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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자랑스러운 내 딸 (102/118)


102. 자랑스러운 내 딸
2023.01.21.



 
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내비게이션 화면이 꺼졌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수희는 선글라스를 끼고 차에서 내렸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수희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5층의 버튼을 눌렀다.

로비를 거치지 않은 엘리베이터가 5층까지 단번에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유리문에 박힌 ‘법무법인 나인’ 상호가 보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입구에 있던 안내대 직원이 친절히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하십니까.”

짧게 고개를 숙였다 들어 올리자 직원이 상냥히 물었다.


“찾아오신 변호사분 계실까요?”

“한성구 변호사님이랑 미리 상담 예약 잡아 놨는데요.”

직원은 모니터에 띄워진 수희의 이름을 확인했다.


“오수희 씨, 맞으실까요?”

“네.”

수희가 선글라스를 바짝 올리며 답하자, 직원은 별다른 의심 없이 앞장섰다.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유명한 아홉 명의 변호사가 꾸린 회사여서 그런지, 많은 사람이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약한 터라 수희는 긴 대기 없이 상담실 안으로 들어갔다.


“변호사님 곧 상담 마치고 오실 텐데,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직원이 문을 닫고 나가자 수희가 깔끔한 화이트 톤의 인테리어를 둘러보다 자리에 앉았다.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을 때, 한성구 변호사가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푸짐한 체격에 뿔테 안경을 쓴 한성구가 남색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수희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재킷 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두 손으로 수희에게 건넸다.


“한성구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수희는 이 명함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핸드백 안에도 있었다.

명함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는 수희를 보고 성구가 곧장 본론을 꺼냈다.


“어떤 문제 때문에 상담을 오신 걸까요.”

본격적으로 상담을 시작하기 전에 수희는 자신의 정체를 밝혀야 했다.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자마자 성구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몸을 뒤로 빼냈다.


“절 아실까요?”

“지, 진짜 오수희 씨……일 줄이야.”

상담을 요청한 사람의 이름이 오수희긴 했지만, TV 속에서만 봐 오던 배우일 줄은 몰랐다.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리던 성구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말을 건넸다.


“어머님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 엄마가 제 이야기를 많이 했나요?”

“그럼요. 오실 때마다 수희 씨 이야기는 빼놓지 않고 꼭 하셨는걸요.”

내심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하던 수희가 마른 입술을 말아 물었다.


“사실은 엄마 때문에 여기 온 거예요.”

수희는 미리 챙겨 둔 것을 핸드백 안에서 꺼내 올려 두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것은 수희가 이불장 안에서 발견했던 애란이 작성했던 소장이었다.


“이 소송, 여기서 진행한 거 맞죠?”

소장을 끌고 간 성구는 내용을 확인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맞습니다. 고애란 씨께서 저희한테 맡기신 사건이에요.”

하고 싶은 말들은 미리 생각을 해 뒀는데도 불구하고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성구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수희가 말을 먼저 꺼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손가락 끝을 갉작거리던 수희가 말문을 열었다.


“엄마가 여기 와서 제 이야기를 했다고 하셨는데, 어떤 말들을 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곳이라면 자신이 모르는 애란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까지 오기에는 많은 용기와 시간이 필요했다.

어쩌면 애란이 자신의 험담을 쏟아 내는 창구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승조가 곁에 있었으면 했지만, 또 다른 마음으로는 자신에 대한 비방을 그가 듣지 않았으면 했다.

이미 애란은 떠나고 없는 사람이기에, 승조가 애란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해서였다.


“그냥 어머님들이 다 하는 이야기들이죠.”

별거 아니라는 듯 성구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어머님들보다 자식 자랑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어요.”

자식 자랑이라니. 수희는 생소하기만 했다.

늘 수희에게 칭찬보다는 질책을, 당근보다는 채찍을 주던 사람이 애란이었다.


“제 자랑을 하셨다고요?”

“자랑할 만하죠. 딸이 이렇게 잘 컸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성구가 애란을 마지막으로 본 건 오래전 일이었지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기에 기억을 되짚지 않아도 됐다.


“어릴 때부터 오수희 씨는 유독 예뻐서 주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했어요. 자기 배에서 나왔지만 가끔은 천사를 낳은 건가 싶기도 했다고 했죠.”

