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해서는 안 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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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해서는 안 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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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해서는 안 될 이야기
2023.01.28.
펜트하우스로 이사를 하자마자 수희는 기획사 설립 준비로 정신없이 바빴다.
꼭대기 층부터 아래로 4층까지 계약하고, 본격적으로 연습실과 사무실 공사 준비에 들어갔다.
수희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어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게 야박하다 싶을 정도였다.
보름 만에 사무실 인테리어 공사가 얼추 마무리되었을 때였다.
수희가 책상이 들어온 사무실을 둘러보는데, 철용이 헐레벌떡 사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벌겋게 달아오른 철용의 얼굴에 수희는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나 싶었다.
“너 이번에 VTV 연기대상 대상 후보래!”
철용이 잔뜩 흥분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3년 전에 다른 방송사에서 여자 최우수상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대상 후보에 오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얼마 전에 종영된 <패밀리>는 마지막 화에 22%를 찍으며 아름답게 마무리했다.
“확실한 거야? 소문 같은 거 아니라?”
“방송사에서 직접 연락 온 거야. 오늘 안으로 후보들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간대.”
요 며칠 사이, 꿈같은 일들이 계속 펼쳐지고 있었다.
1년 가까이 읽지 못했던 대본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우러러만 보던 대상 후보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철용이 제대로 들었을 게 분명한데 수희는 확실히 하고 싶었다.
“최우수상이 아니라 대상 맞지?”
“나도 몇 번이나 확인해 봤어. 대상이래, 대상.”
그제야 수희가 월드컵에서 우승 골이라도 넣은 것처럼 기뻐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철용과 얼싸안고 날뛰었다.
강강술래처럼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던 수희에게서 떨어지며 철용이 잔뜩 들떠서 말했다.
“나 이번에 꿈에서 금색 돼지가 나왔거든? 너 대상 받을 거라는 징조가 분명해.”
“나 대상은 바라지도 않아. 후보가 어디야.”
철용은 얼굴을 굳히며 진지하게 나무랐다.
“너 이번에 연기가 얼마나 물올랐는지 몰라? 나 <패밀리> 보고 흘린 눈물이 한강 맞먹어.”
“그건 오빠가 눈물이 유난히 많아서잖아.”
“그렇긴 한데…… 하여튼 이번에 내 촉이 그래. 너 대상이야. 미리 수상 소감 준비해 놔.”
수희의 욕심은 대상 후보까지였다.
괜히 수상까지 기대하다가 실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대상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감사해. 이번에 안 되더라도, 다음이 있잖아.”
“수희 너는 참 욕심이 없어.”
“내가 욕심이 얼마나 많은데.”
수희는 두 팔을 펼치며 텅 빈 사무실의 중심에서 좌우로 몸을 돌렸다.
“나 내 사무실 벽면 전체를 상으로 가득 채울 거야. 그만큼 열심히 할 거고, 잘할 거야. 내 실력이 닿는 선에서 욕심을 내고 싶을 뿐이야.”
가만히 듣고 있던 철용이 손뼉이라도 칠 기세로 감탄했다.
“너는 진짜 나보다 어리면서 어떻게 말을 이렇게 잘하냐?”
“내가 어릴 때부터 유식하다는 말을 좀 들었어.”
턱 끝을 들어 올린 수희가 검지로 제 이마의 중심을 톡톡 두드렸다.
바람 빠진 웃음을 짓던 철용이 그간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너 한 대표님이랑 결혼 생각은 있는 거지?”
승조와 동거를 시작하긴 했지만, 아직 결혼 이야기가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만약 승조가 결혼을 입에 담는다면 깊은 고민은 해 볼 것 같았다.
결혼을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승조와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승조의 생각이 어떤지는 한 번도 들어 보지를 못했다.
“아직 이야기해 본 적은 없어.”
“너는 어떤데?”
“난…… 결혼을 한다면 승조 오빠랑 하고 싶지.”
솔직한 대답에 철용이 수희의 어깨를 토닥였다.
“일 때문이면 너무 걱정하지 마. 옛날처럼 결혼하고 애 낳았다고 주연으로 안 써 주는 것도 아니고, 결혼하고 더 잘나가는 배우들 많으니까.”
“내 마음은 그런데, 오빠 생각은 어떤지 모르니까.”
“꼭 남자가 프러포즈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네가 결혼 생각이 있다면 먼저 말을 꺼내 봐.”
동거하다 보면 시간이 흐르고 자연스레 결혼하게 되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만 했다.
그러나 어차피 하게 될 결혼이라면 지금 당장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이미 동거도 시작했으니 결혼이라는 형태와 다를 것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빠가 아닌 남편으로 남아 주는 승조는 지금과 다를 것 같았다.
‘결혼이라.’
오늘부터 진지하게 생각해 볼까?
***
침대에 모로 누운 승조는 옆에 앉아 대본을 보고 있는 수희를 지그시 바라봤다.
