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내 보물, 내 하나뿐인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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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내 보물, 내 하나뿐인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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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내 보물, 내 하나뿐인 동생
2022.12.20.
“오수희 씨가 아끼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될 수 있겠죠.”
“…….”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강철용 씨처럼요.”
오랫동안 최 사장과 일해 온 철용의 해고가 너무나 갑작스럽다 했다.
이 모든 건 전부 병호가 계획하고 실행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자신이 틀림없었다.
“저 지금 잘리면 당장 어머니 병원비는 어떻게 해요.”
철용이 가장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 역시 자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만나자고 찾아온 건 다른 목적이 있어서일 수도 있었다.
단둘이 보게 된다면 냉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할 것 같아 수희는 승조를 부르려 했다.
“회장님께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 타신다고 전할까요?”
양 실장이 부러 재촉하자 휴대폰을 찾으려는 손이 멈칫했다.
캐리어를 밴에 실은 철용이 다가와 양 실장의 얼굴을 살폈다.
“누구세요?”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양 실장이 수상해 보였던 건지 철용이 수희의 앞을 막아서려 했다.
그러자 양 실장은 철용에게 제 소개라도 할 건지 재킷 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들려 했다.
두 사람이 통성명하기 전에 수희가 양 실장 앞을 가로막았다.
“오빠, 나 급한 일이 생겨서 가 봐야 할 것 같아.”
“갑자기? 무슨 일인데.”
“나중에 설명해 줄게.”
지금은 당장 둘러댈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양 실장이 재킷 안에 도로 명함을 끼워 넣자 수희가 돌아서 밴 앞에 세워진 차로 향했다.
몇 걸음 채 떼지도 못하고 수희가 철용에게 다시 돌아왔다.
“오빠, 최 사장님한테는 내가 나중에 가 볼게. 걱정하지 말고 집에 가 있어.”
혹여 철용이 불안해할까 봐 안심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철용은 감정 없는 사람처럼 내내 무표정하기만 한 양 실장과 함께 수희를 보내는 게 영 석연치 않았다.
그러나 수희가 어린애도 아니고, 위험했다면 직접 알렸을 테니 붙잡을 이유가 없었다.
“알겠어. 가 봐.”
“응.”
고개를 주억거린 수희가 다시금 발길을 돌리자 양 실장이 뒤따랐다.
조수석 문을 열자 뒷자리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한병호가 보였다.
검은색 차체 안에 앉은 병호를 보자마자 숨이 턱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철용이 아직도 뚫어져라 보고 있었기에 수희가 지체할 틈도 없이 안으로 몸을 실었다.
수희가 조수석 문을 닫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양 실장이 차를 출발시켰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살가운 인사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을 줄은 몰랐다.
차가 인천 국제공항을 빠져나갔는데도 병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적을 참기 힘들었던 수희가 용기를 내 말을 꺼냈다.
“아버님께서 절 보자고 하셨다고 하던데.”
“누가 네 아버님이야.”
병호는 수희의 말꼬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몸통을 단칼에 끊어 놓았다.
가느다란 가시들이 공기 틈에 떠다니는 것처럼 수희는 살갗이 따가웠다.
입이 딱 달라붙어 버린 수희는 단 한 마디도 뗄 수도 없었다.
무슨 말을 하든 병호는 꼬투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Rrrrr―
그때 핸드백 안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이 울리며 조용한 차 안 공기를 어수선하게 흩트려 놓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수희가 조용히 핸드백 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액정 위에 뜬 승조의 이름을 본 건지 병호의 얼굴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전화 꺼라.”
명령조로 날리는 말에 통화 버튼 위에 올려져 있던 수희의 손가락이 방황했다.
“승조 씨한테 온 연락인데. 아버님…… 아니, 한 회장님이랑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젊은 나이에 벌써 가는 귀라도 먹었어?”
“…….”
“전화 꺼.”
끝까지 전화를 끄는지 지켜보고 있으니 수희는 어쩔 수 없이 통화 거절 버튼을 눌렀다.
병호는 수희에게 목적지도 알려 주지 않은 채 어딘가로 데려갔다.
한강을 옆에 끼고 기다란 대로변을 달리던 차가 좁아지는 도로로 들어섰다.
한참을 더 달려 차가 멈춰 선 곳은 높은 대문이 버티고 서 있는 넓은 부지였다.
차가 대문 앞에 서자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닫혀 있던 문이 뒤로 밀려났다.
