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 내 남자의 스캔들 (107/118)


107. 내 남자의 스캔들
2023.02.07.



 
VTV 연기 대상을 바로 나흘 앞둔 날이었다.

승조는 매번 퇴근 후 곧장 가던 집이 아닌 FL그룹 소유의 백화점을 찾았다.

긴 다리를 휘적이며 걷자 검은색 코트 끝이 펄럭댔다.

단지 대리석이 박힌 로비를 걷는 것만으로도 백화점 내부 사람들의 시선을 쓸어 갔다.

승조는 다른 곳을 쳐다도 보지 않고, 금색 로고가 박혀 있는 브랜드를 방문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승조의 얼굴을 알고 있는 직원이 평소보다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고객님.”

디스플레이되어 있는 액세서리들을 둘러보는 승조에게 직원이 친절히 물었다.


“찾으시는 제품 있을까요?”

“반지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고객님께서 직접 착용하실 건가요?”

승조는 진열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답했다.


“여자친구 것도 같이 사려고 하는데요.”

“이쪽으로 오시면 저희 브랜드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제품으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직원을 따라가던 승조의 귓가에 그다지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승조 씨?”

진열대에서 시선을 떨어트린 승조가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수많은 액세서리들을 착용해 보고 있는 나영이 서 있었다.

뭐가 그리 반가운지 나영은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 말을 걸어 왔다.


“우연이죠? 아닌가? 운명인가요? 이런 곳에서 만나고.”

승조는 나영을 무시한 채 제 앞에 서 있는 직원에게 말했다.


“제품 보여 주시죠.”

“아, 네. 알겠습니다.”

직원이 진열대 안에 들어 있는 반지를 꺼내며 설명했다.


“심플한 디자인이지만 포인트 컬러가 들어가 있어서 흔하지 않아 인기가 많습니다.”

“색상 없는 것도 볼 수 있습니까?”

“그럼요.”

들고 있던 반지를 트레이 위에 올려 둔 직원이 다른 반지를 보여 주려던 때였다.


“커플링 찾아요? 승조 씨는 그런 거 전혀 안 할 줄 알았는데.”

나영이 승조 옆에 딱 달라붙어 끼어들자 직원이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눈에 띄게 표정이 굳어진 승조는 나영에게 몸을 틀었다.


“남 신경 쓰지 말고 박나영 씨 보던 거 보시죠.”

“어떻게 승조 씨가 남이에요. 같이 일도 했는데.”

“남입니다, 박나영 씨랑 나는.”

넘어서지 말라고 선을 그어 놓는데도 나영에게는 전혀 타격이 없었다.

나영이 순진무구의 탈을 쓰고 승조를 빤히 올려다보자 그가 직원에게 말했다.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돌아선 승조가 직원의 인사를 받으며 나오는데, 그 뒤를 나영이 졸졸 따라붙었다.


“오랜만에 보니까 더 반가운데. 승조 씨는 아닌가 봐요.”

그래도 자신을 무시하는 승조 때문에 멋쩍긴 한 건지 나영은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눈치를 봤다.

눈살을 찌푸린 승조가 나영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닌 것 같으면 이 정도만 하고 그만 따라붙어야 하지 않나?”

시선 하나 던져 줬을 뿐인데 나영은 새초롬한 얼굴로 투덜댔다.


“좀 서운해지려고 해요. 나는 승조 씨 생각해서 FL 몰이랑 일도 계속한다고 했는데요.”

“제 생각 하지 마요.”

“네?”

“난 박나영 씨 생각해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 같습니까?”

단단한 가시가 박혀 있는 말이 나영을 이리저리 찔러 대는 것 같았다.

주먹 쥔 손을 바들바들 떨어 대며 반박하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자신에게 무례한 남자에게 말 한 번 더 걸어 보려고 애쓰는 자신의 모습이 처절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회사에서 마주쳤을 땐, 박나영 씨 사회적 지위도 있을 테니 알은척, 할 겁니다.”

“…….”

“그런데 이렇게 밖에서 봤을 땐 박나영 씨도 날 좀 무시해 주시죠.”

승조가 나영의 두 눈을 똑똑히 보며 한 글자씩 끊어 말했다.


“제발.”

“지금 승조 씨 무시해 달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부탁하면 무시해 줄 겁니까? 그럼 부탁하죠.”

“됐거든요?”

아무리 자존심이 바닥이라고 해도 긁어모으면 페트병 하나 정도는 나올 것이다.

그런데 승조는 그 페트병 하나도 날려 먹을 만큼 나영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머리가 없는 천치가 아닌 이상 승조가 자신에게 쌀 한 톨의 감정도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자신을 혐오하고 멀리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민망하고 창피해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당장 승조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승조 씨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요.”

