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 멀고 먼 길을 돌고 돌아 (101/118)


101. 멀고 먼 길을 돌고 돌아
2023.01.17.



 


“내가 다시 너 잡으러 왔어, 수희야.”

그를 만나는 건 3주 만이었다.

날 잊고 잘 사는 줄 알았다. 그러니 새벽녘에 집 앞에 찾아온 이후로 날 찾지 않는 거라, 연락 한 번 없는 거라 여겼다.

그 역시 나처럼 가족을 택한 거라 위로하면서도, 그가 날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거짓말처럼 그가 날 만나러 왔다.

허공에서 방황하던 수희의 손이 승조의 허리에 얹어졌다.

뒷머리를 쓸어내리는 그의 손길에 눈물이 왈칵 나올 것만 같았다.

3주 동안 곁에 그가 없는데도 늘 승조 생각밖에 없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고, 안기고 싶고, 사랑한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병호에게 발이 묶인 채 그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수희는 병호와 약속한 게 있었다.


“이거 놔.”

어느새 흔들리는 마음을 정리한 수희가 그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밀어냈다.

순순히 뒤로 밀려난 승조는 뒤에서 상황 파악 중이던 부동산 직원에게 말했다.


“인사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실 수 있을까요?”

“아, 그럼요! 천천히 인사 나누세요.”

직원이 맨몸으로 부동산을 급하게 나가자 일순 주변이 고요해졌다.

입술을 꾹 다문 수희는 애써 승조를 외면하며 등을 돌렸다.


“내가 본 건물 사장님인 줄 몰랐어. 알았으면 계약하려고 안 했을 거야.”

“3주 만에 보는 건데, 얼굴이라도 보면서 말해 줘.”

승조가 수희의 손을 붙잡았지만, 수희가 냉정하게 그의 손을 떼어 냈다.


“나 가 볼게.”

그에게 휘둘리면 자신이 한 선택을 되돌릴 수 없을 것만 같아, 급하게 발걸음을 떼어 내려 한 순간이었다.

한 발을 채 내딛기도 전에 승조가 뒤에서 수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가 수희의 어깨에 얼굴을 묻자,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랑 약속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네 곁에서 안 떠난다고.”

“…….”

“그러니까, 나 이제 네 옆이 아니면 안 돼.”

어깨에 쏟아지는 그의 숨결이 델 것처럼 뜨거웠다.

등에 닿는 그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꺼지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이대로 그가 곁에 남기를 바랐다.

그러나 눈앞에 주형이 아른거려 마음 편히 그에게 안길 수조차 없었다.


“오빠. 이러면 안 돼.”

수희가 허리에 둘러진 승조의 팔을 억지로 떼어 냈다.

어렵사리 승조의 곁에서 떨어진 수희가 부동산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임시 주주 총회 연 거 나야.”

문손잡이로 뻗었던 손을 거둔 수희가 커다래진 눈을 하고 고개를 돌렸다.


“설마…… 회장 해임안을 낸 것도 오빠야?”

“그래. 내가 그랬어.”

믿을 수 없다는 듯 수희의 두 눈동자가 동요를 일으켰다.


“나 때문에 그런 거야?”

“너 때문이 아니라 날 위해서 그랬어.”

“…….”

“내가 널 어떻게 잃어.”

그건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듯 수희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난 오빠랑 회장님 사이가 나빠지길 바라지 않아.”

“네가 아버지 때문에 헤어지자고 한 걸 아는데, 내가 어떻게 아버지 얼굴을 봐.”

가족을 잃어 본 수희이기에 승조와 병호의 사이가 어그러지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걸 알기에 승조는 FL 그룹을 가져올 수 있었음에도 병호에게 마지막 기회를 줬다.

병호가 완전히 수희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걸 알았다.

그건 지금부터 승조가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였다.


“그래도…… 그래도 나는.”

“알아, 네가 가족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

“그래서 아버지를 버리지 않고 이 방법을 택한 거야.”