여기서 멈춰 서나 싶었더니 차가 반듯하게 닦인 길가로 들어섰다.
주변에 세워진 울창한 나무들은 사람의 손에 관리된 듯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숲속에 들어온 것처럼 새들이 나무들 틈을 날아다녔다.
굽이진 도로를 타고 깊이깊이 들어간 뒤, 드디어 차가 멈춰 섰다.
차가 세워지고 나서야 수희는 고고하게 올라선 3층 건물을 바라봤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건물 앞에는 둥근 연못이 분수를 내뿜고 있었다.
오페라 공연장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건물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어디인지 설명도 해 주지 않고 병호는 양 실장이 차 문을 열어 주자 밖으로 내렸다.
창문 밖으로 병호가 계단을 올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혼자 남은 수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앉아 있자, 양 실장이 반대편으로 돌아와 수희 쪽 문을 열어 주었다.
“내리시죠.”
“여기가 어디죠?”
“한 회장님 자택입니다.”
대문을 지나 한참 동안 들어온 이곳이 모두 병호의 사유지였다.
드라마에서 보던 대기업 회장들의 자택이 과장됐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작게 축소된 형태였을 줄이야.
차에서 내린 수희가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간 병호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에 서 있던 관리인 여럿이 한 줄로 서서 병호에게 허리를 숙였다.
뒤이어 수희가 들어설 때까지도 관리인들은 굽힌 상체를 세우지 않았다.
거울처럼 비치는 대리석 바닥은 수희가 신발을 신고 밟는 것조차 망설여질 정도였다.
1층은 로비처럼 쓰는 건지 신발을 갈아 신을 곳조차 없었다.
어느새 입구에서 멀지 않은 응접실로 들어간 병호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응접실 앞에서 망설이던 수희가 숨을 몰아쉬며 안으로 들어갔다.
수희의 등 뒤로 문이 닫히고, 넓은 공간 안에 두 사람만 남게 됐다.
어째서인지 차 안보다 탁 트인 공간인데도 불구하고 발길 하나 옮기는 것조차 주저하게 됐다.
“멀뚱히 서서 뭐 해, 앉지 않고.”
짜증이 가득 섞인 병호의 목소리에 수희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가정부가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와 차를 놓아 주고 사라졌다.
찻잔을 든 병호가 오랜 시간 끝에 수희를 데리고 온 이유를 꺼냈다.
“얼마 전에 승조하고 점심을 먹었었다.”
“승조 씨한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 자리에 나영이가 있었던 것도 알고 있겠구나.”
승조는 병호와 점심을 먹는다고 했지 나영도 함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샤를드골 국제공항에 도착해서 연락했을 때, 나영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점심 식사 자리에 나영도 함께였다면 자신에게 알려 주는 게 맞지 않았을까.
혼란스러운 수희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병호가 바람 빠진 웃음을 터트렸다.
“승조가 말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
“그럴 만도 하지. 서로한테 관심이 많아 보이던데 너한테 직접 말을 할 수는 없었겠지.”
이어지는 말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승조는 분명 HARI와 직접 소통하지 않겠다고 했다.
병호의 말 몇 마디에 휩쓸리고 싶지 않아 수희가 생각을 정리하며 차분히 물었다.
“한 회장님과 세 분이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만나게 된 건가요?”
“그 자리에 나영이 아버지도 있었다. 선 자리 같은 거였지.”
“선 자리……라니.”
“승조가 올해 서른하나야. 늦지 않게 결혼해야지.”
무릎 위에 올려진 수희의 손이 접혔다 펴지길 반복했다.
묻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많았는데 무엇 하나 꺼낼 수가 없었다.
밖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한없이 흔들릴 것만 같아서였다.
동요하지 말자, 모든 건 승조를 만난 뒤에 판단해도 충분하다 여겼다.
“그런 이야기라면, 승조 씨한테 나중에 직접 듣겠습니다.”
수희가 의자에서 일어서려는 순간이었다.
“승조에게 전부 들었다.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나고 있는 거라고.”
나영에게 전해 들은 말이었지만, 병호는 승조에게 들은 것처럼 굴었다.
모두 수희와 승조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그리고 그의 계획대로 수희의 두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승조는 너와 결혼은 할 생각이 없다고 하더구나.”
“…….”
“어쩌다 보니 정이 들어 지금까지 붙어 있는 거겠지.”
병호가 지어낸 거짓말이 수희의 가슴을 깊숙이 찌르고 들어왔다.
