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느닷없는 이별
(97/118)
97. 느닷없는 이별
(97/118)
97. 느닷없는 이별
2023.01.03.
“승조 씨와…… 헤어지겠습니다.”
그래, 네까짓 게 별수 있겠어?
무릎을 꿇고 있는 수희를 보며 병호는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동생을 건드려도 꿈쩍하지 않으면 병든 아버지를 건들려 했는데 수희가 쉽게 움직여 줬다.
사람 된 도리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는 건들고 싶지 않았는데 잘된 일이다 싶었다.
살아생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일도 자식도, 결국에는 제 뜻대로 이루게 되어 있었다.
“양 실장, 민사 소송은 없던 걸로 하고, 지금 바로 오수희 동생 풀어 줘.”
“알겠습니다.”
휴대폰을 들고 잠시 차의 뒤편으로 간 양 실장이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그러더니 5분도 되지 않아 병호의 곁으로 와 결과를 알려 주었다.
“말씀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병호가 바들바들 어깨를 떨고 있는 수희에게 말했다.
“네 부탁을 들어주었으니, 너도 내가 말한 걸 들어줘야겠지?”
아랫입술을 꾹 짓눌러 깨물고 있던 수희가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나도 사람인지라 시름시름 앓는 네 아버지까지는 건들고 싶지 않더구나.”
아래만 보고 있던 수희의 고개가 한순간에 들어 올려졌다.
“그러니 허튼 생각은 하지 말라는 거다.”
이미 모든 걸 포기한 듯 수희의 눈은 처연하기만 했다.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 가니 병호는 만족스러웠다.
더는 수희와 만날 일이 없길 바라며 병호가 돌아서 차에 올라타려던 순간이었다.
“병호야.”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병호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보자기에 반찬을 바리바리 싸 온 영순이 서 있었다.
병호는 영순을 보자마자 자신의 앞에 있던 수희의 팔을 붙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어머니, 왜 연락도 없이 오셨어요.”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던 터라 수희가 비틀대며 몸을 바로 세웠다.
어머니라는 말에 수희가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영순을 바라봤다.
영순은 느린 걸음을 옮기며 병호 옆에 서 있는 수희와 눈이 마주쳤다.
세월이 세월인지라 영순의 얼굴은 많이 주름져 있었지만 포근한 인상은 그대로였다.
초등학교 때 이후 처음 보는 영순을 반가워할 틈도 없이 병호가 눈치를 줬다.
“어서 가지 않고 뭐 해.”
영순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통성명할 틈도 주지 않았다.
병호로 인해 입이 묶인 수희가 영순에게 묵례만 하고 자리를 떠나갔다.
“어디서 많이 본 애 같은데…….”
멀어져 가는 수희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리는 영순에게 병호가 말을 걸었다.
“뭘 이렇게 많이 싸 오셨어요.”
금색 보자기 안에서는 시큼한 김치 냄새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너 굴 듬뿍 넣어 만든 김치 좋아하잖아. 부산에서 해 가지고 왔지. 겸사겸사 반찬들도 좀 했어.”
보자기에 싸인 반찬을 내밀자 병호가 양 실장에게 턱짓했다.
양 실장이 두 손으로 보자기를 받아 들자 영순이 공중에 올려 두었던 손을 꿈지럭대다 거뒀다.
“다음에는 연락하고 오세요.”
“바쁘다고 전화를 뚝뚝 끊으니 말할 틈이 있어야지.”
조수석에 반찬을 싣고 온 양 실장이 뒷좌석 문을 열었다.
“늦었는데 저녁은 드셨죠?”
“먹고 왔어. 너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쉬어.”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병호가 얼른 뒷좌석에 올라탔다.
양 실장은 영순에게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검은색 세단 후미등에 불이 들어오고, 열린 대문 안으로 차가 들어섰다.
영순은 인사 한 마디도 없이 훌쩍 떠나 버린 병호의 차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사이드 미러에 비친 영순을 보고 있던 병호가 눈길을 떼어 내자 양 실장이 물었다.
“김치랑 반찬들은 저번처럼 직원들한테 나눠 줄까요?”
“그렇게 해.”
병호는 미간을 팍 찌푸리며 마늘 향이 올라오는 조수석을 노려봤다.