“감사하네요.”

“하.”

끝까지 자신의 관심이 불쾌하고 불편하다는 티를 내는 승조에게 헛웃음밖에 터트리지 못했다.

그에게 비난을 날릴 수 없는 건 승조는 한결같이 자신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해서였다.

Rrrrr―

그때 마침 울리는 전화에 승조가 검은색 재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통화 버튼을 누른 승조는 나영을 대하던 때와는 전혀 다르게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응, 수희야.”

역시나 전화 상대는 수희였다. 나영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승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승조는 수희와 통화를 계속하며 나영에게 눈짓했다.

출구 쪽을 가리키는 것을 보니 이야기는 끝났으니 갈 길 가라는 뜻으로 보였다.

시뻘게진 얼굴을 획 돌린 나영이 승조를 지나쳐 갔다.


[오빠 어디야?]

승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떼어 냈다.


“일 때문에 잠시 나와 있어.”

[연말이라 더 바쁘지? 출장은 잡힌 거 없어?]

수희는 바쁜 와중에도 일이 끝나면 틈틈이 전화하곤 했다.

아마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었으니 그 시간을 전화로 채우려는 것 같기도 했다.


“출장은 따로 잡힌 거 없어. 한동안 본사 쪽에만 신경 쓸 거야.”

[가더라도 연기 대상은 꼭 보고 가야 해.]

수희가 전화를 건 목적을 알아차린 승조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올라섰다.


“그게 걱정돼서 전화했구나. 내가 너를 두고 갈까 봐?”

[내가 안 보내 줄 거야. 옆에 꼭 붙어서 안 놔줄 거야.]

“그래. 절대 놓지 말고 꼭 붙잡고 있어.”

다감한 음성은 나영을 대할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가 없었다.

수희의 존재가 그랬다. 대체 불가능, 그 누구라도 수희의 존재를 대신할 수 없었다.


[나중에 나 귀찮다고 하는 거 아니지?]

“오수희가 어떻게 나한테 귀찮을 수가 있어.”

[기분 좋은 말만 해 주니까 좋네.]

전화기 너머로 수희의 목소리가 아닌 철용의 음성이 섞여 들려왔다.

아무래도 촬영이 재개되는 듯 수희가 급하게 통화를 끊으려 했다.


[오빠, 오늘 집에서 봐.]

“응. 나중에 봐.”

짧은 통화가 아쉬운 듯 승조가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휴대폰을 코트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은 승조가 자신이 나왔던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

집으로 돌아온 승조는 심각한 얼굴로 태블릿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화점에서 나온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뜬 기사 하나가 골머리를 앓게 했다.

승조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태블릿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

[배우 오수희, 연인인 사업가 H 씨와 헤어졌나?]

굵은 타이틀 아래, 몇 시간 전에 매장 밖으로 나와 나영과 잠깐 대화하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커뮤니티에 먼저 승조와 나영의 사진이 퍼졌고, 기자들은 그 사진을 그대로 퍼 날랐다.

더는 나영과 엮일 일이 없다고 여겼기에 이렇게 떠들썩하게 기사까지 나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띠. 띠. 띠.

밖에서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에 승조가 들고 있던 태블릿을 덮어 두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수희는 거실에 있는 승조를 발견하고 싱긋 웃었다.


“나 기다리고 있었어?”

“응. 일이 좀 늦게 끝났네.”

“인터뷰도 한 건 있어서 좀 걸렸어.”

기사를 아직 보지 못한 건지 수희는 입가에 올린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저녁은 먹고 왔지?”

“응. 철용 오빠랑 인터뷰 전에 간단하게 먹었어.”

“잘했어.”

“나는 씻어야겠다.”

그런데 어딘가 묘하게 수희가 제 시선을 피하는 게 느껴졌다.

만약 기사를 본 거라면 추궁하거나 화를 냈을 텐데, 아무런 언급도 없는 걸 보니 아직 기사를 보지 못한 듯했다.

수희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침실로 들어서는데, 문이 닫히기도 전에 안으로 승조가 들어왔다.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거는 수희는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집중했다.

달그락거리는 옷걸이 소리만 들려오고, 침실로 들어온 승조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수희는 낮게 가라앉는 침묵을 깨트렸다.


“아까 나 인터뷰 끝나고 철용 오빠가 기사 하나를 보여 주더라?”

옷장 문을 닫은 수희가 승조를 향해 돌아섰다.


“오빠가 나영 씨랑 있는 사진 말이야.”

생각보다 담담하게 꺼내는 이야기에 승조가 해명했다.


“우연히 마주치게 된 거야.”

