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내가 아는 너
(98/118)
98. 내가 아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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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내가 아는 너
2023.01.07.
“헤어지자, 우리.”
승조는 수희의 말끝에 아무것도 붙일 수가 없었다.
느닷없는 이별을 승조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건 어제까지 사랑한다고 했던 수희가 꺼낼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지.”
믿기지 않아 길게 늘어지는 그의 말의 끝자락이 공허하기만 했다.
“미안해, 오빠.”
미안하다는 한마디에 심장이 통째로 날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너에게서는 절대 들을 리 없을 줄 알았던 말이기에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어젯밤부터 널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차라리 내 눈앞에 있는 네가 허상이길, 내 상상이길 바랐다.
그런데 도리어 상처받은 얼굴로 날 보고 있는 너는 왜 이렇게 현실감이 넘치는 걸까.
“헤어지자는 그런 말 말고. 미안하다는 말 말고. 나한테 할 말 있잖아.”
그가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듣고 싶은 말과도 같으니까.
그런데 나는 아주 이기적이게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그를 버려야 했다.
“없어요.”
“사랑한다며.”
무섭게 따라붙는 승조의 말에 수희가 입을 다물었다.
“한 달도 아니고, 일주일도 아니고, 어제 일이야.”
“…….”
“그런데 몇 시간 만에 마음이 바뀌었어? 그렇게 쉽게?”
혼란스러운 승조를 대변하듯 그의 음성에 점차 힘이 들어갔다.
그의 물음에 답할 수 없는 수희는 내내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기만 했다.
스스로 흥분한 마음을 진정시킨 승조가 수희를 타이르려는 듯 다가왔다.
“뭐든 들어 줄 테니까 나한테 이야기를 해 줘.”
서로를 밀어내는 자석의 같은 극처럼 수희가 뒤로 물러났다.
자신에게 닿지 않으려는 수희를 보니 승조는 가슴에 날카로운 것이 날아드는 것 같았다.
수희가 고개를 떨군 채 겨우 입술을 떼어 냈다.
“나한테…… 다가오지 마.”
“수희야.”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게 끝이야. 더 할 말 없어.”
그와의 대화를 억지로 끝낸 수희가 돌아서려 했다.
그러나 승조에게 손이 붙잡힌 수희는 한 발자국도 뗄 수가 없었다.
살갗에 닿는 그의 손의 열기가 수희의 손을 뜨겁게 데웠다.
“납득이 가는 말을 하나도 안 해 주는데, 내가 널 어떻게 그냥 보내.”
붙잡고 있는 수희의 손을 놓치면 다시는 영영 못 볼 것만 같았다.
애타는 승조의 눈빛을 여전히 무시하며 수희는 등만 보이고 있었다.
도저히 수희가 자신을 버려두고 가려는 이유가 짐작 가지 않았다.
“이유를 말해 줘. 네가 이러는 이유가 있을 거잖아.”
수희가 천천히 돌아서자 승조가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오빠랑 하는 연애가 재미가 없어.”
“……뭐?”
“처음에는 권태기인 줄 알았는데, 그냥 오빠한테 질린 것 같아.”
수희의 눈가와 입가에서는 슬픔도 기쁨도 느껴지지 않았다.
감정 없는 인형처럼 승조를 무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 너머로 둘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네 마음이 변할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거야?”
“응. 그러니까 뭘 하려고 하지 마.”
“…….”
“서로가 노력해서 헤쳐 나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무어라 말할까. 네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내가 싫어졌다고 하는데.
내가 잡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 아는데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아직 너에 대한 내 마음은 이전과 달라진 게 없으니까.
“수희야. 나 너 못 놔.”
“…….”
“내가 어떻게 놓을까. 겨우 널 만났는데, 힘들게 내 마음을 알았는데. 내가 어떻게 너를 놔.”
수희도 마찬가지였다. 애란 때문에 묻어 두었던 소중한 과거가 그로 인해 되살아났다.
나의 일부가, 나의 어린 시절이 모두 그였다.
그런데도 그에게 등을 돌리는 건, 나로 인해 무너질 가족 때문이었다.
“추억 때문에 그런 거야. 추억이 많아서 그게 오빠를 붙잡는 것뿐이야.”