“처리도 귀찮은데 왜 매번 해 오는 건지.”
***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수희의 초점은 허공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핸드백 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낸 수희가 잠시 망설이다 승조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치 수희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곧장 승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많이 그리웠던 그의 따스한 음성을 듣자 목구멍이 울음으로 턱 막혀 버렸다.
말을 해야 하는데 도저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울기라도 하면 그가 알아차릴까 봐 수희가 애써 입술 끝을 들어 올렸다.
“오빠, 우리 만날까?”
[지금 너희 집으로 갈게.]
나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건 착각이 아니었다.
우리가 시간을 두기로 한 건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는데, 그에겐 억겁 같은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슴이 아팠다. 욱신대다 못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와 헤어질 생각만 해도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내가 버틸 수 있을까.
“아니, 지금 말고. 내일 보자.”
[알겠어. 내일 연락할게.]
“응. 내일 연락해.”
수희는 귓가에서 휴대폰을 떼어 놓지 못했다. 그건 승조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대화는 끊어졌지만 아쉬움이 끊긴 건 아니었다.
끊지 못한 전화를 붙든 채 승조는 수희에게 할 말을 고르고 있었다.
밥은 먹었는지, 피곤하진 않은지, 지금 어디인지 궁금한 게 많은데, 정말 하고 싶은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수희야.]
“응.”
[많이 사랑해.]
네가 둔 거리가 나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다시 좁히면 되니, 내가 다시 너에게 다가가면 되니, 아무 상관 없었다.
[왠지 너한테도 오늘은 듣고 싶네. 사랑한다는 말.]
휴대폰을 붙잡고 있는 수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도. 나도 많이 사랑해, 오빠.”
그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 진심을 담아, 내 마음을 담아 전했다.
휴대폰 너머로 만족스러운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잔잔하게 깔린 승조의 웃음소리가 멎더니, 나지막한 그의 음성이 흘러들어 왔다.
[그거 알아? 그 말 들으니까, 지금 당장 너한테 가고 싶다.]
“…….”
[가서 안아 주고 싶어. 꽉.]
허락을 구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안아 달라고 한다면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올 게 분명했다.
그걸 알기에 수희는 핑계를 대고 거절해야 했다.
“오빠 피곤하잖아. 그리고 시간도 늦었고.”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수희가 밖으로 발을 내밀었다.
조용한 복도를 걸으며 승조의 목소리가 들려오길 기다렸다.
[그래. 시간도 늦었으니까.]
설핏 묻어 나오는 아쉬움을 수희는 모르는 척했다.
[잠 안 오면 연락하고.]
“……응. 끊을게.”
수희가 막 종료 버튼을 누르기 전에 복도 끝에서 주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나! 추워 죽겠는데 왜 전화를 안 받아.”
한발 늦게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외투 주머니에 밀어 넣은 수희가 주형에게 다가갔다.
주형은 수희가 올 때까지 복도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잔뜩 짜증을 냈다.
“나는 저녁도 못 먹고 유치장에 갇혀 있었는데, 누나는 팔자 좋게 밥 먹고 온 거야?”
아무래도 주형은 한참 있다가 집에 들어온 수희가 저녁을 먹고 온 줄 아는 듯했다.
“저녁 먹고 온 거 아냐.”
진이 빠져 버린 수희가 짤막하게 답하며 주형을 지나치려 했다.
“나 배고파. 나가서 순두부찌개나 먹으러 가자. 그래도 두부는 먹어 줘야지.”
“친구랑 먹어. 너 친구 많잖아.”
“그놈들 벌써 저녁 먹었다고 안 나오겠다잖아. 백 프로 명품 사 준 거 토해내라고 해서 그러는 거라니까.”
터벅터벅 힘없이 걷던 수희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경찰이 애들한테 전화해서 같이 조사받아야 한다고 한 거 알아? 쪽팔려, 진짜. 누나 잘 아는 변호사 없어? 경찰들한테 명예 훼손이랑 무고죄로 소송 걸어야겠어.”
따지자면 병호가 덫을 만들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계략에 걸려든 건 오주형이기 때문이었다.
힘든 건 싫다며 아르바이트는 해 본 적도 없으면서, 매번 용돈이 적다며 수희에게 불평불만만 했다.