“알아. 오해 안 해.”

예전과 달리 수희는 어투에선 기분 나쁜 구석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신을 대하는 모습에 승조는 조금 의아해졌다.


“기분 나쁘지 않았어?”

수희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둘 사이가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걸 내가 다 아는데 왜 기분이 나빠.”

“나는 네가 또 시간이라도 가지자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네.”

바람 빠진 웃음을 터트린 수희가 팔짱을 끼며 툴툴댔다.


“오빠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는데, 전처럼 내가 흔들리기라도 할 줄 알았어?”

“내가 우리 수희를 잘못 알고 있었네.”

“그럼.”

수희가 큰소리를 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오빠랑 어떤 시간을 겪었는데 또 흔들리겠어. 이런 걸로 흔들리면 그건 내가 오빠를 가질 자격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

부쩍 어른이 된 듯한 수희를 보니 승조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수희를 걱정하며 전전긍긍하고 있던 자신이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나 믿어 줘서 고마워.”

“근데 오빠.”

수희가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승조를 지그시 바라봤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승조가 뒤에 올 말을 기다렸다.


“그래도 잘못한 건 알고 있지?”

“아. 그런 상황 만든 건 내 잘못이라는 건 알지.”

“알면 벌은 받아야지.”

두 손을 뻗어 온 수희가 승조의 가슴을 밀어냈다.

기우뚱 뒤로 기운 몸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리고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울 틈도 없이 수희가 승조의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제 허벅지 위를 짓누르자 승조의 미간 사이가 움찔하고 좁혀졌다.


“수희 너…… 술도 마시고 온 거야?”

하지만 알싸한 알코올 향은커녕 과일 향처럼 단내만 풍겨 왔다.

술기운이 아니라면 그녀에게 덮쳐지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을 줄 알았다.


“완전 맨정신인데.”

수희는 한마디 툭 던지고는 승조의 넥타이를 붙잡아 끌어당기며 단숨에 거리를 좁혀 왔다.

코끝이 부딪치는 거리에, 승조의 눈동자가 찰나에 흔들렸다.


“나 사실 쿨한 척해 봤어. 아무리 그래도 내 남자의 스캔들을 보는데 어떻게 기분이 좋아.”

“……내가 어떻게 해 줄까?”

“오빠는 나한테 많이 혼나야겠지?”

 

 
반쯤 감긴 눈으로 수희가 승조를 지그시 바라보며 그의 입술을 머금었다.

넥타이를 붙잡힌 탓에 승조는 속절없이 수희에게 입술을 빼앗기고 말았다.

촉촉하게 달라붙는 입술이 평소와는 달리 적극적이고 조금 짓궂기도 했다.

이렇게 혼나는 거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수희가 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 희롱하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침대에 얹어져 있던 승조의 손이 점차 위로 올라와 수희의 허리에 닿기 전이었다.

찰싹.

수희의 손이 가차 없이 승조의 손등을 내리쳤다.


“벌을 받으려면 가만히 있어야지.”

“네가 날 만지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승조가 성인군자라 하더라도 불가능할 것이다.

승조의 어깨를 밀어내 침대에 완전히 눕힌 수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렸다.


“그러니까 벌이지.”

지금도 참기 힘들건만 수희가 제 손으로 입고 있던 옷을 한 꺼풀씩 벗어 냈다.

도저히 가만히 참고 있기가 힘들어 승조는 손등으로 눈을 가려 버렸다.

아……. 오수희.

인내심 테스트도 이렇게 혹독하게 할 필요가 있나.

애초에 나영을 만나는 일이 없었더라면 이런 벌을 받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단죄를 받아야 하는 게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제 몸은 역전의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바스락 소리가 멎고, 수희의 손이 와이셔츠 안을 파고들자마자 이성도 함께 끊어져 버렸다.


“아!”

아래에 누워 있던 승조가 몸을 세우자 수희의 몸이 자연스레 뒤로 넘어갔다.

무언가를 해 볼 틈도 없이 승조가 수희의 입술에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무차별하게 공격해 오는 키스에 버겁게 숨을 내쉬며 수희가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벌 받아야 하는 건 오빠야.”

“봉사로 사죄를 해 볼까 해.”

내가 그 봉사 원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수희가 반박할 틈도 없이 승조의 손이 말캉한 살들을 붙잡았다.

전세 역전, 말 한마디 하지 못하게 수희의 입술이 승조로 인해 봉해지게 됐다.


“네 기분이 풀릴 때까지 열심히 봉사해 볼게.”

수희는 작게 탄식을 터트렸다.

도발할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다.

근데 그걸 깨달았을 땐 이미 포식자에게 잡아먹힌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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