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이 빠진 호랑이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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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이 빠진 호랑이의 반란
2023.01.10.
승조가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2층 계단에서 병호가 내려왔다.
막 잠을 자려던 참이었던 건지 병호는 실크 잠옷에 남색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계단을 밟아 내려오는 병호의 얼굴에는 짜증이 잔뜩 얹어져 있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
“아버지한테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서요.”
병호의 얼굴이 굳었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금방 표정을 갈무리한 병호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회사 일이라면 내일 양 실장 통해서 말해.”
“내일 아버지 중국 출장 있는 거 압니다. 그러니 이 늦은 시간에 찾아온 거겠죠.”
“피곤하니까 다음에 해. 어서 가 봐.”
승조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어림짐작할 수 있었던 병호가 다시 돌아서려고 했을 때였다.
“아버지께서 대화를 피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대화를 피하다니.”
“수희에 관해 이야기할 거라는 걸 알고 계셔서입니까?”
한쪽 눈썹을 끌어 올린 병호가 혀를 끌끌 찼다.
“그래서 내가 그 애를 허락할 수 없는 거다. 입이 솜털처럼 가벼워서야.”
승조의 다물어져 있던 어금니가 세차게 억눌렸다.
이별의 사유가 병호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제 아버지 때문은 아니길 바랐다.
그러나 병호의 반응만으로 수희의 행동이 모두 납득이 됐다.
“수희 동생으로 협박이라도 한 겁니까? 더는 사회생활 못 하게 해 주겠다. 하나뿐인 동생 감옥에라도 넣겠다. 그런 말로 헤어지라고 협박이라도 한 겁니까?”
“다 듣고 온 거 아니냐?”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 마음대로 자식을 쥐고 흔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모든 일을 해결할 때마다 이런 식이었으니, 정당하고 당연한 행동이라고 여기는 것이었다.
“지금 제가 어떤 기분인지 압니까?”
“…….”
“아버지 아들이라는 게, 내가 당신 아들이라는 게, 치욕스러울 정도입니다.”
모욕적인 언사에 병호의 입가가 경련했다.
“아버지를 헐뜯을 정도로 그 애가 좋은 거냐?”
“좋은 게 아니라 사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서 지켜 내려는 거고요.”
“사랑?”
기가 찬다는 듯 병호가 콧방귀를 뀌었다.
“걔 사랑은 고작 널 자기 동생이랑 바꿀 만큼 하찮았어. 그러고도 걔랑 붙어먹고 싶어?”
“당연한 거잖아요!”
이제껏 참고 있던 화가 터지자 병호의 어깨가 일순 들썩거렸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게 가족이니 절 놓은 겁니다.”
“아직도 걔한테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질 못하는구나. 결국에 너를 버린 건 달라지지 않아.”
“아버지가 가족의 의미를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불덩이를 품은 듯 승조의 가슴이 거세게 일렁거렸다.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은 이성을 잠재우려 이로 입술을 짓이겼다.
“그 가족을 이렇게 짓밟는 아버지는 평생 이해 못 할 감정입니다.”
“너 이 자식, 지금 뭐라고 했어!”
손이라도 올릴 기세로 병호가 승조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때, 닫혀 있던 1층의 문이 열리고, 가쁜 숨을 내쉬는 영순이 나타났다.
계단에서 쉬지 않고 달려온 건지 영순이 아픈 무릎을 쥐어짜며 앞으로 걸어갔다.
“애한테 큰소리 내지 마라.”
단호하게 일러둔 영순이 굽은 허리를 펴며 승조의 옆에 섰다.
“어머니는 아직도 이 가증스러운 것이 애로 보입니까?”
제 키보다 한 뼘이나 큰 승조를 올려다보며 병호가 이를 갈았다.
“네가 키워 보질 않았으니 애로 보이지 않는 거지. 나한텐 아직 중학생 어린애야.”
든든한 지원군으로 나선 영순이 거세게 병호와 부딪쳤다.
병호는 제 어머니가 자신이 아닌 손주를 감싸자 눈꼴사나웠다.