수희도 애란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유모차에 수희를 태워 산책하다 보면 꼭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고.

예쁘다는 말이 수희를 낳고 나서 처음으로 지겨워졌다고도 했었다.


“저한테도 가끔 한 말들이네요.”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수희는 잠시 추억에 젖었다.


“자랑할 만하죠.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배우인데.”

“아뇨. 그 정도는 아니에요.”

손사래 치는 수희에게 성구가 웃으며 말했다.


“어머님이 얼마나 자부심을 느꼈는데요. 제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배우라니까, 대한민국이 뭐냐고,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연기자라고 혼내셨어요.”

“저희…… 엄마가요?”

“그럼요. 향후 10년은 오수희 씨와 견줄 배우는 없다고 하셨는걸요. 거기에다 딸이 자기 꿈이었던 배우가 돼서 훨훨 날아가는 모습을 보는 게 너무나 행복하다고, 이제 더는 소원이 없다고 하셨어요.”

처음 듣는 애란의 속마음에 수희의 입술이 자잘하게 떨려 왔다.

눈가에 깔리는 눈물을 지워 보려 눈꺼풀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그리고, 그리고 또 뭐라고 하셨어요?”

성구는 귀찮은 기색 없이 애란과 했던 대화들을 기억나는 대로 전부 전해 주었다.

조금도 알지 못했던 애란의 진심이 수희의 가슴에 잔잔하게 차올랐다.


“그동안 전 오해하고 있었어요. 엄마가 연기를 그만두라고 하셨거든요.”

“이화정 씨를 만나고 온 이후로 어머님 마음이 많이 흔들리셨어요.”

성구도 승만과 불륜을 저지른 여자가 화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딸이 존경하는 인물이 아버지의 불륜 상대라는 걸 말하기 어려워하셨고, TV를 틀면 이화정 씨가 나와서 힘들다고 하셨어요.”

애란의 사정을 조금도 모르고 있던 수희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제야 애란이 떠나기 몇 달 전부터 TV를 보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그걸 알고 이화정 씨가 불륜을 저지른 걸 오수희 씨한테 말하겠다고 했고, 이후에는 오수희 씨가 더는 연예계에 발도 못 붙이게 하겠다고 협박까지 했다더라고요.”

“엄마가…… 그런 일을 겪으면서까지 절 지키시려고 했네요.”

“당연하죠. 딸한테 아픔을 줄 수는 없으니까요.”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수희는 후련하기보다 가슴 한편이 쓰라렸다.

그건 모든 짐을 혼자서 짊어지려 했던 애란의 쓸쓸한 마음이 전해져서였을 것이다.


“오늘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오랜 시간 성구를 붙잡고 있는 것 같아 수희가 이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닙니다. 이렇게 어머님 이야기할 수 있어서 저도 좋았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성구가 입술 끝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끝까지 연기 포기하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

“어머님께서도 하늘에서 보고 기뻐하실 거예요.”

소리 없이 미소만 지어 보인 수희가 상담실을 나오며 선글라스를 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수희는 핸드백 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무음으로 해 둔 휴대폰에는 승조에게서 온 메시지 두 개가 쌓여 있었다.


[일어났는데 안 보이네.]

[점심 먹을까 하는데, 같이 먹을 수 있어?]

마지막 메시지는 20분 전에 도착한 상태였다.

수희는 엄지로 액정을 두드려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지금 오빠 집으로 갈게. 같이 먹자.]

 

***

익숙하게 승조의 펜트하우스 비밀번호를 눌러 안으로 들어갔다.

식탁 위에 밥상을 차려 놓던 승조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빨리 왔네?”

현관을 들어선 수희는 손에 쥐고 있던 핸드백을 툭 떨어트렸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다가 갑자기 눈물을 톡 터트렸다.


“흐윽.”

울음소리에 놀란 승조는 몸에 두르고 있던 에이프런을 벗어 던지고 수희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 누가 뭐라고 했어? 왜 그래, 수희야.”

적잖게 놀란 승조가 빠르게 물음을 쏟아 내며 허리를 숙였다.

선글라스를 벗어 낸 수희가 턱을 바들바들 떨며 서럽게 울음을 머금었다.


“오빠.”

“응, 말해.”

