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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오수희의 새로운 팬 (106/118)


106. 오수희의 새로운 팬
2023.02.04.



 


“저…… 돈 좀 빌려주실 수 있어요?”

승조는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지갑을 도로 꺼냈다.


“얼마가 필요한데.”

순순히 지갑을 꺼내는 모습에 주형은 역시나 승조를 부르길 잘했다고 판단했다.


“200……. 아니 500만 원요.”

지갑 안에서 5만 원짜리 지폐를 여러 장 짚어 내던 승조가 시선을 끌어 올렸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미소를 숨기지 못하던 주형이 승조와 눈이 마주쳤다.


“방금 나한테는 별거 아닌 부탁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랬죠. 돈 잘 버시니까요. 그 정도는 저한테 주실 수 있잖아요.”

지갑을 접어 제자리에 돌려놓은 승조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다.


“처남. 아니, 오주형.”

“…….”

“내가 돈 주는 기계로 보여?”

“제가 그렇다고 했어요? 그냥 돈이 많으니까 그 돈 좀 조금 떼서 달라는 거지.”

가슴을 펼친 주형이 당당하게 나오자 승조가 어이가 없는 건지 헛웃음을 흘렸다.


“경찰서까지 갔다 왔으니 정신을 차릴 줄 알았는데 아직 멀었네.”

“뭐라고? 당신 나한테 뭐라고 했어.”

비스듬히 몸을 돌린 승조가 주형을 날 선 눈초리로 훑어 내렸다.


“나 네 친구 아니야. 예의는 차려.”

제 몸을 짓누르는 묵직한 시선에 기세 좋던 주형이 입을 다물었다.


“수희한테도 나한테 한 것보다 더 못할 거면, 지금처럼 거리 유지하고 지내. 연락도 하지 말고, 찾지도 마.”

“가족도 아니면서 왜 이래라저래라예요. 두 사람 그냥 애인 사이잖아요.”

“어떨 땐 가족보다 나은 사이지. 지금이 그렇고.”

주형의 입에서 허, 하고 헛바람이 가득 찬 숨이 튀어나왔지만, 승조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돌아섰다.

승조가 식당 앞에 세워진 차에 올라타고 나서야 주형이 불평을 씨부렁거렸다.


“잔소리할 거면 돈이나 주고 하든지.”

손에 쥐고 있던 5만 원권 지폐를 내려다보며 주형이 입술을 이로 짓이겼다.


“이석진 두고 봐. 내가 그 돈 너한테서 다시 받아 낼 테니까.”

대학교를 자퇴하고 집까지 잃었다. 제 인생을 망친 이석진을 찾아야 했다.

***

같은 시간, 병호의 저택.


“후우.”

두근대는 가슴 위에 손을 얹은 수희는 부푼 숨을 몰아쉬었다.

드높은 문이 열리자 에워싸는 긴장감을 지워 내며 수희가 안으로 들어섰다.

문 앞에서 수희를 기다리고 있던 가정부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수희가 따라서 고개를 숙이자, 가정부가 손등을 눕혀 안내했다.


“회장님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앞서가는 가정부는 일전에 수희가 들어간 적이 있었던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응접실에 앉아 있는 병호는 수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신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정부가 물러서자 수희가 안으로 발길을 들여놓았다.


“안녕하세요, 아버…… 회장님.”

자칫 아버님이라고 부를 뻔했지만, 얼른 호칭을 정정했다.

거칠게 신문을 접은 병호가 건너편을 턱짓했다.


“앉아라.”

병호가 내쫓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기며 수희가 자리에 앉았다.

가정부가 미리 준비해 둔 차를 수희의 앞에 내려 두었다. 응접실 문을 닫고 가정부가 나가자 정적이 찾아들었다.

조심스레 찻잔을 들어 올리자, 응접실에 잔 부딪치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테이블 위에 신문을 던지듯 내려놓은 병호가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보자고 할 땐 언제고 왜 한마디를 안 해.”

수희는 얼른 찻잔을 내려 두고는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았다.


“아, 어떤 말씀을 먼저 드려야 할지 생각하던 중이었습니다.”

굽신거리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만 몸이 앞으로 숙어졌다.


“그런 것도 생각 안 하고 나한테 바쁜 시간을 내 달라고 해?”

“막상 회장님 뵈니까 쉬운 말도 어렵게 느껴져서요.”

“이렇게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가장 혐오해. 그러니 무슨 말이라도 해.”

