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최선이 최고는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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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최선이 최고는 될 수 없다
2022.12.27.
“오빠.”
“…….”
“우리…… 같이 사는 거, 다시 생각해 보자.”
당장 내일이 그의 집으로 이사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을 리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와 거리를 두고 이 어지러운 감정들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 후에 승조와 함께 사는 걸 진행해도 늦지 않다고 여겼다.
“지금,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그러나 승조에게 전달된 의미는 조금 다른 듯했다.
“다시 생각해 보자니. 이 문제는 그렇게 오래 끌고 갈 만한 일이 아니잖아.”
“남자친구가 선을 보고 왔는데, 어떻게 그게 쉽게 정리가 돼.”
“네가 혼란스러울 거 알아. 이럴 것 같아서 이야기하지 못했어.”
“…….”
“난 그 자리에 박나영 씨가 있는지도 몰랐고, 선 자리인 줄 알았다면 나가지도 않았을 거야.”
역시나 예상했던 것처럼 모든 게 병호가 만들어 놓은 계략이었다.
그는 어느 것 하나 달라진 게 없는데 수희를 비롯한 주변이 바뀌었다.
나약한 마음은 이리저리 휘둘렸고, 수희의 주변까지 폭풍이 불어닥쳤다.
“나도 알아, 오빠 탓이 아니라는 거.”
심장을 누군가 움켜쥔 것처럼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해가 안 되는 거 아니야. 오빠가 더 답답할 거 알아. 아는데…….”
“…….”
“내 마음이 나아지지 않는 걸 어떻게 해.”
훅 불면 사라질 연기처럼 수희의 초점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승조의 손이 수희의 두 어깨를 붙잡았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수희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알아.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니까 더 불안한 거.”
나긋나긋하게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가 수희를 안심시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
“선 자리 거절했어. 다시는 그런 자리 나가지 않을 거야. 한동안 아버지를 만날 일도 없고.”
수희를 달래 주려는 듯 팔을 쓸어내리는 승조의 손길은 한없이 부드럽기만 했다.
그런데도 수희는 긍정도 부정도 보일 수가 없었다.
“아니면, 다른 일이 있는 거야?”
귓가에 자신을 겁주던 병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번졌다.
“이 늙은이가 네 동생의 창창한 앞길까지 막게 하지 말아다오.”
명치를 꾹 짓누르고 있는 이 돌멩이는 병호가 던져 놓은 거나 다름없었다.
다가오는 승조를 밀어내게 되는 것도, 이번 일이 끝이 아닐 거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병호가 포기하지 않는 한 승조와의 분열은 계속될 것이 분명했다.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사실대로 말하지 못한 건 병호가 승조의 아버지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녀 또한 자신을 옭아매던 애란과의 관계를 끊지 못한 건 가족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아무리 승조가 병호를 미워한다고 해도 쉽사리 천륜을 끊지 못할 것이다.
이미 자신이 겪어 봤기에 오늘 겪었던 일을 일절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럼 단순히 이번 일 때문에 나하고 거리를 두고 싶다는 거야?”
“나한테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
“지금 당장은…… 오빠랑 예전처럼 지내는 게 힘들 것 같아.”
승조가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지만, 수희의 뜻은 한결같았다.
팔을 붙잡고 있던 승조의 손이 아래로 흘러내려 왔다.
“알겠어. 무조건 나한테 마음 열라고 강요하지 않을게.”
“…….”
“대신 너무 늦지 마.”
떨어져 나간 줄 알았던 승조의 손이 수희의 손가락 끝에 머물렀다.
아쉬운 듯 수희의 손가락을 매만지던 승조의 손길이 떨어져 나갔다.
“가 볼게.”
찬 공기를 머금은 그의 향수 냄새가 수희에게 머물렀다가 이내 사라졌다.
등 뒤에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어지는 그의 구둣발 소리가 귓가를 두들겼다.
내가 원하는 대로 그가 사라졌다. 부탁을 한 건 나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곁을 떠나자 가슴이 텅 비워진 것 같았다.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하고 싶었다.
당신의 아버지가 내게 한 짓을. 내게 벌이려는 짓을.
그런데 전부 털어놓을 수 없었던 건, 어쨌든 당신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내 선에서 해결하려 했다.
그게 수희가 내린 결정이었고,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최선이 최고가 될 수는 없는 법이었다.
***
최 사장은 소파에 앉아 있는 수희를 보며 눈치를 살폈다.
한 시간 전에 사장실을 찾아와서는 아무런 말 없이 사장실 중심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무슨 일 때문에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고 있기에 최 사장은 더욱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두 시간이 지나가자 숨이 막힐 것만 같아 의자를 밀어내며 일어섰다.
“왜, 왜.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시위하고 있어.”