“어머니 눈에 중학생으로 보이는 저 영악한 자식이 뭐라고 했는지 압니까? 제가 가족을 짓밟았답니다! 내가 가족을 위해 평생을 어떻게 살았는데.”
“그래. 아주 너밖에 모르고 이기적으로 살았지.”
냉정한 영순의 말에 병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그리 일만 하고 살라던? 승조가 그리 일만 하라던? 네가 원해서 산 삶이야. 어디서 네 자식 탓을 해!”
호되게 꾸짖자 병호가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씩씩거렸다.
“회사가 이만큼 성장했으니 승조도 저렇게 잘 먹고 잘사는 거 아닙니까.”
“난 아직도 못 잊는다. 중학교 졸업하고 나서 승조를 다시 서울로 보내고, 한 달 뒤에 승조를 만나러 왔을 때! 이 큰 집에 승조 혼자 있더구나. 그게 자식을 위한 거였어?”
“…….”
“네가 그렇게 키울 줄 알았으면, 나 승조 다시 안 보냈어.”
“내가 낳았어요. 내 덕분에 저렇게 숨을 쉬고 살아 있는 거예요. 내 것을 내 마음대로 한 것뿐인데 뭐가 문제예요!”
짜악!
찢어지는 소리가 드높은 천장을 울렸다. 옆으로 고개가 돌아간 병호의 볼에는 영순의 손자국이 벌겋게 나 있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낳는 건 네가 아니라 승조 어미가 다 했지.”
뻣뻣한 고개를 바로 돌린 병호가 얼떨떨한 눈으로 영순을 바라봤다.
“지금…… 저 때리셨어요?”
“왜? 화나니? 너는 말로 자식을 때리는데 뭐가 다르냐.”
“어머니!”
“큰소리 내지 말랬지!”
병호가 목소리를 높이면 영순이 더 크게 소리를 높였다.
노인의 고함에 압도된 병호의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다시는 승조한테 상처 주지 마라.”
“…….”
“네가 아무리 아비라도 자식한테 상처를 줄 권한은 없는 거야.”
병호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영순이 승조의 손을 잡은 채 커다란 저택을 빠져나왔다.
등 뒤에 있던 저택의 문이 닫히고 승조가 휘적거리며 앞서가는 영순의 옆에 붙었다.
“할머니, 그러다 넘어지세요.”
승조가 영순의 팔을 붙잡아 부축하자, 영순이 잠시 자리에 멈춰 섰다.
주먹을 움켜쥔 영순이 답답한 제 가슴을 내리치며 한탄했다.
“내가 잘못 키웠지. 내가 잘못 키웠어.”
“할머니 때문이 아니에요.”
영순은 병호 밑에서 바르게 자란 승조가 기특할 뿐이었다.
주름이 잡힌 영순의 손이 승조의 손을 끌어왔다.
승조의 손을 쓸어내리는 영순의 손에서 힘든 세월이 느껴졌다. 굳은살이 박인 살갗과 다르게 손길은 부드럽기만 했다.
“놀라지 말고 들어, 승조야.”
제 손자가 상처받을까 봐 영순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어제 네 아버지를 만나러 집에 왔을 때, 우연히 수희가 네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걸 봤어.”
“설마…… 수희 동생 때문에 무릎을 꿇은 거예요?”
“자세한 사정은 내가 못 들었지만, 오늘 일을 내 눈으로 직접 보니 그런 것 같구나.”
충격이 인 승조의 턱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동생을 지키기 위해 무릎까지 꿇었던 수희를 폄하하던 병호가 떠올랐다.
“그걸 보고도 아버지는 어떻게 저런 말씀을 하실 수 있어요.”
“…….”
“무슨 자격을 가지고 수희를 무릎 꿇려요!”
숙연해진 영순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일단 진정해, 승조야. 이성을 잃으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야.”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엉망으로 엮인 숨을 내쉬며 승조는 감정들을 잠재우려 애썼다.
“왜 없어. 수희, 그 처자 만나러 가야지.”
“제가 어떻게 잡을까요.”
“어떻게든 잡아야지.”
“자기 동생 지키겠다고 무릎까지 꿇었어요. 저만 아니었다면 그런 일 겪지도 않았을 거예요.”