입술을 여러 번 닫았다 열던 수희가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승조 씨와의 연애를 허락해 주신 거, 감사하다는 말씀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허락한 적 없다. 어쩔 수 없이 지켜만 보는 중인 거지.”

아니꼬운 시선을 병호가 던지는데도 수희는 보일 듯 말 듯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웃는 얼굴을 하는 수희를 보자 병호는 의문이 생겨났다.


“넌 기억력이 안 좋은 거냐? 나는 네 가족을 망가트리려고 했던 사람이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얼굴을 보고 웃음이 나와?”

호흡을 가다듬으며 수희가 가지런한 음성으로 말했다.


“승조 씨 아버님이시니 절 보고 싶지 않다고 해서 매번 피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마다 어두운 얼굴로 회장님 뵙기 싫습니다.”

“걱정 마라, 너 볼 일 내가 절대 만들지 않을 테니.”

“……회장님께서도 저 많이 미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눈살을 찌푸린 병호가 앉아 있던 소파에서 등을 떼어 냈다.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

“회장님께서 방금 말씀하셨죠.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혐오하신다고.”

“…….”

“절 미워하는 데 회장님의 귀한 시간 보내지 않으셨으면 해서입니다.”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쭈뼛거리던 수희는 병호와 맞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병호는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고 싶었지만, 수희의 말에는 틀린 곳이 없었다.

결국 병호가 목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돌려 버렸고, 자신의 말을 마친 수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희가 숙인 상체를 채 들어 올리기도 전에 병호가 탐탁지 않은 어투로 말했다.


“내가 지켜볼 거다. 너희 둘, 얼마나 오래 만나는지.”

대답 없이 수희가 돌아서 응접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병호는 자리를 지키고 앉아 아직 식지 않은 차를 마시다 입을 열었다.


“양 실장 밖에 있나?”

“네, 회장님.”

곧바로 대답한 양 실장이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병호는 수희가 앉아 있던 자리를 보며 양 실장에게 지시했다.


“오수희가 찍었던 작품들 좀 봐야겠는데. 최근에 드라마 하나 찍었다고 했었지.”

“드라마를요?”

양 실장은 적잖게 놀란 듯 보였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 자체가 쓸모없는 시간 소모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 넓은 집 안에 TV가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뉴스는 신문을 통해서도 충분히 볼 수 있으니 굳이 TV를 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런 병호가 직접 드라마를 보겠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음에 안 들긴 해도 어쨌든 승조가 만나는 애니, 어떤 작품을 찍는지 내가 봐 둬야겠어. 우리 FL 그룹 이미지를 망칠 만한 작품들이라면 내가 제재도 가해야 할 테니까.”

병호의 깊은 뜻을 늦게 알아차린 양 실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에 찍은 <패밀리>라는 드라마로 준비해서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래. 준비되는 대로 내 방으로 가져와.”

양 실장이 응접실을 나가려다 돌렸던 발길을 제자리에 가져왔다.


“만약에 FL 그룹 이미지에 영향을 끼칠 만하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알 수 있을까요?”

곰곰이 생각하던 병호가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그 일, 그만두게 해야지.”

배우 며느리가 싫다면 일을 그만두게 하면 될 일이었다.

차라리 내조 잘하는 며느리가 기사에 내기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병호가 한쪽 입술을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



“아버지를 만나고 왔다고?”

수희에게 들은 게 없던 승조가 쥐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 두었다.

그가 썰어 준 스테이크를 입에 넣은 수희는 눈만 깜박거렸다.

미리 말하지 않고 병호를 만나고 온 건 승조가 말릴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회장님이 잘해 주셨어. 저번이랑 다르게 화도 한 번도 안 내셨고.”

“그래도 너한테 못 할 말들 했을 거 아냐.”

수희가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냐. 이번에는 차 대접까지 해 주셨는데?”

“……저번에는 차 대접도 안 해 줬다는 거야?”

아차차. 실수하고 말았다.

이걸 어떻게 빠져나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승조의 눈에는 훤히 들여다보였나 보다.


“수희야. 꾸며 낼 생각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만 말해.”

“화났어? 오빠한테 이야기도 안 하고 가서.”

시무룩해진 수희의 어투에 승조는 바로 표정을 풀 수밖에 없었다.


“난 걱정해서 그런 거지.”

“거짓말 아니고 이번에는 정말 별다른 말 안 하셨어.”

“만나서 무슨 이야기 했어?”