이미 눈물이 가득 차오른 수희의 눈가를 보고 승조가 눈썹 사이를 좁혔다.

그녀를 울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그 모습조차도 소중했다.


“그리고 성공했지. 아버지가 포기하셨으니까.”

“포기하셨다니?”

“너랑 내 연애 더는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어.”

“……회장님께서 우리 연애 허락하셨다는 거야?”

승조는 그걸로는 만족하지 못해 결혼까지 허락받았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지금도 동그란 눈이 한계까지 커져 있는데, 저러다 눈물이라도 툭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그래. 이제 아무 데도 못 가.”

“…….”

“내가 너 실컷 사랑해 줄 거니까.”

두 손을 뻗은 승조가 수희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작게 떨리는 수희의 등을 커다란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그러니까, 수희야.”

“…….”

“아끼지 말고, 남김없이 날 사랑해 줘.”

찬찬히 수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희의 얼굴이 닿아 있는 가슴팍이 눈물로 축축이 젖어들어 가는 게 느껴졌다.

결국 수희를 울리고 만 승조가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붉어진 눈가를 숨겨 보려 수희가 오히려 승조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어 왔다.


“오빠한테 그런 말 하고 싶지 않았어. 싫어졌다고. 질렸다고. 그만하고 싶다고 해서 미안해.”

“…….”

“상처받게 해서, 아프게 해서 미안해.”

3주 만에 하는 사과였다.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며 수희가 승조의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귓가에 가장 먼저 닿는 건 가볍게 부서지는 그의 웃음소리였다.


“헤어지자는 이유가 드라마 명대사처럼 하나같이 가슴에 와닿긴 했지.”

웃음소리에 눈물이 쏙 들어가 버린 수희가 말간 눈을 하고 승조를 올려다봤다.


“네가 나한테 한 말들, <야수> 드라마 대사잖아.”

“아.”

“아?”

헤어지는 이유를 댈 때까지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아, 수희는 머리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술을 움직였었다.

그게 4년 전에 찍은 드라마 <야수>의 대사라는 건 승조가 알려 줘 방금 깨달았다.

어쩐지 준비한 적도 없는데 나오는 말들이 입에 착착 달라붙었었다.


“좀 더 참신한 이유가 생각이 안 난 거야, 아니면 내가 그럴 가치가 없었던 거야.”

승조의 두 손이 수희의 두 볼을 붙잡아 당기자 말랑한 볼이 찹쌀떡처럼 늘어났다.


“어울애. 아오 아구 알아아구. (억울해. 나도 방금 알았다고.)”

 

 
양쪽으로 늘어난 볼에 발음이 뭉개지며 나왔다.

이제야 수희가 웃자 승조도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었다.

수희의 볼을 붙잡아 당기던 손을 떼어 낸 승조가 지그시 그녀를 바라봤다.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살아 숨 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3주라는 시간은 절대 짧지 않았다. 몇 번이고 수희를 만나러 집 앞에 찾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수희와 우연히라도 마주치면 그녀를 안고 놓아주지 못할 것 같았다.

지금처럼 수희가 편히 미소 지으며 자신을 맞이할 수 있을 때 만나고 싶었다.

그게 수희와 자신을 위한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만 생각하자, 수희야.”

승조의 손이 수희의 뺨을 쓸어내렸다.


“너만 보고 사랑하기에도 내 시간은 부족해.”

“응.”

고개를 주억거리는 수희의 눈망울에 또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꾹꾹 참아 누르기 위해 입술까지 앙다문 모습을 보자, 승조의 입술 새로 웃음소리가 부서지며 나왔다.


“또 울려고?”

“오빠가 자꾸 울리잖아.”

울다가 웃음이 터진 수희가 눈물진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허리를 숙인 승조가 수희의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추며 달곰하게 속삭였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 오수희.”

“이번에도 잘 부탁해, 오빠.”

행복에 젖은 두 사람의 눈길이 서로만을 향했다.

희미하게 올라간 입술 끝은 한참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았다.