붙잡고 있던 승조의 손을 좀 더 억세게 쥐며 영순이 힘을 실어 주었다.
“그럼 이대로 수희 혼자 둘 거야?”
“…….”
“만나서 들어 줘야지. 얼마나 힘들고 아팠는지, 승조 네가 곁에서 들어 줘야지.”
하지만 승조에게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수희의 곁으로 다시 간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남아 있어요.”
“…….”
“아버지라면 또다시 수희의 가족을 언제든 건들 수 있어요.”
“이 할미한테 다 방법이 있어.”
영순의 표정에서는 결연함마저 엿보였다.
“무슨 방법요?”
“사람은 자고로 역지사지를 겪어 봐야 제 잘못을 아는 법이야.”
병호가 있는 저택을 바라보며 영순이 중얼거렸다.
“너한테 소중한 걸 가져가려 했으니, 너도 아버지한테 똑같이 돌려줘야지.”
아무리 이 빠진 호랑이라고 하더라도, 호랑이라는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영순은 망아지나 다름없는 병호의 목을 물 작전을 승조에게 알려 주었다.
***
새벽 2시. 승조가 수희의 아파트 아래에 섰다.
수희가 사는 층이 어디인지 알기에 가만히 그곳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얀 커튼이 쳐진 거실에는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너는 아직도 잠 못 들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나 때문에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건 아닐까.
지금이라도 당장 그녀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승조는 충동적으로 떨어지려는 걸음을 힘겹게 억누르며 바닥에 묶어 두었다.
병호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수희는 자신을 받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말도 수희에게는 달콤한 사탕발림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 수희야.”
무슨 일이 있어도 모든 걸 해결하고 네 곁으로 갈 테니까.
꽤 오랫동안 아파트 아래에 머물러 있던 승조가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때마침 창가에 쳐졌던 커튼이 걷히고, 수희가 아래에 보이는 승조를 내려다봤다.
승조를 보자마자 수희는 곧장 창을 열고 베란다로 나갔다.
그를 부르면 틀림없이 돌아볼 텐데, 그걸 알기에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멀어지는 그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데도 수희는 승조처럼 그 자리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중국 출장에서 돌아온 병호는 쌓인 여독을 풀기 위해 사우나를 찾았다.
허리에 흰 수건 하나 두르고 한증막에 앉아 땀을 쭉 빼냈다.
“그렇게 난리 칠 땐 언제고 조용하네.”
영순과 함께 자신의 속을 들쑤셔 놓던 승조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갔다고 생각했을 때쯤, 양 실장이 급하게 한증막 안으로 들어왔다.
얼마나 급했던 건지 정장 차림을 한 양 실장의 안경에 흰 김이 서렸다.
“회, 회장님, 알려 드릴 것이 있습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온도에 양 실장의 얼굴에 금방 땀방울이 맺혔다.
“나중에 해.”
자신의 개인 시간을 간섭받는 걸 싫어하는 걸 알기에 양 실장은 뭉그적댔다.
평소답지 않은 양 실장의 행동에 병호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기다렸다는 듯 양 실장이 말을 토해냈다.
“2주 뒤에 임시 주주 총회가 열리게 됐습니다.”
정기 주주 총회와는 달리 임시 주주 총회는 회장인 병호의 허가 없이 주주들을 소집할 수 있었다.
자신이 중국에 나가 있는 사이에 주주들이 소리 없이 움직인 것이다.
병호가 불길한 징조를 느낀 건 임시 주주 총회가 열리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주주들에게 연락 한 번 못 받았다는 것이었다.
“안건이 뭐야?”
양 실장은 손을 벌벌 떨며 고개를 떨궜다.
“그, 그게, 안건이…… 회장님의 해임 건입니다.”
“뭐?!”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던 병호는 순간 머리가 핑 돌아 다리를 삐끗하고 말았다.
양 실장이 잡을 틈도 없이 병호의 몸이 획 하고 뒤로 넘어가며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그러면서 허리에 두르고 있던 수건이 펄럭 날아오르더니 그의 얼굴을 덮었다.
“회장님! 회장님!”
양 실장이 병호의 이름을 불러 댔지만, 소리는 아득히 멀어지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