고기를 오물오물 씹어 넘긴 수희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오빠랑 내 사이 허락해 줘서 고맙다고.”

“아버지가 우리가 헤어지길 바랐는데도?”

“어쨌든, 지금은 지켜봐 주고 계시잖아.”

수희의 마음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기에 승조는 가만히 고개만 주억거렸다.

내심 제 아버지가 한 일을 용서해 주는 것 같아 고맙고 미안하기도 했다.


“내가 너한테 많이 고마운 거 알지?”

미안하다는 말은 굳이 넣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수희도 알 테고, 연인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니 덮어 둔 것이다.

수희가 검지 하나를 들고 추처럼 좌우로 흔들었다.


“맨입으로는 안 되지.”

“뭘 원하시는데요?”

“고기 정도는 얻어먹어야겠죠?”

수희가 식탁 위에 놓인 접시를 바라봤다.

자그맣게 웃음을 터트린 승조가 제 접시 위에 놓인 소고기 한 점을 수희의 접시로 옮겨 주었다.


“많이 먹어. 내가 살 테니까.”

반달로 접힌 눈으로 승조를 바라보며 수희가 포크를 움직였다.

수희와 함께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는 이 시간이 승조의 하루 중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

***

밤 11시가 넘은 시간, 퇴근했던 양 실장이 병호의 방문을 두드렸다.


“회장님, 양 실장입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 위에 놓인 컴퓨터 화면이 병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병호는 안경을 낀 채 모니터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이게 왜 다음 편으로 안 넘어가지?”

“어떤 거 말입니까?”

병호의 옆에 선 양 실장은 허리를 숙여 모니터를 바라봤다.

이미 <패밀리>의 5화까지 본 병호가 마우스로 다음 화 버튼을 세차게 누르고 있었다.

설마 이 늦은 시간에 자신을 부른 이유가 <패밀리>의 다음 화가 궁금해서일 줄이야.

웬만한 일이 아닌 이상 당황하지 않는 양 실장마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왜 안 되는 거냐니까?”

이제 보니 안경을 쓴 이유도 좀 더 자세히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였다.


“아, 제가 결제를 하지 않아서 그럽니다.”

“그 결제는 어떻게 하는 거야?”

양 실장은 얼른 병호의 옆에 있는 마우스를 가져갔다.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병호의 컴퓨터에 드라마를 볼 수 있도록 VTV 플레이어를 열어 둔 것이 오후 5시였다.

그런데 여섯 시간 만에 결제해 둔 드라마 다섯 편을 모두 시청한 뒤였다.

그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쉬지 않고 드라마를 전부 봐야 가능한 일이었다.


“다 됐습니다.”

 

 
양 실장이 마우스에서 손을 떼자마자 병호가 얼른 다음 화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바뀌고 다음 화가 재생되자 만족스럽게 미소 지은 병호가 의자에 기대며 관람 준비를 마쳤다.

정말로 이런 일로 늦은 시간에 자신을 불렀는지 의구심이 든 양 실장은 병호의 뒤편에서 대기하고 서 있었다.

병호는 모니터에 비친 양 실장이 거슬리자 고개를 뒤로 획 돌렸다.


“거기 서서 뭐 해. 가 보지 않고.”

“아, 내일 뵙겠습니다.”

반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들어 올린 양 실장이 빠른 걸음으로 서재를 나왔다.

정말 자신을 부른 이유는 단지 다음 화가 궁금해서였다.

믿을 수 없는 일에 양 실장은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1층으로 내려온 양 실장은 주방 정리를 마치고 나온 가정부와 마주쳤다.

가정부가 눈인사하고 지나치려는데 양 실장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혹시, 회장님 저 방에서 쭉 계셨습니까?”

“그럼요. 양 실장님 가고 나서 저 방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오셨어요.”

“그렇습니까?”

“뭐가 그렇게 바쁘신지 다과도 안에서 드시겠다고 해서 넣어 드렸어요.”

계단 아래에 선 양 실장이 2층에 있는 서재를 올려다봤다.


“그 일, 그만두게 해야지.”

분명 몇 시간 전만 해도 수희의 일을 그만두게 하겠다던 병호였다.

드라마와 영화는 시간 아까운 헛짓거리라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그런데 그 헛짓거리에 푹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걸 보니 양 실장은 고개를 절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오수희 씨 팬 한 명 생기셨네.’

병호가 수희의 일을 그만두게 하기는커녕, 팬 카페에 가입하지 않으면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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