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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다른 이의 불행은 나의 행복 (91/118)


91. 다른 이의 불행은 나의 행복
2022.12.13.



“제가 얼마 전에 승조 씨한테 고백했거든요.”

나영의 폭탄선언에 룸 안이 침묵으로 잠겼다.

어느 아버지가 자신의 딸이 고백했다는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인자하던 눈길은 어디 가고 명길의 두 눈이 적대심으로 뒤덮였다.

반면 명길과 달리 병호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저토록 즐거워하는 아버지의 얼굴은 태어나 처음 보는 듯했다.


“아무리 바쁜 일이라지만 잠깐 앉아서 이야기할 시간 정도는 있겠죠?”

자신의 딸이 고백한 이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싶은 건지 명길까지 합세했다.

수희가 알게 된다면 분명 달가워하지 않을 상황이라는 걸 알기에 피하려 했다.

하지만 도저히 자리를 뜰 수 없는 분위기에 승조가 구두를 벗고 툇마루에 섰다.

그제야 병호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들어 볼까.”

병호가 자리로 가 앉은 뒤 승조에게 제 옆에 앉으라 눈짓했다.

룸 안에 발을 들여놓고 싶지도 않았지만, 안에 있는 세 사람 모두 승조만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병호의 옆자리를 채우고 나서야 분위기는 다시금 화기애애해졌다.


“나영 씨가 우리 승조한테 고백을 했다고?”

이야기를 잇는 병호의 물음에 나영이 승조를 눈으로 흘기며 볼에 홍조를 띠었다.


“고백해야 후회도 없을 것 같아서 확 질러 버렸어요. 보기 좋게 차이긴 했지만요.”

“우리 애가 어려서부터 숫기가 없어요. 틀림없이 승조도 나영 씨를 마음에 들어 할 거야.”

승조가 거들어 주길 바라며 병호가 어깨를 툭툭 내려쳤다.

하나 승조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생각인 건지 입술을 붙이고 앉아 있었다.

못마땅하게 승조를 가자미눈으로 훑어 내리는 병호에게 명길이 말을 건네 왔다.


“그런데 한 회장님 아드님께서는 따로 만나는 사람이 있는 걸로 아는데요.”

“있습니다. 아직도 잘 만나고 있고요.”

이때까지 침묵을 유지하던 승조가 곧장 말을 꺼내자 병호가 얼른 끼어들었다.


“헤어질 겁니다. 우리와는 급이 전혀 맞지 않아서 제가 교제를 허락하지도 않았고요.”

늘 이런 식이었기에 승조는 놀랍지도 않았다.


“우리한테 급이 따로 있습니까?”

파고들어 오는 승조의 물음에 구겨지는 눈가를 겨우 편 병호가 답했다.


“FL 그룹이야. 내가 배우 며느리나 보려고 회사를 그렇게 열심히 키웠겠어?”

병호는 명길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박 의원님.”

“그 친구 부모는 무슨 일을 한답니까. 자고로 며느리 될 사람의 집안도 중요한 법이죠.”

“알아보니 그 아이 어머니는 얼마 전에.”

쾅!

룸 안이 쩌렁대게 공명하는 소리에 승조를 제외한 세 사람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승조는 손아귀에 억세게 쥐고 있던 도자기 잔을 내려놓으며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손이 미끄러졌네요.”

 

 
반듯했던 입매는 올라가 있었지만, 먹색 눈동자에는 서슬 퍼런 기운이 스쳤다.

자잘한 미소조차 완전히 지워 낸 승조가 입고 있던 재킷의 단추를 여몄다.


“아무래도 회사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어서 앉지 않고 뭐 해.”

승조가 허락도 없이 자리를 뜨자, 목에 핏대를 세운 병호가 엄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명길에게 묵례한 승조는 그대로 미닫이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승조가 떠난 룸엔 굵은 눈발이 날릴 것처럼 차디찬 기운만 감돌았다.


“크흠.”

영 탐탁지 않은 승조의 태도에 명길이 목을 가다듬으며 술잔을 들었다.


“저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나영은 승조가 나간 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더니 말릴 틈도 없이 룸을 나가 버렸다.

막 식당 복도를 빠져나가려는 승조를 보고 나영이 얼른 따라붙었다.

승조가 복도의 모퉁이를 돌자 마음이 급해진 나영이 손을 뻗었다.


“승조 씨.”