“그거 하나를 내가 모를까. 이건 추억 같은 게 아니라 널 사랑하는 것뿐이야.”
그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수희의 가슴을 두드렸다.
심장이 울리고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네 마음이 바뀔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하면 기다려 줄게. 그럴 수 있어.”
승조의 눈을 바라볼 수 없어 강가로 눈길을 돌리며 다그치듯 외쳤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오빠가 싫어졌다고. 질렸다고. 그만하고 싶다고.”
“내가 오수희를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귓가에 그의 잔잔한 음성이 떠다녔다.
“아무리 내가 싫어졌다고 해도 다른 사람한테 상처 낼 사람이 아닌 걸 아니까.”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 이러다 심장이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딱 달라붙어 버린 목구멍 밖으로 아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오빠가 그런다고 해도 우리 예전으로 못 돌아가.”
“수희야.”
“나에 대해 뭘 얼마만큼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해.”
싸늘한 모멸감이 느껴지는 냉담한 눈길이 승조를 향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에 그의 입술이 처음으로 닫혔다.
“그만해, 이제.”
이번에는 승조가 차에 올라타는 수희를 잡지 못했다.
빠르게 액셀을 밟은 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승조의 앞을 지나쳐 갔다.
차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승조는 수희를 바라보고 있던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어서,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이 모든 게 거짓 같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지만 이마저도 자신만의 생각일까 봐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헤어지자, 우리.”
차디찬 그녀의 목소리가 승조의 텅 빈 마음 사이에 자리 잡았다.
***
끼이이익―
한강을 막 벗어나자마자 수희의 차가 갓길에 멈춰 섰다.
핸들을 붙잡은 두 손이 떨려 도저히 운전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그의 얼굴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상처받은 두 눈, 떨리던 입술, 타는 듯했던 그의 숨.
그 모든 게 영상처럼 남아서 계속해서 반복됐다.
차라리 처음부터 우리는 다시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그는 더 좋은 사람을 만나, 내게 칼날 같은 말들을 듣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난 참 못되게도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의 시간 속에 살고 싶었다.
그게 아주 짧지만 달콤한 단잠일지라도 그의 곁에 남고 싶었다.
“흐윽.”
수그러지는 고개가 핸들에 닿았다.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이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아래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미안해. 미안해…… 오빠.”
그가 나처럼은 아프지 않길.
나보다 아프지 않길.
모든 아픔은 내가 겪길, 바라고 또 바랐다.
***
어두운 서재를 비추는 건 자그마한 책상 조명 하나뿐이었다.
그 불빛 하나에 기대어 승조는 한참 동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수희를 만나고 온 뒤, 승조는 혼란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변해 버린 수희의 태도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여겼다.
수희가 뜻밖의 이별을 고한 시점에 자신의 아버지, 한병호가 존재했다.
우리의 관계에 균열이 온 건 아버지를 만나고 온 이후부터였다.
“아니면, 다른 일이 있는 거야?”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수희의 말만 믿고 승조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것부터가 잘못된 게 아닐까.
늦은 시간이었지만 병호에게 연락을 취하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병호의 번호를 찾기 전에 문득 수희와 했던 마지막 통화가 떠올랐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정확히 들리지 않았지만, 누구의 목소리였는지는 알 수 있었다.
틀림없이 수희는 주형과 함께 있었다.
의자를 밀고 일어선 승조가 옷걸이에 걸어 둔 외투를 걸치고 서재를 나왔다.
***
딩동― 딩동― 딩동―
어제 고단했던 하루를 보냈기에 주형은 일찍부터 잠이 들었다.
포근한 이불 속에서 막 깊은 잠으로 빠져들 때쯤 누군가 연달아 초인종을 울려 댔다.
찾아올 사람이 없었기에 집을 잘못 찾아온 사람이 누르는 거겠지 여겼다.
베고 있던 베개를 접어 귀를 막은 주형이 나른한 눈꺼풀을 질끈 눌러 감았다.
쾅. 쾅. 쾅. 쾅.
지치지도 않는 건지 문밖에 있는 사람은 이번에는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참다 참다 잠이 전부 날아가 버린 주형이 오뚝이처럼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으아악!”
짜증이 치솟아 베고 있던 베개마저 벽에 집어 던져 버리고는 침대를 나왔다.
