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뜨거운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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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뜨거운 인사
2023.01.14.
“회장님, 정신이 드십니까?”
빙글빙글 도는 시야 안으로 양 실장이 들어오자, 병호는 여기가 천국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했다.
탈의실 평상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자 이마에 있던 물수건이 떨어졌다.
양 실장은 병호의 상체를 일으켜 세워 주며 말했다.
“지금 구급차 오고 있습니다.”
“괜히 소란만 일으켜. 괜찮으니까 오지 말라고 해.”
“알겠습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간 병호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아까 그건 무슨 소리야. 날 해임시키겠다니.”
“한승조 대표님이 주주들을 모아 임시 주주 총회를 소집했습니다.”
젊음을 다 바쳐 일궈 온 회사였다. 이렇게 쉽게 승조에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
“어차피 승조 그 녀석이 가지고 있는 주식으로는 나 못 이겨. 주주들 마음 돌릴 수 있는 능력도 안 되고.”
임시 주주 총회 소집일까지 기간이 남아 있으니, 그때까지 대주주들을 만나면 될 일이었다.
하나 양 실장의 파리하게 질린 얼굴엔 혈색이 돌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제가 알아보니 회장님의 누님들께서 모두 한국으로 들어오신다고 합니다.”
“큰누나랑 작은누나, 둘 다?”
“네. 임시 주주 총회 이틀 전에 도착하는 비행기입니다.”
막내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회사를 물려받을 수 있었던 건, 한 씨 집안사람들이 회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가 살고 싶어 했고, 큰누나는 세계 여행을 목표로 지구를 돌았다.
그나마 가방끈이 가장 길었던 작은누나는 스위스 유학 중 지금의 남편과 덜컥 아이가 생겨 그곳에 정착했다.
모두 회사에 손을 뻗은 적은 없었지만, 할아버지가 나누어 주었던 주식의 양이 적지가 않았다.
게다가 충섭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며, 많은 양의 주식을 제 아내인 영순에게 양도했다.
만약 승조가 제 고모들을 설득했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진다.
그제야 병호는 자신의 등 뒤가 높은 낭떠러지인 걸 깨달았다.
***
“지금쯤이면 임시 주주 총회 소집도 아버지 귀에 들어갔겠네요.”
집무실 소파에 앉아 있던 승조가 벽면에 설치된 TV를 바라봤다.
뉴스 자막에는 ‘한병호 회장 해임 건으로 임시 주주 총회 소집.’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 정신없을 테지.”
“어떻게 임시 주주 총회를 열 생각을 하셨어요?”
승조의 물음에 영순은 별거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드라마 보니까 주주 총회에서 회장도 쉽게 자르더구먼.”
충섭의 어깨너머로 배운 줄 알았더니, 깨달음을 준 건 다름 아닌 드라마였다.
“드라마 덕분에 제가 살았네요.”
임시 주주 총회를 열자는 건 영순의 작전이었다. 거기에 대주주들을 물색해 의견을 합친 건 승조였다.
고모들을 설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저 전화 한 통에 한국으로 날아온다고 했다.
영순과 승조의 뜻이 같다고 하니 제 동생인 병호의 말은 들어 볼 것도 없다고 덧붙였다.
회사 일이야 어련히 알아서 할까 했던 고모들이 조카의 부탁에 움직인 것이다.
“아직 임시 주주 총회가 2주나 남았으니 안심할 수는 없지.”
“그래야죠.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니까.”
반란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
임시 주주 총회가 열리는 날까지 미디어에선 FL 그룹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과연 한병호 회장이 해임될 것인가와, 만일 그렇게 된다면 차기 회장은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였다.
의견은 분분했다. FL 그룹에 많은 공을 들인 한병호 회장을 회임하는 건 부도덕한 일이라는 것과 FL 그룹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는 회장 교체도 나쁘지 않은 방안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의 관심 속에서 임시 주주 총회가 열렸다.
S 컨벤션 센터 내부는 임시 주주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온 주주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기자들도 찾아볼 수도 있었다.
“곧 임시 주주 총회가 시작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스피커 밖으로 흘러나오는 안내 말에 몇 남지 않았던 자리도 채워졌다.
