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 선택의 갈림길 (96/118)


96. 선택의 갈림길
2022.12.31.



 
수희는 그길로 주형의 아파트로 향했다. 집 앞에 도착한 수희는 벽에 달린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수희가 휴대폰을 꺼내 주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30분 전에 통화했건만 주형은 어째서인지 수희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주형이 전화를 받지 않아 통화는 끝까지 넘어가지 못하고 종료됐다.

더는 병호와 만나지 못하도록, 자신이 주형을 데리고 가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주형아, 누나 너희 집 앞이야. 만나서 이야기해.]

메시지를 보낸 수희는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역시나 메시지의 답은 액정의 화면이 꺼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후우.”

기약 없이 서 있을 수 없으니 수희가 돌아서 복도를 걸어 나왔다.

이제 고작 스물두 살 아이의 앞길을 막는다고 했던 건 전부 겁을 주기 위한 말인 걸까.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수희가 힘없이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하지만 누군가 그 구멍을 꽉 틀어막은 기분이었다.

차에 앉아 주형을 기다리고 있던 수희는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시동을 꺼 둔 터라 바깥의 시린 공기가 차체 내부까지 에워쌌다.

아파트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차를 세워 두었던 수희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벌써 해는 가라앉은 지 오래고, 주변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혹시나 주형에게 연락이 왔나 싶어 휴대폰을 확인해 보지만 아직도 메시지 한 통이 없었다.

내일 다시 주형을 만나기로 하고 차를 돌리려던 찰나였다.

콘솔박스 위에 얹어 놓았던 휴대폰이 네 시간 만에 울려 댔다.

―주형이

주형의 이름이 뜨자마자 수희가 지체 없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누나. 어디야?]

기어 들어가는 주형의 목소리에 수희는 귀를 기울여야 했다.


“아직 너희 집 앞이야. 너 어딘데?”

어디냐는 물음에 주형은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수희가 다시 대답을 재촉하려는데 주형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어 왔다.


[누나. 나 여기 경찰서야.]

 

***



“하아, 하아.”

귓가에 자신의 숨소리가 격하게 울려 퍼졌다.

심장이 쿵쾅대며 울리는 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수희는 멈추지 않고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 형사 1과를 찾아 무작정 뛰어다녔다.

1층으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못하고 3층까지 계단을 통해 올라갔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수희를 알아본 경찰들이 수군거렸지만,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릴 틈도 없었다.

3층 계단 쪽에서 보이는 형사과 팻말을 보고 수희가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넓은 형사과 안에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주형을 단번에 찾아냈다.


“주형아!”

수희의 부름에 주형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누나아아.”

구세주라도 만난 듯 주형의 우중충했던 얼굴에 빛이 환히 들어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주형의 두 손목에는 은색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수희는 서둘렀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주형의 앞에 앉아 있는 담당 형사는 서늘한 공기에도 얇은 반소매를 입고 있었다.


“아직 심문 안 끝났으니까 앉아.”

두꺼운 팔뚝을 가진 형사가 지시하자 주형이 우물쭈물하다가 자리에 앉았다.

주형이 어떻게 좀 해 보라며 형사를 눈짓하자 수희가 붙어 있던 발을 떼어 냈다.


“저, 안녕하세요.”

“오수희 씨?”

형사는 공손히 인사를 하는 수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다행히 늦은 저녁이라 근무 중인 형사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런 곳에는 무슨 일로.”

수희는 의자에 앉아 있는 주형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저희 동생이 여기 있다고 해서 왔어요. 혹시, 뭐 때문에 여기 온 건지 알 수 있을까요?”

형사는 그제야 주형과 수희의 성이 같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주형의 멀끔한 이목구비 구석구석에 수희와 닮은 곳이 있는 것 같았다.

노트북을 두드리던 형사가 수희가 볼 수 있도록 노트북 화면을 돌렸다.


“화면 보시면 1시 30분경에 오수희 씨 동생, 오주형 씨가 강남에 있는 한 편집숍에서 훔친 카드를 쓰는 모습이 CCTV에 찍혀 있습니다.”

“훔친 카드 아니라니까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던 주형은 답답해 미치기 직전이었다.

그런 주형의 말을 깡그리 무시한 형사가 무미건조하게 사진을 넘겼다.


“근처 소고깃집에서도 카드를 썼고, 그다음에는 노래방에서 카드로 결제하다가 저희가 현장에서 검거했습니다.”

주형이 아무리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해도 카드를 훔쳤을 리 없었다.

범죄를 저지를 만큼 제 동생이 악하지 않다고 믿고 있었다.

수희는 주형의 옆에 있던 의자에 앉으며 침착하게 물었다.


“카드 진짜 훔친 거 아니지?”

“누나까지 나 못 믿어?”

기가 찬다는 듯 주형이 발로 바닥을 쳐 냈다.


“그럼 카드가 어디서 난 건지 왜 말을 안 해.”

형사가 수희를 도와 심문하자 주형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소리쳤다.


