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토끼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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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토끼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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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토끼몰이
2022.12.17.
파리에 발을 딛자마자 수희는 곧바로 패션 위크에 참석하기 위해 차에 올라탔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는 스타일리스트의 손길이 이어지니 승조에게 연락할 틈이 없었다.
핸드백 안에 있는 휴대폰을 꺼낼 틈도 없이 수희는 패션 위크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쉼 없이 터지는 플래시 세례가 이어졌다.
익숙하게 자신을 보러 나온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수희는 철용과 경호원이 터 주는 길을 걸어갔다.
패션쇼가 펼쳐지는 건물 안으로 들어간 수희는 현장에 있는 스태프의 안내를 받아 움직였다.
런웨이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자리로 지정받은 수희가 막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누나.”
너무나 반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준영이 보였다.
마침 스태프가 준영의 자리를 수희의 옆으로 지정해 주자 준영이 밝게 웃으며 다가왔다.
“드라마 끝나고 한동안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더 자주 보는 것 같아요.”
지정된 자리에 앉은 준영은 유독 즐거워 보였다.
“준영이 너도 초대받았나 보네?”
“작년에는 군 복무 중이라 못 왔거든요. 올해는 꼭 오고 싶었어요.”
바쁜 일정에 패션 위크를 끼워 넣은 건 수희가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기작을 물색 중인 준영은 촬영 전에라도 최대한 수희의 얼굴을 많이 봐 두고 싶었다.
본격적으로 차기작 촬영에 들어가게 된다면 수희와 전처럼은 만나지 못하게 되니, 그게 아쉬웠다.
“그건 그렇고 한 대표님이랑은 잘 이야기했어요?”
“어떤 거?”
아직 쇼가 시작되기 전이라 주위가 어수선했지만, 준영은 주변을 의식하며 목소리를 줄였다.
“박나영 씨에 대해서요. 그날 엄청 신경 썼었잖아요.”
잠시 잊고 있었던 나영의 이야기에 수희가 어색하게 입술 끝을 들어 올렸다.
“그게 있지.”
자신이 은채의 말만 듣고 호텔로 간 것부터 해서, 후에는 승조에게 들켜 호텔을 나온 것까지.
구구절절이 설명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벌어진 일에 대해 전부 털어놓게 됐다.
“오빠가 신경 많이 써 줘서 이제 괜찮아.”
“그럼 이제 나영 씨랑 한 대표님이랑 만날 일이 없다는 거네요.”
“응. 다행이지? 이제 불안한 일은 생기지도 않을 거라는 뜻이니까.”
한결 나아진 수희의 표정을 보자 준영 역시 걱정을 한시름 덜어 놓았다.
그날 분식집에서 헤어질 때까지 수희의 표정이 좋지 않아 마음이 쓰였던 터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를 보니 모든 게 잘 해결됐다 싶었다.
“원래 나쁜 일은 한 번에 오는 거잖아요. 이제 좋은 일이 올 차례예요.”
“정말 그럴까?”
애란의 죽음, 그로 인한 트라우마, 승만의 배신, 나영의 등장까지.
매번 살얼음판을 걷듯 했으니, 이제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럼요. 이제 꽃길만 걸어야죠.”
그 길엔 자신이 아닌 승조와 함께겠지만, 준영은 이제 두 사람을 응원해 주려 했다.
“꽃길 말고, 그냥 평범한 길. 그거 걷고 싶어.”
다른 사람들처럼 가족과 함께 웃고 행복한 일상을 그리는, 그런 평범한 길 말이야.
***
패션쇼가 끝이 나고 수희가 미리 준비되어 있던 차에 올라탔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뒷좌석에서 안전띠를 맨 수희는 운전석에 앉아 목청을 올리는 철용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철용이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휴대폰을 붙들고 있었다.
“사장님,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가 있을 거잖아요. 이유라도 말씀해 주셔야죠.”
답답하다는 듯 묻는 말에도 최 사장에게선 영 석연치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뇨. 제가 잘리는 이유를 아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거예요?”
잘리다니, 누가.
두 눈이 동그래진 수희는 서둘러 철용에게 묻고 싶었지만, 최 사장과 철용이 맹렬히 부딪치는 상황이라 차마 그러지 못했다.