한편, 홀의 뒤편에 있는 대기실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이럴 수는 없는 거야!”
2주 동안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한 병호의 눈두덩 밑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양 실장은 두 손을 모은 채 병호의 앞에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임시 주주 총회가 펼쳐지기까지 2주라는 시간이 있었지만, 이미 승조 편에 선 주주들의 마음이 확고했기에 방안은 없었다.
이미 승산 없는 게임의 제물로 바쳐진 병호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회장님……. 한 대표님과 대화를 나눠 보시는 건 어떨까요.”
“조용히 안 해!”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으려던 양 실장은 냉정히 현실을 알렸다.
“한 대표님의 마음을 돌리지 않는 이상 방법이 없습니다, 회장님.”
“…….”
알고 있었다. 승조의 말 한마디면 대주주들이 움직일 것이라는 걸.
다 알고 있는데도 2주간 승조를 만나지 않은 건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병호는 혹시나 승조인가 싶어 고개가 훅 돌아갔다.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안으로 진행자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회장님, 이제 들어가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회사를 운영하면서 이토록 위기감을 느꼈던 건 처음이었다.
제 모든 걸 바친 회사를 승조에게 송두리째 빼앗기기 직전이었다.
급하게 굴린 머릿속에서 금방 들통날 방안이 떠올랐다.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이번 임시 주주 총회는 미뤄야겠어.”
“컨디션 너무 좋아 보이시는데, 어디가 어떻게 아프세요.”
진행자가 옆으로 비켜서자 언제부터 서 있던 건지 승조가 안으로 들어왔다.
초조한 자신과는 달리 여유가 넘치는 모습에 병호는 역정을 쏟아 냈다.
“네 아버지를 불구덩이에 빠트려 놓고 어디 얼굴을 들이밀어! 이건 패륜이나 다름없어!”
밖에까지 드넓게 울려 퍼지는 병호의 고함에 승조가 양 실장에게 나가라 눈짓했다.
눈치껏 양 실장이 진행자와 함께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대기실 문이 닫히자 승조가 더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일러두었다.
“이번 사안 반대해 달라, 그 한마디면 아버지가 원하는 회사 지킬 수 있습니다.”
심기가 비틀린 병호의 눈가가 덜덜 떨렸다.
“……나보고 너한테 부탁을 하라고?”
“뭐가 어렵습니까. 아버지가 아들보다 더 끼고 살던 회사를 지키기 위한 건데.”
“나 네 아버지야!”
“그러니 쉬워야죠.”
곧장 승조가 대꾸하자 병호가 입을 다물었다.
승조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망설임도 없었다.
“수희는 남인 아버지 앞에서 제 동생 지켜보겠다고 무릎 꿇었습니다.”
“…….”
“그런데 아버지는 자기 아들한테 부탁 하나 하는 게 뭐가 어렵습니까.”
병호는 그제야 승조가 원하는 것이 뭔지 깨달았다.
“그거 하나 깨닫게 해 주겠다고, 네가 지금 아버지 회사를 빼앗겠다는 거냐?”
“그게 저한테는 너무 크니까요.”
“네가 어떻게 아버지의 뒤통수를 쳐.”
분이 풀리지 않은 병호를 두고 승조가 손목에 찬 시계를 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아버지, 아직도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시겠어요?”
“…….”
“지금 주주 총회 들어가시면 회장 해임안 통과됩니다.”
이미 주주 총회는 시작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저한테 부탁하실 건가요, 아니면 주주 총회 같이 들어갈까요.”
밖에서 많은 직원이 병호와 승조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제 선택은 병호의 손에 달려 있었다.
불규칙하게 숨을 내쉬던 병호가 점차 자신의 호흡을 되찾아 갔다.
놓고 있던 이성의 끈을 붙잡은 병호의 입술이 느릿하게 벌어졌다.
“부탁……한다. 회장 해임안, 반대해다오.”
병호는 결국 제 뜻을 굽히고 회사를 지켜 내는 것을 선택했다.
모든 절망은 전부 자신이 짊어진 것처럼 병호의 얼굴은 어둠에 잠겼다.
“들어드리겠습니다.”
몇 번이나 철렁 내려앉았던 병호의 심장이 드디어 제자리에 붙었다.