“제가 무슨 일 때문에 왔는지 알고 계시잖아요.”
완전히 간파당한 최 사장은 도로 책상 앞에 앉으며 일하는 시늉을 했다.
“지금 나 바빠. 좀 있다 미팅도 가야 하고.”
“미팅 일정 없는 거 비서분한테 확인하고 들어왔어요.”
“가, 갑자기 잡힌 거야.”
“사장님.”
돌연 나지막하게 불리는 자신의 호칭에 최 사장은 불길함을 느꼈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수희의 눈망울이 분노를 머금은 것보다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저 계약 파기할게요.”
“뭐?!”
의자를 박차고 일어선 최 사장은 이제야 대화할 의향이 생긴 건지 수희에게 다가왔다.
“계약을 파기하다니.”
“특약 조항 그때 합의하고 넣어 둔 거 잊으셨나 봐요.”
“우리가 언제……!”
그제야 최 사장은 잊고 있었던 조항 하나가 떠올랐다.
[매니저 강철용이 자의적인 퇴사가 아닌 타의로 인해 해고될 시 이 계약은 이유를 불문하고 파기된다.]
“기억나셨나 봐요.”
설마 그게 자신의 발목을 붙잡을 줄은 몰랐던 거다.
철용을 제 손으로 자르게 될 줄 몰랐으니 아예 기억 속에서 지워 놓고 있었다.
무릎이 덜컥 꺾인 최 사장이 자신을 붙잡기도 전에 수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냉정하게 끊어 내려 했던 계획과 달리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어요.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사장님께서 신경 써 주셨던 거, 잊지 못할 거예요.”
애란이 떠나고 최 사장은 그 많았던 일들을 이유 불문하고 전부 미뤘다.
이미 계약된 사안 중 무기한으로 미룰 수 없는 건, 위약금을 물어 가며 계약을 취소하기도 했다.
“너 철용이랑도 인연이 있지만, 나랑도 6년이야. 어떻게 네가 6년을 버려!”
갑작스러운 계약 파기에 최 사장의 검지 하나가 공중을 후볐다.
“최 사장님은 철용 오빠랑 13년이었잖아요. 그럼 철용 오빠는 왜 버렸어요?”
틀리지 않은 말에 최 사장은 손가락질하던 검지를 안으로 접었다.
“네가 나라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알아요, 최 사장님이 먹여 살려야 하는 식구가 많다는 거. 그러니까 제가 나가려는 거예요.”
핸드백 안에서 검은색 선글라스를 꺼내 끼며 수희가 제 눈가를 가렸다.
“이 길이 최 사장님을 지키는 길이기도 하니까.”
선글라스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수희의 눈동자와 마주친 최 사장의 입술이 떨렸다.
“수희야. 너…….”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수희의 눈매에 잔잔하게 눈물이 깔려 있었다.
금방 눈물을 지워 낸 수희가 애써 씩씩하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각자 길 걸어요. 이제 이 기획사는 나 없이도 충분히 클 수 있는 능력이 있잖아요.”
6년 전에는 네 명의 배우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지금은 스물일곱 명의 배우와 다섯 명의 가수가 소속되어 있었다.
시청률 치트 키라 불리는 수희를 놓치면 타격은 있겠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라 장담했다.
“번창하길 바랄게요. 진심으로.”
“수희야.”
수희가 발길을 돌리자마자 최 사장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끝까지 자신을 설득하려는 줄 알고 수희는 돌아서지 않고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구두를 바닥에서 떼어 내기 전에 최 사장의 가슴 먹먹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동안…… 함께해 줘서 고마웠다.”
“…….”
“끝까지 너랑 철용이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수희는 최 사장이 자신을 이해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움을 느꼈다.
어쨌든 수희와의 계약 파기는 기획사 입장에서는 큰 손실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따듯한 말로 헤어짐을 고하는 것도 참 행운이다 싶었다.
사장실 문을 열고 나온 수희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수희는 핸드백 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철용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 너머로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나 싶더니 철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수희야.]
“오빠, 뭐 해?”
[나 지금 면접 보러 가려고.]
“그 면접 보지 마.”
냉정하게 흘러나온 수희의 말에 철용은 잔뜩 의문을 가졌다.
[면접을 보지 말라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수희는 밖으로 당찬 발걸음 내디뎠다.
“나랑 회사 하나 차리자, 오빠.”
또각또각 바닥을 치는 구둣발 소리가 상쾌했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몸에 긴 머리가 허리 위에서 찰랑거렸다.
화사하게 웃어 보이는 수희의 얼굴은 선글라스로도 가려지지 않았다.
***
수희가 하루 동안 밤을 새워 가며 생각해 낸 방안이었다.
자신이 단단한 울타리를 만들어 철용을 품어 주는 것이었다.