“사장님, 저 나이도 있어서 바로 직장 들어가기 어려운 것도 아시잖아요. 저 지금 잘리면 당장 어머니 병원비는 어떻게 해요. 제발 다시 한번 생각해 주세요. 예? 사장님!”
간절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한 철용의 발악에 수희까지 마음 졸였다.
[퇴직금 있잖아. 일단 그걸로 어머님 병원비는 내고 있어.]
“사장님, 저 퇴직금 어머니 수술비로 당겨 받았어요. 그래서 더 못 그만두는 거예요.”
[나 회의 가 봐야 해서 끊어야겠다.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철용아.]
최 사장이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 건지 철용이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제가 이 회사에서 일한 게 6년이에요. 어떻게 전화 한 통으로 절 자르실 수가 있어요. 말씀 좀 해 보세요.”
[그러니까,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끊을게.]
“사장님. 최 사장님!”
목 놓아 최 사장을 불러 보지만 이미 전화는 끊어진 뒤였다.
다시 통화를 연결해 봤지만 최 사장의 휴대폰은 아예 꺼져 있었다.
핸들을 붙들고 한숨을 푹 내쉬던 철용은 룸미러로 수희와 눈이 마주쳤다.
수희가 차에 올라타는 것도 모르고 있던 철용이 상체를 뒤로 돌렸다.
“쇼는 잘 보고 왔어?”
속상한 티를 수희에게 내고 싶지 않았던 건지, 풀 죽어 있던 철용이 애써 웃어 보였다.
“오빠, 무슨 이야기야. 오빠가 잘리다니.”
억지로 들어 올리던 입가가 아래로 축 내려앉았다.
큰 덩치에 맞지 않게 눈물이 많은 철용은 역시나 작은 눈매에 금방 눈물을 매달았다.
“수희 너는 알고 있었어? 최 사장님이 네 전담 매니저 바꿀 거라고 하더라.”
“뭐?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들은 적 없어.”
“나보고 오늘 일 끝나면 회사 안 나와도 된대. 내일부로 바로 매니저 교체된다고 하더라.”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지. 오빠 따라서 내가 기획사를 옮겼는데, 오빠를 자르다니.”
최 사장의 밑으로 들어온 건 철용이 먼저였다. 오랫동안 믿고 의지한 철용을 따라 수희가 6년 전에 최 사장의 기획사에 둥지를 틀었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철용의 연봉 인상을 조건으로 수희의 계약까지 갱신했다.
6년 동안 함께한 최 사장이 자신의 뒤통수를 쳤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수희는 핸드백 안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내 최 사장에게 전화를 걸려 했다.
“수희야, 전화 안 해도 돼.”
“내가 말할게. 오빠 아니면 나 일정 다 무시할 거라고.”
“전화 지금 꺼져 있어. 네 전화든, 내 전화든 다 피할 거야.”
이미 단념한 철용은 최 사장을 향한 분노가 날아가 버렸다.
철용의 말에도 수희가 포기하지 않고 최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봤지만 정말로 휴대폰이 꺼져 있었다.
“어차피 오늘 저녁에 출국할 거잖아. 한국 도착하면 같이 최 사장님한테 가자.”
“같이 가 주는 거야?”
“당연하잖아! 오빠를 자른다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
애란의 일로 절망에 빠져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을 때, 철용만이 수희를 챙겼다.
매일같이 연락해 수희의 상태를 확인했고, 문 앞에는 매일같이 그날 먹을 식사 거리를 놔뒀다.
친오빠보다 더 친오빠처럼 수희를 돌보고 살폈다.
최 사장에게 셔터를 내리겠다고 공표해서라도 철용을 사수할 생각이었다.
***
철용과의 통화를 끝낸 최 사장이 가슴 절절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해고한다, 한 마디면 되는데. 구구절절 참 말도 많으십니다.”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자신의 감정에 푹 빠져 있던 최 사장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최 사장의 옆에 놓인 기다란 소파의 중심에는 병호가 앉아 찻잔을 들고 있었다.
“이제 됐습니까?”