그럼에도 주형이 원하는 걸 모두 손에 넣게 해 준 건, 애란에게 못 받은 사랑을 대신 주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그게 주형에게 오히려 독이 되었을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을 돌보기는커녕 오로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까.
“넌 네가 뭘 잘못했는지, 조금도 모르지.”
“잘못한 게 없으니까 풀려났지!”
적반하장. 뻔뻔하게 주형이 목소리를 높였다.
“애초에 나한테 카드 준 건 회장님이라니까. 그리고, 내가 쓴 돈 2,000만 원도 안 돼.”
“너는 그 2,000만 원을 벌어 본 적은 있어?”
평소와 달리 단호하기만 한 수희의 어투에 주형은 당황한 듯 보였다.
“나 학생이야. FL 그룹 한병호 회장한테 2,000만 원이 2만 원이랑 뭐가 달라.”
“그 사람한테 적은 돈이, 너한테도 적은 돈이 돼?”
냉정하게 꿰뚫고 들어오는 수희의 논리에 주형은 서운하기만 했다.
“그깟 돈 때문에 그래? 그것 좀 썼다고?”
원래라면 동생에게 져 주겠지만, 이제 수희는 그게 능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하나 말해 두겠는데, 아무리 사람이 돈을 많이 벌어도 2,000만 원이 2만 원과 동등하진 않아. 그 사람이랑 너한테랑 값어치가 똑같은 돈이야. 힘들게 번 돈인 건 마찬가지니까.”
“왜 내 편 안 들고 그 사람을 싸고도는데.”
절대 병호를 감싸는 게 아니었다. 주형을 위해서 사실을 알려 주는 것뿐이었다.
“네 장인 돈 좀 썼다고 화라도 났어?”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다.”
주형은 조금도 수희가 하려는 말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
제가 가진 걸 똑같이 나눠 주면 언젠가는 동생이 제 마음을 알아줄 줄 알았다.
그런데 점점 더 엇나가고, 그게 옳은 길인 줄 알고 있었다.
바른길을 잡아 주기엔 너무 늦어 버린 것 같았다.
“엄마가 있었으면 내 아들 콩밥 먹을까 봐 잠도 못 잤을 거야. 알아?”
“언제까지 엄마 뒤에 숨어서 나 괴롭힐래.”
“…….”
“네가 괴롭다고 나까지 괴롭히면 속이 시원해?”
흔들리는 목소리에도 수희의 두 눈망울에는 이슬 하나 맺히지 않았다.
제 동생 앞에서 약한 모습 보여 주며 애절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네가 잘못한 게 뭔지 알 때까지 찾아오지 마.”
수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문 열라며 행패라도 부릴 줄 알았지만, 다행히도 복도에서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주형과의 씨름으로 지쳐 버린 수희가 거실에 불도 켜지 않고 주저앉았다.
온몸이 바짝 메말라 버린 듯,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
다음 날, 늦은 오후.
노을이 저물어 가는 풍경이 그림처럼 한강에 비쳐 흘렀다.
가만히 넘실대는 강가를 바라보고 있는데, 수희의 옆으로 승조가 조용히 다가왔다.
긴 소매 밖으로 나와 있는 수희의 하얀 손가락 사이에 그의 손가락이 끼워졌다.
너무나 익숙하게 엮이는 손가락에 수희는 저도 모르게 꽉 움켜잡을 뻔했다.
“생각 정리는 전부 끝난 거야?”
서로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애틋했다.
벗어나고 싶지 않았고, 멀어지고 싶지 않은데 수희의 의지대로 할 수 없었다.
“응, 전부 끝났어.”
후련하다는 듯 숨을 내쉰 수희가 입술 끝을 들어 올리며 그를 바라봤다.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보자 자신이 한 결심이 한순간에 틀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해야 했다. 그와의 이별을.
그의 손에 잡힌 손을 빼냈다.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수희의 손을 잡아 보려 그가 팔을 뻗어 왔다.
그러나 수희는 반걸음 그에게서 멀어지며 밤새 준비했던 말을 꺼내 놓았다.
“헤어지자, 우리.”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는 없었다.
오로지 남이 되어 버린 너와 나뿐이었다.
검은 그의 눈동자에 노을이 비쳐 붉게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