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내 남자친구의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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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내 남자친구의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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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내 남자친구의 결혼
2022.12.24.
“……박나영 씨.”
하얗게 질려 버린 눈앞에 서 있는 나영은 아연한 표정으로 병호를 쳐다봤다.
“아버님, 수희 씨가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잠깐 할 말이 있어서 불렀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구나.”
회장님이 아닌 아버님이라고 부르는데도 병호는 호칭을 바로잡지 않았다.
재킷의 밑부분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옷매무새를 정리한 병호가 발걸음을 옮겼다.
자리에서 일어설 타이밍을 놓쳐 버린 수희가 바닥으로 시선을 꽂아 넣었다.
머리꼭지 위로 나영의 안타까운 눈길이 닿는 것만 같아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저녁은 나영이가 먹고 싶은 걸로 먹자. 오늘은 내가 사 주마.”
단 한 번도 수희에게는 친절을 베푼 적 없던 병호가 나영에게는 한없이 다정다감했다.
병호가 먼저 응접실을 빠져나갔을 때, 수희가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영은 병호를 따라 나가지 않고 허리를 세우는 수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병호에게 무릎을 꿇었던 수희에게 동정의 눈빛을 던졌다.
“미안해요, 수희 씨.”
수희는 나영이 자신에게 건넬 첫마디가 사과일 줄은 몰랐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수희가 무거웠던 입술을 떨어트렸다.
“나영 씨가 뭐가 미안한데요?”
나영은 자신을 지나쳐 간 병호의 뒷모습을 눈으로 흘기며 작게 속삭였다.
“아버님께 들었죠? 승조 씨랑 저…… 결혼할 거 같아요.”
하.
수희는 뻑뻑한 턱을 벌리며 어이없는 숨을 뱉어 냈다.
당사자인 수희와 승조는 가만히 있는데, 주변에서 두 사람을 떼어 놓지 못해 안달 난 듯했다.
“승조 씨가 그러던가요? 박나영 씨랑 결혼하고 싶다고.”
순진무구한 얼굴로 나영이 수희를 이해시키려고 했다.
“수희 씨는 잘 모르겠지만, 이 바닥에서는 정략결혼 흔한 거잖아요.”
“어째서 그 정략결혼을 승조 씨가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버님이 계시니까요.”
당연하다는 듯 나오는 말에 수희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실현 가능성 없는 말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한병호가 어떤 사람인지 방금 겪어 본 수희였다.
“승조 씨와의 연애에서 아버님을 배제할 수 있겠어요?”
“연애를 하는 건 승조 씨랑 저예요. 한 회장님이 아니라.”
“전혀 상관없지는 않아 보이던데. 조금 전에 아버님 앞에서 무릎을 꿇은 건, 어떻게든 마음을 돌려 보겠다는 거 아니에요?”
심장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깊게 상처를 새기는 말들이 스쳐 지나갔다.
나영의 말대로 수희의 의지로 무릎을 꿇었다. 하나 승조와의 연애를 허락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소중한 동생을 지키기 위해 한 행동이었다. 한 점 부끄럼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렇다고 비참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제가 지금 회장님 앞에서 무릎 꿇은 이유까지 박나영 씨한테 설명해야 하나요?”
“아뇨. 꼭 그럴 필요는 없죠.”
나영이 오른손을 들어 말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까지 수희 씨 아픔 꺼내고 싶지 않아요. 지금 제가 그런 모습 봐서, 많이 속상하시잖아요.”
그런 모습.
나영은 위로를 빙자해서 상처 난 수희의 마음에 소금을 뿌리는 듯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이 순간은 병호보다 나영이 더욱 가증스러웠다.
“박나영 씨랑 더 할 말 없을 것 같네요.”
울컥 치미는 화를 억지로 눌러 잠재우며 수희가 나영을 지나쳐 갔다.
나영은 스쳐 지나가는 수희를 따라 고개를 돌리며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역시 아버님 말씀이 맞네.”
그 목소리를 듣고 공중에 올라섰던 발을 뒤쪽으로 물렸다.
수희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나영이 따분하다는 듯 조잘거렸다.
“수희 씨는 말이 안 통해요. 이 정도 했으면 승조 씨 좀 놔줘야 하는 건데.”
수희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피하려던 건데 더는 참을 수가 없어졌다.
“내가 장담할 수 있는데, 이 세상에 당신 한 명만 있다고 해도 오빤 당신 안 좋아할 거야.”
몸을 돌린 수희가 나영을 보며 소리 없이 입술을 들어 올렸다.
“관심도 없는 여자가 결혼해 달라고 하는데 그게 스토커랑 뭐가 달라.”
“스……스토커?”
“그러니까 망상 좀 작작 해.”
결국 터져 버린 수희가 나영이 입도 뻥긋 못 하게 쏘아붙이고는 응접실을 나왔다.
