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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되찾은 행복 (103/118)


103. 되찾은 행복
2023.01.24.



 
수희는 이른 아침부터 이사로 정신이 없었다.

포장 이사를 부르긴 했지만 승조의 펜트하우스 안에 제 짐을 넣으려니 손수 정리가 필요했다.

승조는 거실에 쌓인 상자 하나를 열어 보더니 그대로 들고 제 침실로 향했다.

그때 주방에서 접시를 정리하고 온 수희가 승조가 들고 있는 상자를 발견했다.


“오빠, 그건 이불인데.”

잰걸음으로 걸어온 수희가 승조가 들고 있는 상자에 손을 얹었다.


“응. 알고 있어.”

당연하다는 듯 나오는 대답에 수희가 눈을 껌벅였다.


“근데 왜 오빠 방으로 가져가?”

“네 방 내 방이 어디 있어. 우리 방밖에 없지.”

허. 이 오빠 봐. 방이 저렇게 많은데 같이 잔다고?

승조가 멈췄던 걸음을 옮기자 상자 위에 있던 손이 아래로 흘러 내려갔다.

그동안의 공백을 어떻게든 채울 생각인지 승조는 한시도 수희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승조가 싫기는커녕 오히려 좋았기에 수희는 가만히 있어도 미소가 절로 새어 나왔다.

콧노래를 부르며 쌓인 짐들을 정리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이사가 끝이 났다.

이제 막 소파에 궁둥이 좀 붙이고 앉으려는데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터덜터덜 현관으로 간 수희가 현관문을 열자 검은색 헬멧을 쓴 남자가 봉지를 건네주었다.

얼결에 받아 든 수희는 묵직한 봉지의 안을 열어 봤다.

짜장면 두 그릇과 탕수육에 수희가 돌아서 가려는 배달 기사에게 말했다.


“이거 제가 안 시켰는데.”

“내가 시켰어.”

어느새 승조가 수희의 옆으로 와 쥐고 있는 봉지를 가져갔다.


“이사한 날에는 짜장면 먹어야지.”

현관문을 닫은 수희는 승조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와. 냄새 너무 좋다.”

“청소는 점심 먹고 내가 할 테니까 너는 먹고 한숨 자.”

승조가 아일랜드 식탁 위에 봉지를 내려 두자 수희가 안에 들어 있는 음식들을 꺼냈다.

허기가 져 손을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입은 쉬지 않고 달싹거렸다.


“밥 먹고 바로 자면 살쪄. 그리고 내가 오빠 집으로 들어온 건데 청소는 내가 해야지.”

“네가 집으로 들어오겠다고 한 게 아니라 내가 같이 살자고 한 거니까 다르지.”

“음. 그건 맞아. 오빠가 제발 같이 살아 달라고 소원까지 빌었지.”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보다 푸스스 웃음이 터져 버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서로의 얼굴만 보고 있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승조가 비벼 준 짜장면을 한 입 먹은 수희는 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했다.


“나 짜장면 먹는 거 진짜 오랜만인 거 같아. 1년 반 만인가?”

“1년 반 동안이나 짜장면을 안 먹었어?”

수희가 젓가락으로 짜장면을 돌돌 곱게 말며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하면서 몸 관리 계속하다 보니까 짜장면 같은 건 거의 못 먹거든.”

승조는 수희의 입가에 묻은 짜장 자국을 휴지로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참았어.”

“사람들한테 보이는 직업이잖아.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수희는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리며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신, 나 오늘 이거 다 먹고 탕수육도 소스에 푹 찍어 먹을 거야.”

“많이 먹어.”

승조는 수희가 제 것까지 먹겠다고 하면 기꺼이 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비로소 행복을 되찾은 수희는 종일 들뜬 마음이 날개를 달고 날아갈 것만 같았다.

따스한 햇볕이 찾아온 펜트하우스에는 자잘한 말소리가 햇살처럼 부서져 내렸다.

***

점심도 배불리 먹었겠다, 수희는 그간 미뤄 둔 일을 해야겠다 싶었다.

승조가 커피를 내려 와 소파에 앉아 있는 수희의 곁으로 갔다.