눈길이 느껴졌을 만한데도 수희는 잠깐의 시선조차 던져 주지 않았다.
대본 한 권을 앉은자리에서 다 읽은 수희가 대본을 덮어 두었다.
승조는 이제야 자신에게 관심을 돌려 줄 것 같아 기대하고 있었는데, 웬걸.
협탁 위에 올려진 다음 대본을 집어 드는 게 아닌가.
“더 읽으려고?”
승조의 물음에도 수희는 천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번 주까지 미팅 잡아야 해서 다 읽어야 하거든.”
“지금 11신데?”
수희는 그제야 벽에 붙어 있는 시계를 확인하고 대본들을 챙겼다.
그제야 제 옆에 눕는가 싶어 승조가 수희에게 팔베개를 해 줄 수 있도록 팔을 펼쳤다.
그런데 수희는 이불을 걷고 침대를 빠져나가려 했다.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운 승조가 수희의 손을 붙잡았다.
“어디 가는 거야.”
“오빠 자야 하니까 서재에서 대본 마저 읽으려고.”
“더 본다고?”
늦은 저녁 일을 마치고 돌아온 승조는 침대에서 대본을 읽고 있는 수희를 발견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씻고 옆에 누웠는데, 그 자리에서 세 시간을 대본만 보고 있었다.
그동안 스스로 대본을 읽을 수 없었으니, 미뤄 뒀던 일을 시작하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 10분이라도 자신에게 집중해 주기를 바랐다.
“응. 아직 한 작품 더 읽어야 해서.”
“나 졸린데.”
같이 있자는 말을 승조가 빙 둘러 말했다.
“나는 아직 안 졸려서.”
“내가 피곤하게 만들어 줄까?”
“응?”
수희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자마자 몸이 아래로 기울었다.
그리고 몸을 뒤로 눕힌 승조의 위로 수희의 몸이 쓰러져 내렸다.
승조의 가슴 위에 손이 얹어진 수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상체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뭐야.”
“너무 피곤해서 자고 싶다는 말이 나오게 해 주려고.”
뒤로 몸을 뺄 틈도 주지 않고 승조가 입술을 부딪쳐 왔다.
가볍게 붙었다 떨어지던 입술이 점차 농도 짙게 수희를 괴롭혀 왔다.
허리를 쓸어 올리는 그의 손이 옷깃 안으로 흘러들어 오자 수희의 입술이 닫히려 했다.
그러나 노골적이기 그지없는 그의 숨결이 잇새를 파고들어 왔다.
손에 쥐고 있던 대본을 놓치자 승조가 역으로 수희를 안아 빙글 돌며 침대에 눕혔다.
그는 이미 붉게 달아오른 입술에 다시금 키스를 퍼부으며 수희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 의해 잠옷의 단추가 모두 풀려 버렸다.
뽀얀 다리 안을 타고 들어오는 손에 수희가 나른한 어투로 물었다.
“이러려고 안 자고 있었던 거지?”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빨리 눕혀 버릴 걸 그랬어.”
“누가 좋아한다고 그래.”
“그럼, 여기서 멈출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 수희가 입술을 꼼지락거렸다.
“그래도 하던 건 마저 했으면 좋겠는데.”
귀여운 투정에 승조의 입술이 기분 좋게 올라섰다.
이러니 수희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희의 뺨에 입을 맞추던 승조가 차례를 밟듯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목덜미, 쇄골, 갈비뼈. 더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수희의 미간이 점차 좁혀졌다.
하얀 시트를 부여잡은 수희가 허리를 들썩이며 턱 끝을 천장 쪽으로 들어 올렸다.
밀가루처럼 뽀얀 살결이 핑크빛으로 변하고, 달뜬 숨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입고 있던 옷을 언제 벗어 던진 건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승조가 수희를 내려다봤다.
승조를 가만히 바라보던 수희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1년 뒤에는 우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결혼은 했으려나. 아이는 아직 없겠지. 지금처럼 여전히 다정하겠지.
“무슨 생각 해?”
상념에 빠져 있던 수희가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오빠랑 결혼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
수희의 말이 전혀 예상과 달랐던 건지 승조는 놀란 듯 잠시 말을 잃었다.
그것도 잠시, 호선을 그린 입술이 살그머니 벌어졌다.
“확실한 건 지금보다 더 행복할 거야.”
“응. 그럴 거야. 분명.”
두 팔을 들어 올린 수희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깊이 파고들어 오는 그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지금의 행복을 잔뜩 만끽하고 있었다.
***
“석진아! 여기야, 여기!”
잔뜩 들뜬 주형이 Bar 입구로 들어오는 석진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석진은 피식 웃으며 주형이 있는 바텐더 테이블로 걸어갔다.
이미 얼큰하게 취한 주형이 정신을 차려 보려 눈에 잔뜩 힘을 주며 바텐더에게 주문했다.