넓은 로비를 지나 건물을 빠져나오자 양 실장이 짧게 묵례했다.
병호가 데려왔으니 나갈 때 차 한 대는 내어줄 줄 알았지만 크나큰 착각이었다.
양 실장은 수희와 갈 생각이 없는 건지 세단 앞을 지키고 서 있을 뿐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온 건 수희만이 아니었다. 나영이 건물과 연결된 계단을 내려오자 양 실장이 기다렸다는 듯 뒷좌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미리 차에 타고 있던 병호의 옆에 자리를 잡자 양 실장이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갔다.
차는 그렇게 수희만 남겨 둔 채 미련 없이 바퀴를 굴리며 사라졌다.
***
승조의 집무실에 오랜만에 보는 손님이 찾아왔다.
넉 달 만에 만나는 손주 녀석이 몇 마디 하다 말고 휴대폰을 보고 있자 영순은 심통이 났다.
“오랜만에 할미 보면서 왜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어.”
“죄송해요. 연락 올 곳이 있어서요.”
한국에 도착했다는 기사까지 떴는데, 승조의 연락은 닿지 않고 있었다.
일정 때문에 휴대폰을 못 볼 때가 종종 있기에, 이번에도 그런 경우일 거라 생각했다.
손아귀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 두며 승조가 영순에게 관심을 돌렸다.
“언제 부산으로 돌아가세요?”
“오랜만에 친구 만났으니까 일주일은 더 있다 가야지.”
“묵으실 호텔 잡아 드릴게요.”
영순은 고개를 잘잘 저으며 한사코 거절했다.
“신경 쓸 거 없어. 친구 집에서 자면 돼.”
인생의 동반자였던 남편을 떠나보내고 적적해진 영순은 친구들을 만나고 다녔다.
부쩍 외로워 보이는 영순이 신경 쓰여 해외여행이라도 보내 드리고 싶었지만, 몸이 성치 않으니 비행을 하는 것도 어려웠다.
“아버지는 만나셨어요?”
“네 아빠가 많이 바쁘다고 다음에 보자더라고. 항상 안 바쁜 때가 없지.”
주름진 입술을 들어 올린 영순의 눈가에 서운함이 가득 들어찼다.
말은 하지 않아도 영순이 제 아들을 많이 그리워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인 충섭이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세상을 떴을 때도 그랬다.
병호는 장례식장에 하루 머물다 갔을 뿐, 발인을 할 때는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우선순위에 가족은 없으신 분이니까요.”
혼잣말을 듣지 못한 영순이 목을 앞으로 쭉 빼자, 승조가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영순은 승조의 얼굴을 빤히 보다 물었다.
“네 아버지랑은. 아직도 사이가 안 좋은 거야?”
“좋아질 틈을 안 주시네요, 아버지가.”
영순은 제 자식보다 손주 편이었기에 늘 승조에게 마음이 쓰였다.
“일까지 같이 하면서 왜 사이가 안 좋아.”
“아버지가 제 연애사에 관심이 너무 많으시거든요.”
“옆집 김 씨 할매 딸이 그러더니만. 진짜였는가 보네.”
“누군지 보셨어요?”
수희의 이야기에 어두웠던 승조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영순은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어투와 표정이 수희 때문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흐뭇한 마음을 숨긴 채 영순이 두 눈썹을 들어 올리며 투덜거렸다.
“봤지. 얼굴이 허여멀게서 삐쩍 말랐더구먼. 자고로 사람은 통통해야 볼만한데.”
“예쁘진 않았고요?”
피식, 소리 내 웃은 승조가 묻자 영순이 제 무릎을 팍 쳤다.
“예쁘지! 말해 뭐 해. 우리 승조가 고른 처잔데.”
“수희라는 이름, 어디서 많이 들은 것 같지 않아요?”
영순은 어떻게 알았냐는 듯 퍼뜩 수긍했다.
“수희. 그래. 어디서 많이 들은 이름이다 싶었어. 이 할미도 아는 사람인 거야?”
“수희, 제가 중학생 때 같이 다니던 초등학생 여자애잖아요.”
잠시 기억을 되짚어 가던 영순이 늦지 않게 수희를 떠올려 냈다.
“기억난다, 기억나! 그 친구를 다시 만난 거야? 이런 인연이 있나.”
“그래서 더 소중해요. 돌고 돌아서, 다시 만나게 돼서.”
“그럼.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소중하지.”
손을 뻗은 영순이 승조의 손등을 가지런히 쓸어내렸다.
투박하고 거친 손은 한없이 따스하기만 했다.
“이 할미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됐다. 그거면 돼.”
병호와 달리 영순은 늘 승조의 편이었다.
병호가 그를 부산에 버려두고 여자들을 만날 때도, 영순과 충섭이 방황하는 승조의 뒤를 단단히 받쳐 주었다.