더불어 최 사장과는 접점이 사라졌으니, 최 사장을 건들 이유도 없을 것이다.
‘하나씩 해결하자, 하나씩.’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수희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맴돌았다.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역시나 승조였다. 모든 걸 해결하고 나면 승조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를 만나면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나 많았다. 걱정시켜서 미안하다고, 내 마음도 예전과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이제 남은 건 주형이었다. 주형을 언제든 제 손이 닿는 곳에 둔다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Rrrrr―
어제부터 쌓아 둔 부재중을 이제야 본 건지 주형이 이제야 전화를 걸어 왔다.
수희는 차체에 설치된 내비게이션 화면 위에 뜬 통화 버튼을 누른 뒤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누나. 나 오늘 누구 만났게?]
“누구 만났는데?”
수희는 기껏해야 오래된 친구 한 명을 만났을 거라 생각했다.
[나 FL 그룹 회장님 만났어.]
“뭐? 네가 한 회장님을 왜 만나?”
[한 회장님이 직접 누추한 우리 집까지 찾아왔다는 말씀.]
눈을 확 뜬 수희는 뒤늦게 붉은색으로 바뀐 신호를 확인하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타이어가 바닥을 밀어내다 정지선 앞에서 간신히 멈춰 섰다.
앞으로 몸이 쏠린 수희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주형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왜 회장님을 만나, 왜!”
[아,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그냥 자기 가족이 될 사람이 궁금해서 왔다는데 내쫓아? FL 그룹 한병호 회장님을?]
머리를 부여잡은 수희의 호흡이 급박해졌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주형을 데려다 한동안 자신의 집에서 같이 생활하려 했다.
그 후에 승조와 함께 병호에게 가서 정식으로 교제를 허락받으려 했다.
그런데 주형과 연락이 되지 않는 사이에 병호가 먼저 손을 뻗었을 줄이야.
“회장님이 뭐라고 했어? 너한테 무슨 짓은 안 했고?”
[회장님이 뭐라고 하긴. 학교 잘 다니라고 했지. 그리고…….]
“그리고?”
[내가 마음에 든대.]
수희의 속도 모르고 주형은 헤실거리며 웃었다.
[누나 시아버지한테 사랑받으면 다 내 덕인 줄 알아. 나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 같았다니까?]
“오주형, 내 말 잘 들어. 이제부터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한 회장님이랑 만나지 마.”
그나마 다행인 건 병호가 물밑 작업만 들어간 건지 주형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다음에 집으로 초대해 준다고 했는데. 누나랑도 같이 오래.]
“만나지 말라면 만나지 마!”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자 주형은 적잖게 당황한 듯했다.
뒤에서 빵빵거리는 클랙슨 소리에 수희는 신호가 바뀌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나중에 다시 전화해.”
도저히 통화를 하면서 운전을 할 수가 없어 수희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주형은 귀청이 떨어질 뻔한 귓구멍을 검지로 긁어냈다.
“와 씨. 카드 받은 것까지 말했으면 망할 뻔했네.”
편집숍 계산대 앞에 선 주형이 휴대폰을 주머니 안에 밀어 넣었다.
뒤이어 친구 다섯이 자신들이 고른 명품 옷과 신발들을 차곡차곡 쌓아 놨다.
“진짜 이거 다 네가 사는 거지?”
“나중에 내놓으라고 하는 거 없기야.”
“진짜 웬 횡재야. 친구 잘 만나서 명품을 다 사고.”
주형은 우쭐대며 지갑 안쪽에 넣어 두었던 금색 카드 하나를 꺼냈다.
“내가 오늘 골드 카드 있다고 했지? 다 사 준다, 내가.”
“진짜 한병호 회장님이 자기 돈 써도 된다고 한 거야?”
“어차피 우리 누나 FL 그룹 며느리로 들어갈 건데, 한 회장님 돈이 아니라 우리 누나 돈이나 마찬가지지.”
꽤 오랫동안 바코드를 찍고 있던 직원이 계산을 마쳤다.
“전부 다 해서 1,859만 원입니다.”
“일시불로 해 주세요.”
직원이 주형이 내민 카드를 받아 카드 리더기에 꽂았다.
길게 나오는 영수증을 잘라 낸 직원이 주형에게 카드와 함께 내밀었다.
“결제되었습니다.”
그런데 주형은 함께 준 영수증은 쏙 빼놓고 카드만 가져와 지갑에 넣어 두었다.
“영수증은 버려 주세요.”
“영수증이 없으면 환불이 어렵습니다, 손님.”
“괜찮아요. 환불 안 할 거니까.”
다른 직원이 내민 종이 가방 한 무더기를 챙긴 주형은 편집숍을 나섰다.
주형은 편집숍에서 산 선글라스를 끼고는 한병호가 준 돈으로 재벌 놀이에 심취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