나영이 승조의 재킷 끝자락을 붙잡고 나서야 그가 멈춰 섰다.

가늘어지는 승조의 눈이 나영이 잡은 옷 끄트머리를 향하자 그녀는 얼른 손을 떼어 냈다.


“저 때문에 불편하시다면 제가 갈게요.”

“박나영 씨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요? 왜 자리를 피하시는 거예요?”

“저 자리에 있어 봤자 썩 유쾌한 말들이 오가지 않을 걸 아니까요.”

잠시 곰곰이 생각해 보던 나영이 본인이 짐작한 이유를 꺼냈다.


“오수희 씨 때문인가 보네요.”

병호의 입에서 수희가 오르내리는 걸 원치 않았다.

자신만의 기준으로 수희를 평가하고 폄하하는 걸 듣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명길이 있으니 최대한 아버지의 위신만은 지켜 주기 위해 자리를 피한 것이다.


“상관없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승조가 돌아서려는데 나영이 발길을 붙잡았다.


“한 회장님 말씀 틀린 거 아니잖아요.”

“…….”

“한 회장님 입장에서나, FL 그룹을 위해서나, 배우 며느리보다는 국회의원 딸이 낫잖아요.”

어디 하나 틀린 말이 없었기에 나영은 병호를 거들고 싶었다.

승조를 설득시키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그의 미간 사이에 구김이 잡혔다.


“박나영 씨가 내세울 건 겨우 아버지밖에 없다는 말로 들리네요.”

“그게 잘못된 건가요? 제가 아빠 딸이고, 제가 국회의원 딸인 건 변함없는데.”

저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 수희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말을 섞어 봤자 시간 낭비인 건 나영도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만 해도 될 것 같네요. 박나영 씨와 더 말한다고 한들 달라질 건 없으니까.”

“저한테 그렇게 쌀쌀맞게 안 굴어도 돼요. 다 알고 있으니까.”

손바닥을 제 가슴 위에 얹은 나영이 간절하게 호소했다.


“두 사람 어차피 계약 때문에 만나는 척 연기하는 거잖아요.”

결국 나영은 참지 못하고 터트리고 말았다.

자신을 매몰차게 대하는 승조를 보니 혹시나 계약 때문인가 싶어서였다.

승조는 어째서 나영이 계약 문제를 알고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모든 증거는 자신의 손으로 없앴고, 물증 없이 하는 말에 반응할 만큼 단순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내가 장단 맞춰 줘야 합니까?”

“그렇게 시치미 뗄 거 없잖아요. 제가 어디 가서 말할 만한 사람도 아닌데.”

서운하다는 티를 팍팍 내는 나영에게 도리어 싸늘한 대답만 돌아왔다.


“박나영 씨는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네요.”

제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부류라.

지독하리만큼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병호만으로도 충분했다.

승조가 몸을 돌리기 전이었다. 모퉁이 뒤에서 내내 서 있던 사람이 어두운 얼굴로 나타났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등 뒤에서 들려오는 갑작스러운 호통 소리에 나영이 화들짝 놀라며 옆으로 비켜섰다.

나영을 지나쳐 승조의 앞에 선 병호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을 올렸다.


“지금 내가 들은 게 전부 사실이야? 둘이 만나는 척 연기하고 있었던 거냐?”

자신을 기만했다는 사실에 병호는 분개하는 듯했다.

이런 상황을 예상한 건 아니었지만, 병호가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박나영 씨가 잘못 알고 하는 말 같네요.”

병호가 나영에게 고개를 돌리자, 나영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승조의 앞에서 병호의 편을 들었다가는 미움받을까 싶어서였다.


“차라리 잘됐다. 지금이라도 다 정리해. 너한테 더 어울리는 사람 소개해 줄 테니까.”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울리는 사람요.”

“…….”

“그래서 아버지가 고른 어머니가 도망간 겁니까?”

폭격과도 같은 승조의 발언에 병호는 가장 먼저 나영의 눈치를 살폈다.


“못난 놈!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식당에서 큰소리 내면 더 많은 사람이 나와 볼 겁니다.”

흥분이 인 병호와 달리 승조는 더없이 차분했다.


“못난 아들이 어떤 말을 하는지 들어도 상관없습니까?”

비로소 병호의 입이 다물어지자, 승조는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


“다음부터는 이런 자리 초대 안 해 주셔도 됩니다.”

“…….”

“아니, 아버지와 밥을 먹는 일은 없을 겁니다.”