어린 나이에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자라는 게 창피했지만, 병호가 다시 그를 데리러 왔을 때는 부산을 떠나는 게 아쉬웠다.
병호의 차에 올라타 서울로 향하던 그때도, 영순과 충섭은 한참 동안 낡은 집 앞에 서 있었다.
서울에 도착하고 나서도 승조는 그 모습이 한동안 잊히지 않았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두 사람이 차 뒤를 가만히 보고 있던 모습이 아른거렸다.
“할머니 부산 내려가기 전에 수희 보여 드릴게요.”
“괜히 수희 부담스러울 거야. 그러지 말아.”
“수희가 할머니 보고 싶다고도 했었는데 안 보시는 거예요?”
“수희가 그랬어?”
한쪽 눈썹을 쓱 들어 올린 영순은 내심 수희를 보고 싶었던 건지 반기는 눈치였다.
“뭐…… 그러면 또 안 볼 수가 없지.”
***
거실 소파에 앉아 무릎을 접어 끌어안은 수희는 제 발치를 바라봤다.
소지에 붉게 생채기가 나 있었고, 뒤꿈치는 살갗이 벗겨져 피가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병호의 집에서부터 대문까지 이어진 길을 걸어 나오는 데 15분이 걸렸다.
게다가 택시가 잡히지 않아 큰길까지 나왔을 때는 구두를 신은 발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상처가 난 발끝을 매만지던 수희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딩동―
초인종 소리에 멍했던 정신이 깬 수희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집에 찾아올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소파를 나와 현관문 문고리를 잡은 수희가 잠시 망설이다 문을 밀어냈다.
“집에 있었네.”
역시나 수희를 찾아온 건 승조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입술 끝을 밀어 올리며 수희가 안쪽을 눈짓했다.
“어서 들어와.”
승조가 현관문을 잡은 수희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은 수희가 거실로 발을 들여놓자마자 승조의 물음이 이어졌다.
“계속 연락했는데, 왜 전화를 안 받은 거야?”
작게 입을 벌린 수희가 테이블 위에 버젓이 올려진 휴대폰을 바라봤다.
병호를 만난 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싶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실을 숨기며 그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오늘 한 회장님 만났어. 오빠 아버지.”
승조는 전혀 병호에게 들은 게 없었기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어?”
그의 눈을 바라보고 싶은데 자꾸만 눈길이 아래로 떨어졌다.
“저번에 한 회장님이랑 점심 먹기로 했던 날 있잖아.”
“…….”
“그날 박나영 씨도 같이 있었어?”
자꾸만 바닥을 향하던 시선을 힘겹게 끌어 올렸다.
병호의 말이 모두 사실이 아니길, 전부 지어낸 이야기이길 바랐다.
떨어지는 그의 잇새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집중하는 수희의 심장이 쿵쿵 뛰어 댔다.
“박나영 씨도 있었어.”
자잘하게 떨리는 수희의 입술이 오므라졌다가 펴졌다.
“왜…….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당연히 자신도 알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승조는 이 사실을 병호에게서 듣게 하는 걸까.
나영이 있다는 걸 알고서도 그 자리에 있었던 승조의 태도에 혼란스러웠다.
“네 일에 지장을 줄까 봐 말하지 못했던 거야.”
맥박이 빨라지고 숨이 턱턱 막혀 왔다.
“내가 오해하지 않도록 이런 건 바로 알려 줬어야지.”
“오해라니. 무슨 오해를 했는데.”
찰나에 승조의 얼굴빛이 뒤바뀌었다.
검은 바다처럼 가라앉아 있는 그의 눈빛에 수희의 표정 역시 따라서 굳어졌다.
“나영 씨 아버지도 있었다며.”
“…….”
“선 자리 같은 거, 아니었어?”
승조에게 화낼 만한 이유가 못 됐다.
약속을 잡은 건 병호이니 승조는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 자리에 갔을지도 모른다.
모두 병호가 짜 놓은 판일 거라 생각하면서도 그에게 서운했다.
“수희야. 내가 먼저 말하지 못한 건 미안해.”
승조가 긴 숨을 내쉬며 이 상황을 타개하려 노력했다.
“왜 대답 안 해줘? 그 자리, 선 자리였어?”
물고 늘어지며 승조를 곤란하게 만들고, 기어코 답을 들으려 하는 자신이 못나 보였다.
“그래. 그런 자리였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닌데.
그의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거 하나면 되는데.
지금처럼 연락 한 통 없는 자신이 걱정돼 달려온 그만 바라보면 되는데.
나는 왜 이렇게 못나게 구는 걸까.
“오빠.”
그를 올려다보는 수희의 눈망울에 얇은 눈물막이 넘실댔다.
“우리…… 같이 사는 거, 다시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