누가 울렸는지 말한다면 당장이라도 집 밖으로 튀어 나갈 기세였다.

얼마나 서글프게 우는지 숨이 히끅히끅 안으로 말려들어 갔다.


“엄마가…… 날 자랑스러워했대.”

“…….”

“내가 연기하는 게 증오스럽고, 경멸스럽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대.”

눈동자를 빙글 돌던 눈물방울이 뺨 위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눈앞에 있는 승조가 보이지 않을 만큼 가득 찬 눈물이 시야를 가렸다.


“전, 전부 날 지키기 위해서 거짓말한 거였어.”

 

 
두서없이 쏟아 내는 수희의 말을 승조는 묵묵히 들어 주기만 했다.

수희는 어린아이가 돼 버린 것처럼 소리 내 엉엉 울며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나 더 멋진 배우가 될 거야.”

“…….”

“엄마 말대로 세상에서 제일가는 배우가 될 거야.”

“그래. 그 모습 내가 지켜봐 줄게.”

크게 고개를 끄덕이던 수희가 눈가에 올린 손을 거두며 승조의 품에 안겼다.

아직도 들썩거리는 수희의 등을 쓸어내리며 승조는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깊숙이 숨을 들이마신 수희가 울음을 그친 뒤 승조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오빠, 나 울었더니 배고파.”

눈물을 대롱대롱 매단 수희가 허기진 배를 둥글게 쓸자 승조가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일단 밥부터 먹자.”

“응.”

따끈한 밥이 차려진 밥상 앞으로 달려간 수희가 얼른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승조가 맞은편에 앉자마자 수희가 “잘 먹겠습니다.” 하고 소리를 내며 숟가락을 들었다.

승조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녀의 배부터 채워 주고 천천히 듣기로 했다.

***



“주형아, 여기.”

Bar 입구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주형이 바텐더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바텐더 테이블에는 사사건건 주형과 부딪치던 이석진이 있었다.

제주도에서 누나의 임신 스캔들로 부딪친 이후 석진과 만나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야, 불러 줘서 고맙다. 안 그래도 술 마시고 싶었는데.”

요 며칠 친구들과 연락이 잘되지 않아 매일 저녁 집에서 혼자 소주잔을 기울였다.

석진이 먼저 술을 사 준다고 연락해 오자, 내심 싫지 않았던 주형이 약속 장소로 나왔다.


“우리 안 본 지 좀 됐잖아. 술 마시면서 그동안 못 한 이야기 좀 하자고 불렀어.”

“짜식. 그래도 친구라고 챙겨 주기는.”

팔꿈치로 석진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던 주형이 메뉴판을 들었다.


“뭘 마셔 볼까나.”

이 녀석이 사 준다고 했으니까 적당히 비싼 거로 마셔 볼까?

주형이 메뉴들을 빠르게 훑어 내리고 있는데, 석진이 먼저 바텐더에게 주문했다.


“맥켈란 18년으로 주세요.”

“야! 그게 얼만데 시켜.”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진 주형이 말렸지만, 주문한 석진은 도리어 평온한 얼굴이었다.


“괜찮아. 나 돈 좀 벌었어.”

“돈? 무슨 돈을 어떻게 벌었는데?”

돈이라는 말에 주형은 흥미가 가득 차올랐다.


“말해 주긴 좀 그래…….”

곤란한 듯 석진이 고개를 돌려 버리자, 주형이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부탁했다.


“왜. 나한테도 좀 알려 줘. 나도 돈 때문에 무시하는 누나 코 좀 납작하게 만들어 주게. 2,000만 원 정도만 벌면 돼.”

“2,000만 원은 일주일 안에 벌지.”

별거 아니라는 어투에 주형은 구미가 당겼다.

만만한 석진도 하는 일이니 자신은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뭔데 그래. 나도 좀 벌면 너한테 소개비 좀 줄게.”

몇 번을 망설이던 석진이 무겁게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너 씨트코인이라고 알아?”

“알지. 그거 예전에나 잘나갔지, 지금은 영 별로지 않나?”

“내가 하는 종목은 좀 다르거든.”

“뭐야. 그건 돈 좀 돼?”

유리잔에 채워진 위스키를 단번에 들이켠 석진이 괜스레 주변을 눈동자로 흘기며 물었다.


“같이 해 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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