최 사장이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병호에게 불만이 가득한 어투로 물었다.
“그래도 역시 엔터테인먼트 사장이라 그런지 연기도 잘하네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은 병호가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 두었다.
“다짜고짜 철용이를 자르라는 이유가 뭡니까.”
“최 사장이 그런 것까지 알 필요 없어요.”
“제 수족 같은 친구였습니다.”
“그 수족을 직접 잘라 낸 게, 최 사장의 입이죠.”
발끈한 최 사장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한 회장님께서 FL 그룹과 계약 중인 우리 애들 광고를 전부 다 내린다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자른 거지 않습니까.”
“대신 자르면 FL 그룹과 더 많은 계약을 딸 수 있게 해 준다고 했고요.”
“그……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최 사장의 입이 변명도 하지 못한 채 붙어 버렸다.
“우리 둘 다 서로의 이득을 위해 한 일이에요. 그게 꼭 나쁜 건 아니죠.”
할 말을 끝낸 병호가 무릎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혹시…… 수희 때문에 이러시는 겁니까?”
“그 아이한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
“사장 명패 들고 여기서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조금의 강조도 들어가지 않은 말이 최 사장의 가슴에 얼음송곳처럼 박혔다.
최 사장이 수희에게 떠벌려 놓기 전에 병호가 직접 알려 줄 생각이었다.
내가 네 주변을 아주 잘근잘근 짓밟아 놓았다고.
양 실장이 사장실 문을 열어 주자 병호가 밖으로 몸을 빼냈다.
걸음을 옮기는 병호의 옆에 바짝 붙어 선 양 실장이 조용히 전했다.
“오수희 씨 인천 국제공항에 내일 4시 20분 도착 예정이라고 합니다.”
“내일 오후 일정 비워 둬.”
“네, 알겠습니다.”
토끼몰이를 끝냈으니 이제 숨통을 끊어 놓을 때였다.
“귀한 걸음 직접 옮겨 줘야겠어.”
내일이 그 아이를 보는 마지막 날일지도 모르니까.
***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한 수희는 한숨도 자지 못한 듯 보이는 철용을 다독였다.
“오빠, 오늘 가서 최 사장님이랑 이야기하면 다 잘될 거야.”
“그럴까? 정말?”
잡히지 않는 빛을 쫓는 것처럼 철용은 이미 지친 듯했다.
“그럼. 오빠한테는 내가 있잖아.”
“맞아. 든든한 지원군이 있지.”
힘겹게 입술 끝을 들어 올린 철용이 멀리서 보이는 밴을 발견하곤 수희의 캐리어를 챙겼다.
밴이 출구 게이트 앞에 멈춰 서자 철용이 트렁크에 캐리어를 실었다.
수희가 문이 열린 밴에 올라타려던 순간이었다.
간발의 차이로 수희의 앞에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세워졌다.
운전석에서 내린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소리 없이 수희의 옆으로 다가왔다.
“한 회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같이 가시죠.”
낯선 남자를 눈으로 훑어 내린 수희가 반걸음 물러섰다.
“한 회장님이라면…… 한병호 회장님요?”
“네, 맞습니다.”
수희가 밴 앞에 세워진 세단으로 눈길을 돌렸다.
승조가 병원에서 퇴원하고 난 이후로 자신과 만나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병호는 꽤 오랫동안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병호가 승조와의 연애에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아 그동안 안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오히려 지금을 위해 그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아뇨. 지금은 뵙지 않을게요. 다음에 승조 씨랑 둘이서 뵈러 가겠습니다.”
혼자서는 병호를 마주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기 어려웠지만, 분명 좋지 않은 일일 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따라오시지 않으면 더욱 곤란해지실 겁니다.”
타이르는 말투가 아니었다.
강요에 가까웠다.
“제게 한 회장님을 지금 봐야 하는 의무가 있나요?”
“의무는 없습니다.”
의무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수희는 쉽사리 돌아설 수가 없었다.
이대로 외면해 버리면 더 큰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대신 다른 사람들이 더 다치겠죠.”
“다른…… 사람이라뇨?”
“오수희 씨가 아끼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될 수 있겠죠.”
“…….”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강철용 씨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