너무나 먼 길을 돌아 다시 만났기에 두 사람은 서로가 더욱 소중했다.

그렇기에 다시는 손에서 놓치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재회는 뜨거워야 하는 게 맞지만.

이건 뜨거워도 너무 뜨겁지 않은가.


“오빠, 나 요리해야 하는데.”

승조의 와이셔츠를 빌려 입은 수희가 곤란한 얼굴로 뒤에 붙은 그를 바라봤다.

살이 빠진 것 같은 그의 배를 불려 주기 위해 두 팔을 걷어붙였는데, 자신을 끌어안은 승조 때문에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다.


“요리는 나중에 해.”

“오빠가 배고프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침대로 가자.”

수희는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는 부동산에서 돌아오자마자 얼마나 격렬하게 인사를 나눴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적어도 몸은 잊은 게 분명해.’

밀착된 그의 하체가 점차 존재감을 드러내자 수희는 절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희는 점차 예열되는 그의 몸을 외면해 보며 싱크대에서 손을 씻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는 거야.”

“그건 나중에 먹어도 되잖아.”

냉정한 수희의 반응에도 승조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싱크대 레버를 내려 버리더니 수희의 다리 사이에 제 오른 다리를 밀어 넣었다.


“아직 못 한 게 너무 많은데.”

“뭘 못 했는데?”

수희의 귓가에 바짝 입술을 가져다 댄 승조가 자그맣게 속살거렸다.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수희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개지기 시작했다.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수희가 승조의 말이 끝나자마자 귀를 손바닥으로 막아 냈다.


“날 어디에 뭐로 묶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뽀뽀를 한다고?”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어 수희가 중요한 말들을 자체 삭제 처리했다.


“다시 말해 줄까?”

승조가 다시금 입술을 떨어트리자 수희가 고개를 격렬하게 저으며 말렸다.


“제대로 들었으니까 그만 말해도 돼.”

“전부 해 보려면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움직여야지.”

와이셔츠 안으로 들어오는 은밀한 손이 수희를 불가항력 상태로 만들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려 수희가 주저앉으려 하자 승조가 냉큼 수희를 안아 들었다.

발이 공중에서 떨어지자 수희는 놀라 승조의 목을 끌어안았다.


“진짜 또 하려는 건 아니지? 그렇지?”

“그러니까 누가 내 셔츠 입고 있으래.”

“이거 오빠가 직접 입혀 준 거잖아.”

억울해진 수희의 토로에도 승조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능청스레 위기를 넘겼다.


“내가 그랬나?”

잠시 승조가 걸음을 멈추고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기억이 안 난다고?”

직접 입혀 준다고 해 놓고 또 했으면서……!


“방에 들어가 보면 기억날 것 같아.”

“나 더는 못 해! 안 돼!”

“가만히 누워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오빠! 나 진짜 쓰러진다고.”

동그랗게 만 주먹으로 승조의 가슴을 내리쳤지만, 그는 거대한 돌덩이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발버둥 치는 수희를 데리고 침실로 들어온 승조가 등으로 문을 밀어 닫았다.

닫힌 좁디좁은 문틈으로 수희의 마지막 발악이 들려왔다.


“나 이러다 말라 죽는다니까.”

“안 말라 죽게 내가 물도 주고 사랑도 줄게.”

“안 돼. 오빠아…….”

말소리가 점차 작아지나 싶더니 어느새 그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희미하게 들려오는 서로의 숨소리가 겹겹이 쌓였다.

그 후로 수희는 한 시간 반이 지나서야 승조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고, 꼼짝도 할 수가 없어 승조가 차려 주는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

***

그도 사람이기는 한 건지 오전 10시가 지나가는데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반듯하게 옷을 차려입은 수희가 승조의 볼에 조심히 입술을 맞추고 허리를 세웠다.


“나중에 봐.”

깊이 잠에 빠져든 그에게서 눈을 떼고 수희가 펜트하우스를 나왔다.

지하에 세워 둔 차에 올라탄 수희는 미리 찍어 둔 내비게이션을 확인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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