“저, 여기서 제일 비싼 술로 한 잔 주세요. 안주도 제일 좋은 걸로 주시고요.”
석진은 굳이 주형을 말리지 않았다. 정신이 말간 석진은 해롱거리는 주형에게 물었다.
“너 돈 좀 벌었다고 쓰는 거야?”
“당연하지! 네 덕분에 내가 얼마를 벌었는데.”
주형은 석진이 시킨 대로 자퇴를 하고, 전세금까지 빼 현금을 만들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친구들한테까지 돈을 빌려 총 1억 3,820만 원을 몽땅 코인에 투자했다.
영혼까지 돈을 끌어모아 넣자마자 코인은 치솟기 시작했고, 끝없이 정점을 갱신하는 중이었다.
“얼마나 벌었길래.”
그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주형이 제 휴대폰에 앱을 켜 보여 주었다.
“2,730만 원 먹었잖아. 이러니 사람들이 주식을 안 하고 코인을 하지.”
빨간 숫자가 계속해서 올라가자 주형의 두 눈도 벌겋게 물들었다.
“흐흐. 나 진짜 이러다가 5천은 더 버는 거 아냐?”
“계속 오를 거라는 말이 있더라. 5천은 더 먹고 빼.”
“너는 이 좋은 걸 누구한테 들은 거냐?”
석진은 바텐더가 놓아 준 술잔을 들었다.
대답은 하지 않고 술을 단번에 들이켠 석진이 한쪽 입술을 비집어 올렸다.
“알려 주기 싫다는 거지? 더 안 물을게.”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기에 주형이 제 술잔을 석진의 손에 들린 빈 잔과 부딪쳤다.
석진은 바텐더에게 똑같은 술을 한 잔 더 주문하고 물었다.
“너, 누나랑은 왜 싸운 거야?”
기분 좋게 술을 마시던 주형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구시렁댔다.
“그런 건 누나도 아니야.”
“누나랑 잘 지내. 그래도 가족이잖아.”
“잘 지내긴. 살인자랑 가족이라는 것도 소름 끼친다.”
살인자라는 말에 석진이 술잔에 꽂혀 있던 시선을 주형에게로 옮겼다.
“너 지금 살인자라고 했어?”
만취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주형은 가득 채워진 술을 다시금 들이켰다.
“우리 엄마 누나 때문에 죽었거든. 아니지. 누나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지.”
“그게 무슨 소리야?”
“사실 엄마가 죽은 거에 영 미심쩍은 게 있거든.”
슬쩍 아래로 눈꺼풀을 내리 깐 석진이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었다.
“너희 어머니 죽음이 네 누나랑 관련 있다는 거지?”
“그렇다니까.”
“네 누나, 배우 오수희?”
“내가 누나가 오수희 말고 더 있냐?”
까칠하게 반응한 주형이 석진의 어깨를 제 몸으로 툭 쳤다.
그 탓에 잔에서 갈색 술이 찰랑대며 쏟아졌지만, 주형은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술을 홀짝거렸다.
“우리 엄마랑 누나랑 사이가 많이 안 좋았거든.”
“왜 안 좋았는데.”
“엄마가 누나한테 연기 그만두라고 했거든. 그거 때문에 둘이 많이 다퉜었지. 그 가운데에서 나는 죽어라 눈치만 보고.”
술을 마셔서인지 그동안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던 사실들이 술술 흘러나왔다.
“근데 하루는 엄마가 자살 소동을 벌였나 봐. 그런데 그 고집 센 누나는 연기 그만둔다고 한마디면 되는데, 끝까지 싫다고 버텼나 봐.”
“그래서 어머니가 거기서 떨어지신 거야?”
“떨어졌지. 15층에서.”
끔찍했던 그날을 생각하며 주형이 눈을 질끈 감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석진이 의문을 품었다.
“근데 그게 왜 누나 때문이야?”
바텐더 테이블에 거의 몸을 기대다시피 한 주형이 검지 하나를 들었다.
“내가 딱! 들어갔을 때, 누나가 엄마 손을 놓친 게 아니라 놓은 거 같았거든.”
“……그러니까 네 말은, 누나가 일부러 어머니의 손을 놨다?”
“둘이 아무래도 사이가 안 좋았으니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
연달아 술을 들이켠 주형이 고개를 앞으로 끄덕거리다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거의 눈이 감긴 주형이 손을 휘적거렸다.
“석진아, 내가 한 말 잊어. 내가 취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 거니까.”
느릿하게 눈꺼풀을 껌벅거리던 주형의 두 눈이 이내 전부 닫히고 말았다.
석진은 내내 주머니 안에 있던 손을 빼냈다. 손아귀에 들린 건 휴대폰이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석진은 급하게 틀었던 동영상 녹화의 중지 버튼을 눌렀다.
띵―
주형이 한 말들은 잊힐 수 없도록 사진 앨범 안에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