병호가 목구멍에 가득 찬 말들을 뱉어 내기도 전에 승조가 식당을 빠져나갔다.

두 손을 몸 중앙에 모은 나영이 병호를 향해 허리를 푹 수그렸다.


“저 때문에 두 분이 싸우신 것 같아서 죄송해요.”

일그러트렸던 표정을 갈무리한 병호는 세상 다정하게 굴었다.


“나영 씨 잘못이 아니에요. 오냐오냐 키운 내 문제지.”

“하나뿐인 아들이니까 당연해요.”

“어릴 때부터 부족함 없이 자랐으니 저렇게 드세게 구는 거지.”

나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승조가 나간 식당 문을 한참 바라보던 병호가 상냥한 말씨로 간청했다.


“나영 씨한테 우리 승조를 부탁하고 싶은데.”

머뭇거리던 나영은 확고한 부정의 의사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승조 씨한테는 수희 씨가 있는걸요.”

“그 배우라면 신경 쓸 거 없어요.”

“…….”

“내가 알아서 해 줄 테니까, 적당한 때 봐서 승조한테 가면 돼요.”

적당히 즐기다 헤어질 것 같아 내버려 둔 거였는데, 이대로 가다간 정말 결혼까지 할 것 같았다.

그 어리고 작은 계집 하나가 집안의 물을 흐리게 둘 수는 없었다.


“수희 씨가 아버님께서 헤어지라고 한다고 헤어질까요?”

어느새 나영의 호칭이 ‘한 회장님’에서 ‘아버님’으로 바뀌었다.

병호는 싫지 않은 건지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떼어 낼 방법이야 수도 없이 많았다.

말로 겁을 줘 봐야 쉽게 FL 그룹을 후계자를 놓아줄 리 없다고 판단했다.


“내 사전에 경고 같은 건 없어요. 바로 행동으로 보여 줄 뿐이지.”

나영은 어쩐지 수희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가짜 연애든, 진짜 연애든 병호가 수희에게 엄청난 일을 벌일 것 같아서였다.

돈과 권력을 다 가진 FL 그룹 회장이 못 할 짓은 없을 것이다.


‘딱해라.’

하지만 그 마음도 아주 잠깐뿐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다른 사람의 불행보다 자신의 행복이 우선이었다.

***

회사로 돌아온 승조는 소파에 앉아 메시지에 답이 없는 휴대폰을 바라봤다.

인천에서 파리까지 열두 시간은 꼬박 넘게 걸리니 아직 수희는 하늘 위일 것이다.


“하아.”

깊은 한숨을 털어 내며 목을 옥죄고 있는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수희와 계약 관계였다는 걸 병호가 알게 되었다. 그러나 물증은 어디에도 없으니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과거의 시작이 어찌 됐건 지금은 수희와 진지한 관계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병호가 가타부타 말을 얹으며 헤어지라 한다고 하더라도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걱정이 되는 건 이대로 병호가 가만히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였다.

지금까지 병호는 단 한 번도 수희에게 위협을 주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드라마에서 봤던 것처럼 돈다발을 던지는 일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영이 나타난 지금은 흐름이 조금 달라진 듯 보였다. 왜인지 이대로 병호가 물러서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병호의 간섭과 협박이 있다 한들 수희와의 견고한 관계가 틀어질 리는 없었다.

……그런데 자꾸만 마음이 불안해지는 건 단순히 기분 탓인 걸까.

***

승조 없이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온 병호가 건물 앞에 세워진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차가 출발하기도 전에 운전석에 앉아 있는 자신의 비서에게 말했다.


“양 실장, 승조 녀석이 만나는 여자애 알고 있지. 오수희라고 했나.”

“오수희 씨는 왜…….”

룸미러로 양 실장이 뒤에 앉은 병호의 얼굴을 살폈다.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는 병호의 눈에서는 결의가 느껴졌다.


“그 애 최측근들 개인 정보 전부 빼 와서 나한테 가져다줘.”

사람을 건들 땐 그 당사자가 아닌 가장 가까운 사람을 건드려야 한다.

사람은 자신이 상처받고 아픈 것은 버텨 낼 수 있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결국 백기를 들기 마련이다.

그러니 칼을 뽑았다면 그 사람의 숨통이 아니라 그 사람의 뒤에 숨은 사람을 찔러야 한다.

사흘, 병호는 수희가 견뎌 낼 수 있는 기간을 사흘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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