“한병호 회장님이 나한테 직접 주셨다니까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수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형사는 이미 귀에 딱지가 앉게 들은 탓에 서류판을 책상에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한병호 회장이 도난 신고한 카드인데 주기는 뭘 줘!”

“아니~ 그러니까 나랑 한병호 회장님이랑 통화하게 해 달라니까요. 아니면 우리 아파트 CCTV 좀 봐 달라니까요. 한병호 회장님이 우리 집에 직접 와서 줬어요!”

“네가 말한 시간대에 한병호 회장이 찍힌 기록이 없다니까 그러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 주형이 제 머리카락을 움켜잡으며 눈을 홉떴다.


“돌겠네, 진짜. 우리 누나 한병호 회장 아들이랑 사귀는 거 몰라요? 회장님이 직접 나한테 와서 준 거라니까요? 회장한테 물어봐 봐요!”

“조용히 안 해? 그렇게 친하면 네가 직접 전화해 보면 되잖아.”

주형이 목에 핏대를 세우자 형사가 다시 한번 서류판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머리를 굴리던 주형이 수희의 손을 붙잡으며 격하게 흔들었다.


“누나, 누나 한병호 회장님 휴대폰 번호 알지. 한병호 회장님한테 전화해 봐봐. 도난 신고한 거 취소 좀 해 달라고 해.”

“너…… 한 회장님한테 카드 받았어?”

흥분한 주형과 달리 수희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게 가라앉았다.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못 한 주형이 퉁명스럽게 투덜거렸다.


“아빠가 용돈 주는 거라고 생각하고 사고 싶은 거 다 사라는데, 그걸 안 사고 배겨?”

“잠깐 대화만 한 게 다라며. 왜 나한테까지 거짓말한 거야.”

“그러니까 내가 전에 누나 카드 하나만 달라고 했잖아.”

“지금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안 중요하지?”

수희가 잘잘못을 꼬집고 따지자 주형이 억울하다는 듯 눈가를 찌푸렸다.


“누나라도 내 편 들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양반이 준 건데 왜 나한테 화를 내!”

“잘못된 거라는 거 너 알고 있었잖아. 그래서 나한테 말 안 하고 숨긴 거잖아.”

“누나가 이럴 줄 알고 그런 거야.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구는데? 어차피 누나 돈인데.”

“오주형!”

수희의 외침에 주형뿐만 아니라 앞에 있던 덩치 큰 형사마저 움츠러들었다.

저도 모르게 울컥 치솟는 화를 참지 못한 수희가 앞에 앉은 형사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소란스럽게 해서.”

“아닙니다. 하하. 배우라서 그런지 발성이 아주 좋으시네요.”

어색하게 웃어 보이던 형사가 잔뜩 쪼그라들어서는 수희의 눈치를 봤다.

수희가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형사과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검은색 정장 재킷에 금색 배지를 끼운 변호사가 수사를 맡은 형사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한병호 회장님을 대변하러 온 변호사 강길수입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변호사가 수희의 옆자리에 앉자 형사가 본격적으로 주형의 처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한병호 회장님께서 오주형 씨와 합의를 볼 거라고 하시던가요?”

“아뇨. 법대로 진행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주형의 형량을 경감하기 위해 겁까지 주며 범행을 실토하게 하려던 형사가 탄식을 금치 못했다.


“아아……. 어린 친구인데 직접 만나 보시지도 않고요?”

“네. 민사 소송도 함께 진행할 예정입니다.”

병호가 얼마나 철저하게 덫을 준비한 건지 알 수 있었다.


“그럼 진행 잘 부탁드립니다.”

변호사가 형사에게 인사를 하고는 미련 없이 돌아서서 갔다.

형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노트북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 형사, 이 형사. 이 친구 유치장으로 옮겨.”

칸막이 뒤에서 컵라면으로 늦은 저녁을 때우고 있던 형사 두 명이 주형에게로 다가왔다.

겁에 질린 주형이 벌벌 떨자 수희까지 덩달아 불안해졌다.

형사들에 의해 팔이 붙잡힌 주형이 형사과를 나가면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거 모함이야! 나 진짜 훔친 거 아니라니까? 누나! 누나는 나 믿지?”

끌려가는 주형을 보면서도 수희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수희는 자리를 정리하는 형사를 보며 간절하게 부탁했다.


“제 동생이 쓴 돈은 지금 바로 보내 드릴 수 있어요. 제발 동생 좀 풀어 주세요.”

“현행범이라 지금 당장 풀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언제 풀려날 수 있는 건데요?”

곤란하다는 듯 형사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아마…… 경찰서에서 나가긴 어려울 겁니다.”

“네? 그럼 재판이 진행될 때까지 구속된다는 뜻인가요?”

형사과에 몇 없는 직원들을 둘러보더니 형사가 한껏 목소리를 낮추며 이실직고했다.