테이블 위에 잔뜩 올려 둔 대본을 바라보며 수희는 승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서 대본을 읽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대본을 마주하기 두려워 펼쳐 보지도 못했다.

승조는 수희에게 커피를 건네주며 옆자리에 앉았다.


“드라마랑 영화 대본들이네.”

“나 이번에 철용 오빠랑 회사 만들잖아. 바로 드라마나 영화 촬영 들어가면 좋을 것 같아서.”

“잘 생각했네. 홍보 효과도 있을 거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수희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그래서 대본 보고 제작사랑 감독님이랑 미팅할까 해.”

대본들을 훑어보던 승조는 자신의 제작사로도 들어왔던 대본들을 골라냈다.

이어 그중에서도 수희가 맡는다면 좋은 연기를 펼칠 수 있을 것 같은 작품 하나를 뽑았다.


“난 이 대본 좋았어. 여자 주인공 감정 폭이 크지 않은 대신에, 오히려 섬세하게 연기해야 해서 쉬운 작품은 아닐 거야.”

승조가 들고 있는 대본은 영화 <가시나무처럼>이었다.

워낙 작품 보는 눈이 좋으니 수희는 승조가 고른 대본이 궁금해졌다.

승조 옆에 바짝 붙은 수희가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울였다.


“오빠가 고른 작품 궁금해. 지금 읽어 줘.”

수희의 요청대로 승조는 첫 장을 펼쳐 신을 읽기 시작했다.

감정을 담지 않고 대본을 읽는 그의 음성은 오히려 연기를 입히기 쉬웠다.

그가 읽어 주는 내용을 눈앞에 그리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좋은 작품을 만나면 대본을 읽는 순간 자신이 연기하는 모습이 곧잘 그려지곤 했다.

승조가 골라 준 작품의 매력에 푹 빠져 있던 수희가 기대었던 고개를 바로 세웠다.

한 권을 전부 읽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지만, 다른 대본들도 봐야 하기에 다음으로 넘어가야 했다.


“다른 거 읽어 줄 수 있어?”

“얼마든지.”

수희가 승조의 손에 들린 대본을 가져오려던 순간이었다.

얼핏 대본에 시선이 흘러간 수희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한순간에 변한 수희의 표정에 승조가 그녀를 바라봤다.


“왜 그래?”

“잠시만, 오빠.”

수희는 승조의 손에 들려 있던 대본을 가져갔다.

한 장, 두 장, 세 장을 넘기던 수희는 테이블 위에 있는 다른 대본들을 집어 들었다.

무언가에 미친 사람처럼 대본들을 훑어 내리던 수희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이게 왜…….”

이상한 일이었다. 글자들이 온전히 제자리에 박혀 있었고, 활자들의 뜻이 그대로 전해졌다.

있을 수 없는 일에 수희가 입 속으로 대사들을 읊조렸다.

움직이는 입술 밖으로 대사가 흘러나오자 수희는 숨을 잠시 멈췄다.


“오빠.”

눈썹을 일그러트린 수희가 승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희가 대본을 읽는 걸 옆에서 목격한 승조 역시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목구멍에 눈물 같은 게 아니라 감동 같은 게 넘실거려 잇새로 빠져나오는 목소리가 떨렸다.


“나 읽어져. 대본이 읽어져.”

“수희야.”

승조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순간을 그녀가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거 꿈 아니지? 꿈꾸는 거 아니지?”

자신의 볼을 꼬집는 수희의 손가락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제 볼을 늘어트리던 수희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대본을 소중하게 품에 안은 수희가 눈물 대신 웃음을 터트렸다.


“믿기지 않아. 나 너무 기뻐, 오빠. 나 너무 행복해.”

“마음껏 기뻐해도 돼. 충분히 행복해해도 돼.”

두 눈을 꼭 감은 수희가 품 안에 집어넣은 대본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대본을 읽지 못했던 건 애란이 걸어 둔 저주 같은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애란의 진심을 알기 위한 길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날 밤, 애란이 떠난 이후 처음으로 수희의 꿈속에 찾아왔다.

수희는 초록빛 풀밭에 애란과 함께 누워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란의 팔을 베고 누운 채 수희는 그간의 일들을 조잘조잘 떠들어 댔다.