“대신 확답을 받고 싶습니다.”
“…….”
“수희와 제 관계, 더는 간섭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제 목숨이나 다름없는 회사를 쥐고 흔든 이유가 그깟 배우 하나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연애도, 결혼도 다 제가 결정합니다.”
“나중에 후회할 거다. 왜 그 아이를 만나게 뒀냐고, 나한테 따져 물을 거야.”
병호가 그랬다. 한때 전 부인을 만나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결혼 생활은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사랑에는 유통 기한이 있었고, 유독 병호의 사랑은 그 기한이 짧았다.
그렇기에 병호는 사랑이라는 걸 믿지 않았다. 승조와는 다르게.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
“제가 제일 후회하는 게 수희 곁에 좀 더 빨리 다가가지 않은 거니까요.”
승조를 붙잡고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아들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 걸 알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일은 권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제 아들을 통해 깨달았다.
***
“이 건물이 제일 마음에 드네요.”
수희는 아침 일찍부터 기획사를 차릴 오피스 빌딩을 둘러보고 있었다.
강남역에서 멀지도 않고 층당 보증금과 월세도 다른 곳에 비해 비싸지 않았다.
“여기 사장님이 건물을 여러 개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깐깐하지도 않아요.”
수희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부동산 직원도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지금 계약하면 사장님이랑 바로 계약할 수 있나요?”
“그럼요. 대리인이 계시는데 바쁘시지 않은 한 바로 와 주실 거예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아래로 살짝 내리며 건물을 꼼꼼히 둘러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로 할게요. 사장님한테 연락해 주세요.”
직원이 곧장 빌딩 주인에게 연락하려는데, 수희가 갑자기 손을 들어 올리며 저지했다.
“월세…… 조금 깎아 주실 수 있는지 여쭤봐 주시겠어요?”
속전속결로 대리인 대신 사장이 직접 온다는 말을 듣고 부동산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부동산 직원이 볼일을 보러 잠시 나간 사이 수희는 휴대폰을 꺼내 뉴스를 찾아보았다.
인터넷에 들어가자마자 어렵지 않게 병호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FL 그룹 갑작스러운 임시 주주 총회…… 한병호 회장의 해임안 부결]
수희는 이끌리듯 머리기사를 눌러 보았다.
[FL 그룹은 8일 열린 임시 주주 총회에서 한병호 회장의 해임안을 상정했지만 부결되었다. 이에 따라 한병호 회장은 경영권 방어에 성공하고 건재함을 알렸다.]
막 기사의 마지막 줄을 읽었을 때쯤이었다.
“내 소식이 궁금하긴 했나 보네.”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수희가 턱 끝을 위로 들어 올렸다.
내가 지금 거꾸로 보고 있어서 잘못 보고 있는 걸까.
그게 아니면 쓰고 있는 선글라스가 문제인 걸까.
“어떻게 오빠가 여기에 있어?”
몸을 뒤로 튼 수희가 제 뒤에 서 있는 승조를 마주했다.
그가 보기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널 찾아오려고 하긴 했는데, 너도 날 찾았던데?”
“내가 언제 오빠를 찾았다고…….”
수희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잠시 자리를 비웠던 부동산 직원이 들어왔다.
직원은 수희 앞에 서 있는 승조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셨어요, 사장님?”
사장님이라는 소리에 수희가 얼떨떨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희가 묻기도 전에 직원이 의문을 풀어 주었다.
“건물 사장님이세요. 인사는 나누셨어요?”
말문이 막혀 버린 수희를 대신해 승조가 말했다.
“지금 막 뜨겁게 인사하려던 차였습니다.”
눈앞에 있는 승조가 환상 같아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냈다.
검게 덮인 유리알이 사라졌는데도, 승조의 형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 한승조였다.
떨어지는 입술 사이로 소리가 흘러나오기도 전에, 승조가 두 손을 뻗어 수희를 끌어안았다.
그의 다부진 팔이 수희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았다. 보듬어 안는 손길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여전히 벗어나고 싶지 않을 만큼 포근하고 애틋했다.
“내가 다시 너 잡으러 왔어, 수희야.”
그리고 여전히 다정한 그의 목소리 또한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