하면 안 되니까.”
승조가 정확히 기억까지 하고 있으니 소원 하나쯤이야 들어주자 싶었다.
소원이라고 해도 뽀뽀해 주기, 사랑한다고 말해 주기처럼 간단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승조를 몰라서 한 생각이었다.
한승조는 그렇게 쉽게 소원권을 쓸 사람이 아니었다.
“같이 살자.”
끔뻑.
순진한 눈을 한 수희가 눈꺼풀만 감았다 떴다.
“응?”
“나랑 같이 살자.”
제대로 가닿지 않아 보이니 그가 다시 말을 전했다.
어렵지 않은 말인데도 불구하고 수희의 입 밖으로 뜨문뜨문 나오는 건 빈 공기밖에 없었다.
예전에도 그가 함께 살자고는 했지만, 이번에는 좀 더 다른 느낌이었다.
이미 함께 살 결심을 내린 건지, 수희의 동의만 기다리는 것 같았다.
“진심이야? 나랑 같이 살자고?”
“이보다 더 진심이었던 적은 없어.”
수희와 떨어져 있는 일주일의 시간이 승조에게는 길었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데도 승조의 머릿속에서는 수희가 떠나질 않았다.
“내 하루에 단 한 시간이라도 네가 있었으면 좋겠어.”
“…….”
“네가 없는 내 하루가 너무 아까우니까.”
간절하게 흘려보내는 그의 말은 따스한 햇볕을 닮아 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늘 사랑받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고, 얼마나 그에게 중요한 사람인지 알게 해 줬다.
“……감동받게 하는 작전이야?”
이런 사람 곁에 오래 남고 싶은 건 당연한 것이다.
“왜? 성공했어?”
“그 간절한 소원 내가 들어줄게.”
“영광이야.”
천천히 들어 올리는 그의 입매에 수희도 따라서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와의 설레는 동거가 수희의 앞에 곧 펼쳐지려 했다.
***
그날 이후 승조는 새집을 구하자고 했지만 수희는 더 좋은 방안이 떠올랐다.
승조의 펜트하우스가 있는데 굳이 두 사람이 집을 옮길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주말이 지나고 스케줄이 비는 평일에 이사하기로 했다.
한 건물 앞에 차를 세운 승조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오늘 아버님이랑 점심 먹기로 했죠? 맛있게 먹어요. 난 이제 비행기 타려고요.]
패션 위크에 초대받은 수희가 잠시 틈이 났을 때 메시지를 보내 놓은 듯했다.
[파리 도착하면 연락해. 비행기에서 푹 쉬어.]
바로 답장을 보낸 승조가 차에서 내려 발레파킹 직원에게 열쇠를 건네줬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중심에는 커다란 연못이 자리 잡고 있었다.
승조를 기다리고 있던 기모노를 입은 직원이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세요.”
숙였던 상체를 곧게 세운 직원이 앞서 걸으며 예약된 방으로 안내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화재 사고 이후 실로 오랜만에 병호를 마주하게 되었다.
사적인 이야기를 하며 함께 식사를 할 만큼 부자 사이가 원만해진 건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병호가 먼저 연락을 해 와 식사 자리를 만들었다.
원래라면 일 핑계를 대며 만남을 피했겠지만, HARI의 론칭이 물 건너갔으니 진행 상황을 전하기 위해 식사 자리에 나왔다.
직원이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 툇마루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 방입니다.”
분명 점심은 병호와 단둘이 먹는 줄 알았는데, 안에서는 다른 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이상한 걸 직감한 것과 동시에 직원이 미닫이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하얀 술잔을 들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 병호였다.
그리고 그 앞엔 불과 며칠 전에 자신과 호텔 커피숍에서 미팅했던 나영이 앉아 있었다.
“승조 씨도 오는 거였어요?”
예기치 못한 승조의 등장에 나영은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한 회장님 아들이 한 인물 한다더니, 역시 소문이 사실이었네요.”
병호는 나영의 옆에 앉아 있는 중년 남자를 손을 눕혀 가리켰다.
“여긴 박명길 의원님. 인사드려라.”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싶더니, 오랫동안 국회의원으로 있던 박명길이었다.
“이번에 종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시는데 우리도 힘을 실어 드려야지.”
역시나 제 아버지는 목적 없이 점심을 먹자고 할 사람이 아니었다.
부자 사이에 관심이 있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단순히 박명길 의원에게 FL 그룹이 간판처럼 내세우고 있는 자신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어서 앉지 않고 뭐 해.”
아버지가 자신을 자식이 아닌 수단으로밖에 이용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닥까지 드러난 기대감이 긁어도 긁어도 남아 있는 건지 실망감이라는 게 들었다.
병호의 옆에 앉아 장단까지 맞춰 줄 마음은 없기에 승조는 돌아서려 했다.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툇마루에 발도 들이지 않은 승조를 보고 병호가 벌떡 일어서 다가왔다.
“이 아버지 체면을 망가트릴 셈이야?”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영과 명길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역정을 냈다.
“저 때문에 그런가 봐요.”
조심스럽게 나영이 끼어들자 병호와 승조의 시선이 돌아갔다.
나영은 말을 꺼내긴 했지만 망설여지는 건지 머뭇대다가 옆에 앉아 있는 명길의 눈치를 봤다.
“제가 얼마 전에 승조 씨한테 고백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