간간이 추임새를 넣으며 이야기를 들어 주는 애란은 수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주 어렸을 적, 배우 오수희가 아닌 온전히 자신을 사랑해 주던 그때의 눈길 그대로였다.


“사랑해. 사랑해, 엄마. 내 엄마라서 고마워.”

수희는 점차 사라져 가는 애란을 보며 그동안 못 한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고 전했다.

대본을 다시 읽을 수 있게 된 건, 엄마의 기일을 한 달 앞둔 날이었다.


 

***

컴퓨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주형의 두 눈에는 뻘건 핏발이 서 있었다.

벌써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주형은 컴퓨터 앞에서 떠나질 못하고 있었다.


“흐흐.”

실없이 나오는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책상 위에 올려진 커피를 입 안에 들이부으면서도 주형은 높게 찍은 빨간 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주형은 때마침 책상 위에서 울려 대는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반가운 이의 전화에 주형이 지체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야, 이석진. 진짜 네가 말한 종목 사흘 동안 오르기만 해. 수익률이 50%라고.”

주식에서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주형이 소개한 씨트코인에서는 어렵지 않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너 지금 300만 원밖에 투자 안 해서 150만 원밖에 못 벌었지만, 돈 좀 더 넣으면 제대로 벌 수 있어.]

“300만 원도 겨우 긁어모았는데 돈을 어디서 더 구하지.”

주형은 초조하기만 했다. 돈을 구하는 동안에 수익률이 고점을 찍고 내려올까 싶어서였다.


[누나한테 돈 달라고는 못 해?]

“누나랑 싸웠어. 연락 안 한 지 오래됐는데, 돈 달라고 하면 욕부터 할걸?”

한 달 동안 수희에게선 연락 한 통 오지 않았다.

용돈마저 끊어 버리자 굽히고 들어갈까도 했지만, 이제 돈 나올 구석이 생기니 그 마음마저 사라져 버렸다.


[하아.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

“뭔데.”

[너 언제 복학할 거야?]

“복학은…… 내년에 해야지.”

원래라면 2학기에 복학 신청을 해야 했지만, 미루다 보니 복학 신청 기간을 놓치게 되었다.


[너 굳이 학교 끝낼 생각 없으면 자퇴해.]

“뭐? 너 남의 인생 망하게 할 작정이야?”

[나도 자퇴했거든? 자퇴가 왜 인생 망하는 길이야.]

그러고 보니 올 초, 비슷한 시기에 석진은 자퇴하고 주형은 휴학했다.

발끈했던 주형이 볼멘소리로 투덜댔다.


“그래도…… 자퇴는 좀 그래.”

[너 150만 원 벌고 빠질 거 아니잖아. 지금 등록금 가지고 들어오면 더 벌 수 있어. 너 학교 그만두고 싶다고 계속 그랬잖아.]

머리를 벅벅 긁은 주형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 순간 고점의 끝인 줄 알았던 그래프가 천장까지 치솟자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눈앞에서 150만 원이 200만 원으로 불어났다.


“나 내일 자퇴할게. 어차피 내가 하고 싶었던 전공도 아니었으니까.”

[너 학교 근처 아파트 전세 산다며. 거기 전세금도 받아서 넣어.]

“전세금을? 전세금 빼 버리면 살 곳이 없잖아.”

[일단 친구 집에서 잠깐 지내고 더 좋은 곳으로 이사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와…….”

주형은 책상을 손바닥으로 탕, 치고 일어서더니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 새끼 똑똑한 새끼네.”

[야. 내일 돈 넣고 연락해. 나도 같이 들어가게.]

“알겠어. 내일 연락할게.”

전화를 끊은 주형은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등록금이라고 해 봤자 몇백 안 나오겠지만 아파트는 말이 달랐다.

서울 중심부와는 멀고 평수도 작은 아파트였지만, 전세금만 해도 1억 3,000만 원이었다.

전부 수희가 해 준 돈이었지만 몇 배로 불릴 테니 상관없었다.

누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주형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돈 2,000만 원 가지고 자신에게 훈계하던 수희의 모습을 떠올리며 주형이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그까짓 2,000만 원 벌어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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