“경찰서장님이랑 친분이 꽤 있다고 들었습니다. 오수희 씨 오시기 전에 경찰서장님이 다녀가셨는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주형 씨를 잡아 두라고 해서요. 당장 나가긴 어려울 겁니다.”

손끝이 벌벌 떨렸다. 촘촘히 엮인 거미줄에 몸이 엮인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럼 방법이 없는 건가요?”

“한병호 회장님을 직접 찾아뵙고 이야기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합의도 해야 하니까요.”

이렇게 두 손 놓고 있는 것보단 형사의 말대로 몸이라도 움직이는 게 낫겠다 싶었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희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경찰서를 나와 주차장에 세워 둔 차에 올라탔다.

시동이 걸린 차는 속도를 내며 미끄러지듯 도로로 합류했다.


 

***

병호의 저택 앞에 도착한 수희가 차에서 내려 거대한 대문 앞에 섰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수희는 곧게 세워진 벽에 붙어 있는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시죠.]

안에서 가정부의 목소리가 들리자 수희가 급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수희예요. 회장님 뵙고 싶어서 왔어요.”

[아직 회장님 집에 안 오셨는데요.]

“언제쯤 오시는지 알 수 있나요?”

[말씀해 드릴 수 없어요.]

뚝.

그대로 안에서 인터폰이 끊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희는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병호와 만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저택 앞에 서서 수희는 기약 없이 병호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유치장에 갇혀 겁에 질려 있을 주형을 떠올리며 수희는 초조하게 제자리만 빙글빙글 돌았다.

그렇게 병호의 집 앞에서 한 시간을 기다렸을 때, 병호의 세단이 어두운 길을 들어섰다.

환한 전조등이 수희의 눈가에 부딪혔다. 그러나 세단은 수희를 보고도 문이 열린 대문 안으로 그냥 들어가려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병호를 영영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수희가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두 팔을 활짝 펼치자 세단이 급하게 속도를 줄이더니 이내 멈춰 섰다.

뒷좌석에서 잔뜩 얼굴을 구긴 병호가 내리며 역정을 냈다.


“당장 안 비켜?”

수희는 차 문을 열고 나온 병호에게 달려가 간청했다.


“회장님, 잠시만 시간을 내 주세요.”

“나는 할 말 없어. 양 실장 뭐 해! 이거 치워 버리지 않고!”

부아가 치민 병호가 소리치자 양 실장이 운전석에서 내리며 수희의 앞을 가로막았다.


“오수희 씨, 돌아가시죠.”

수희는 양 실장 어깨 너머로 보이는 병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제 동생이 쓴 돈 지금 바로 갚겠습니다. 합의 부탁드립니다.”

“남의 돈으로 기분 내고 다녔으면 그 값을 받아야지.”

카드를 쓰라고 준 건 당신이잖아.

순간 터지려는 말을 집어삼킨 수희가 어떻게든 병호를 설득하려 애썼다.


“제가 미워서 그러신 거잖아요. 죄 없는 애 벌하지 마시고, 저만 미워해 주세요.”

“난 꼴도 보기 싫은 건 눈앞에서 치워야 속이 풀려서 말이야. 그게 너고, 이게 널 치우는 방법이다.”

냉정을 유지한 병호가 다시 차 안에 올라타려던 순간이었다.

수희가 양 실장을 밀치고 무릎을 꿇은 채 병호의 다리를 붙잡았다.


“제 하나뿐인 가족이에요. 제발. 다시 생각해 주세요.”

병호는 수희를 깔보며 혀를 끌끌 찼다.


“네 무릎은 싸구려구나. 그래서야 진정성이 느껴질까?”

“그만큼 제게 승조 씨와 주형이가 간절하다는 뜻입니다.”

“욕심도 많지. 둘 중 하나는 내놔야 하지 않겠어?”

병호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목 뒤로 소름이 끼쳐 올랐다.


“승조와 헤어져라.”

“…….”

“그러지 않으면 네 동생 앞길, 내가 제대로 막아 주마.”

이미 겪어 봤기에 경고가 아니라는 것쯤 알고 있었다.

초범이니 기껏해야 벌금형이 떨어질 테지만 수희가 걱정되는 건 그 이후였다. 병호가 더는 주형을 건들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어쩌면 더 지독하게 주형의 목덜미를 물고 놓아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수희는 선택해야 했다. 사랑하는 연인인가, 소중한 가족인가.

그리고 그 선택의 갈림길에 선 수희의 등을 병호가 밀었다.


“양 실장, 지금 바로 기자들한테 연락해서 오늘 일 즉시 기사 올리라고 해.”

“기사는 어떻게 쓸까요.”

“FL 그룹 회장의 지갑에서 카드를 훔친 스물두 살 대학생이 사치를 즐기다 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이런 식의 기사가 좋겠군.”

무릎을 꿇고 있는 수희를 깔보며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댓글에 개인 정보 흘리고.”

“……헤어지겠습니다.”

눈망울에 가득 찬 눈물이 아스팔트 바닥에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승조 씨와…… 헤어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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