“누구세요!”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문을 열자, 승조가 어두운 분위기를 뿜어내며 서 있었다.
하필 검은색 옷을 입은 터라 자신을 데리러 온 저승사자인 줄 알고 심장이 떨어졌다 붙었다.
“어우 씨! 깜짝이야.”
“전화했는데 안 받길래 왔어.”
철렁한 가슴을 손바닥으로 짓누르며 주형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왜 한 씨 집안사람들은 하루가 멀다고 나를 찾아오는 거야.”
주형은 반쯤 돌아서며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사과하려고 찾아온 거면 됐어요. 피곤하니까 가세요.”
“방금 뭐라고 했어?”
돌렸던 몸을 제자리로 돌리자 승조가 다시 한번 물었다.
“한 씨 집안, 뭐라고?”
당연히 어제 일을 알고 있을 줄 알았던 주형이 쉽게 입을 열었다.
“어제 한병호 회장님이 저 찾아왔었잖아요.”
“아버지가 찾아와? 자세히 말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얼굴에 주형은 열이 잔뜩 올라서 토로했다.
“한병호 회장님이 저한테 번쩍번쩍한 골드 카드를 주더라고요. 아빠가 주는 돈이다 생각하고 전부 다 긁으라고.”
치욕스러웠던 어제 일을 떠올리니 주형은 머리끝에서 김이 폴폴 올라오는 것 같았다.
“하, 참. 그래 놓고 카드를 도난 신고 해서 콩밥 먹고 나올 뻔했죠. 당신네 아버지 덕분에.”
“……그게 사실이야?”
“누나한테 물어보면 되잖아요! 누나도 어제 나한테 호출받고 경찰서 왔으니까.”
이미 수희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이 중요한 사안을 수희는 승조에게 조금도 상의하지 않았다.
하나뿐인 동생이 경찰서에 있다는 걸 듣고 수희가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이 모든 게 자신의 아버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분명 어제 승조가 전화했을 때라도 말할 틈이 있었다.
설령 그날은 경황이 없었대도 적어도 오늘은 말을 해 줘야 했다.
혼란을 한쪽으로 밀어 둔 승조가 외투 안에 넣어 두었던 지갑을 꺼내려 했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거면 내가 변호사 소개해 줄게.”
“필요 없어요. 그 양반, 아니 회장님이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합의해 줘서 풀려났어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예상컨대 수희와 자신의 관계를 끊어 내기 위해 주형을 끌어들인 것일 거다.
모든 상황을 연출해 두고 중간에 그만둘 병호가 아니었다.
병호가 가장 중요시하는 게 자신의 시간이었다. 의미 없이 시간을 쏟을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합의를 해 준 결정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건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답이 나왔다.
“헤어지자, 우리.”
병호에게 주형과 교환한 것이 이별이었다.
승조는 그길로 주형의 아파트를 나와 아래에 세워 둔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정신없이 안전띠를 매고 차를 출발시키려던 때, 휴대폰이 울려 댔다.
혹여 수희인 줄 알고 승조가 외투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냈다.
―할머니
승조의 예상과는 달리 영순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급박하게 이동을 준비하던 승조가 잠시 고민하다 전화가 끊기기 직전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할머니.”
[승조야, 내가 꼭 너한테 해야 할 말이 있어서.]
“할머니, 죄송한데 제가 나중에 전화를 드려도 될까요?”
[왜? 일하고 있어?]
“아뇨. 아버지 좀 뵈러 가려고요.”
유난히 낮게 가라앉은 승조의 목소리에 영순은 불안한 직감이 들었다.
[무슨 일 있는 거야?]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
[혹시 수희 때문에 그래?]
영순은 많고 많은 이유 중 단번에 수희라는 걸 알아차렸다.
붙잡고 있던 핸들에서 손을 떨어트린 승조의 미간 사이에 짙은 주름이 잡혔다.
“어떻게 아셨어요?”
[일단 네 아버지 집으로 가 있어. 이 할미도 거기로 갈 테니까.]
병호에게 이야기를 들은 건지, 그게 아니라면 수희를 본 건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을 지체할 수 없으니 영순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승조는 영순과의 전화 통화를 끝내고 병호의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