홀짝이며 차를 마시던 병호가 잔을 내려놓으며 수희에게 강요했다.
“승조랑 헤어져라. 어차피 결혼하기에는 너와는 급이 맞지 않는 걸 알잖아.”
내내 찻잔에 붙어 있던 시선을 떼어 낸 수희가 병호를 바라봤다.
“사람한테 급을 정할 수 있나요? 전 사람 대 사람으로 승조 씨를 만나고 있어요.”
병호가 검지로 제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네가 그 정도로밖에 생각을 못 하니까.”
소파에 등을 기댄 병호가 이 시간이 지루하다는 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승조와 헤어져. 더 심한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철용 오빠 해고한 거, 한 회장님이 그런 거 맞나요?”
“네 매니저뿐이겠냐? 네 기획사 사장도 마음만 먹으면 자를 수 있어.”
그렇다는 건 최 사장을 만나 철용의 해고를 지시했다는 뜻이었다.
수희가 최 사장을 만나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수희의 눈앞에 한숨도 자지 못하고 마음 앓이 하던 철용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대로 승조와 헤어지지 않으면 병호는 자신의 말대로 최 사장한테까지 손쓸지도 모른다.
잠깐의 정적이 깔리고, 수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헤어지는 건 승조 씨와 제 문제입니다. 승조 씨랑 직접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무슨 말을 듣든 승조에게 들어야 했다.
지금 벌어진 일들은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어 수습할 생각이었다.
“지금 저 문을 열고 나가면 네 동생의 앞길도 막아 달라는 뜻으로 아마.”
“……!”
“오주형. 네가 아끼는 동생 말이다.”
주형의 이름이 나오자 수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발길 하나 떼어 내지 못한 채 수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보물이자, 하나뿐인 동생이었다.
수희가 이 세상에서 승조 다음으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해 줄까. 곧 복학할 학교에서 쫓아내 줄까, 아니면 범죄자로 만들어 줄까.”
모래알이 입 안에 굴러다니는 것처럼 입이 텁텁하기만 했다.
이건 자신이 손쓰고 말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현실감 없는 말들도 아니었다. 제 앞에 있는 사람은 모든 걸 실현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
찻잔을 내려 둔 병호가 자리에서 일어서 수희와 마주 보고 섰다.
“승조 그 녀석이 정 때문에 너는 끝까지 지켜 줄지도 모르지.”
“…….”
“그런데 네 주변 사람들까지 전부 책임져 줄 수 있을 것 같으냐?”
비소가 머무른 병호의 입가를 보자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장담하마. 절대 네가 아끼는 사람들까지는 지켜 주지 못해.”
독살스러운 말들이 수희의 몸에 이리저리 휘감기는 듯했다.
꼼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병호는 수희를 몰아붙였다.
“이 늙은이가 네 동생의 창창한 앞길까지 막게 하지 말아다오.”
할 말을 끝낸 병호가 몸을 트려는데, 벌벌 떨리던 수희의 두 무릎이 꺾였다.
“승조 씨와는 절대 헤어질 수 없습니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은 수희가 머리를 아래쪽으로 깊이 숙였다.
“대신 화가 나셨다면 제 동생이 아닌 제게 화를 내 주세요.”
두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은 수희의 몸이 납작하게 엎어졌다.
“회장님 말씀대로 동생은 아직 많이 어려요. 버티기 힘들 정도로 가혹한 일은. 제발…… 하지 말아 주세요.”
“…….”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수희를 보며 병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머물렀다.
똑똑.
분위기와 맞지 않게 경쾌한 노크 소리에 병호는 수희를 내려다보며 지시했다.
“들어와라.”
수그리고 있던 수희가 무릎을 세울 틈도 없이 문이 열렸다.
“아. 이야기…… 중이셨나 봐요.”
병호의 허락을 받고 들어온 한 여성이 무릎을 꿇고 있는 수희를 바라봤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여성은 머뭇대다가 뒤로 물러섰다.
“이야기가 통하지 않으니 더 할 필요도 없겠어.”
바닥에 붙은 수희의 시야 안으로 자신을 지나가는 병호의 구두가 보였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늘어트리고 있던 머리카락이 뒤로 넘어가며 얼굴이 드러났다.
“어머. 오수희 씨?”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여성의 목소리에 수희의 눈길이 문 쪽으로 옮겨 갔다.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여성은 수희가 지금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박나영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