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 감추고 싶었던 모습 (108/118)


108. 감추고 싶었던 모습
2023.02.11.


길게 뻗은 레드 카펫 옆으로 수많은 사람이 차단 봉 앞에 다닥다닥 붙어 서 있었다. 레드 카펫 끝에 밴이 도착할 때마다 눈부신 카메라 조명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주인공은 가장 마지막에 나타난다고 했던가. 연기 대상의 화려한 막이 열리기 전에, 밴 한 대가 레드 카펫 앞에 도착했다.

밴 밖으로 나오는 하얀 다리에 다들 누가 내리는지 주시하고 있었다. 검은색 민소매 드레스를 입은 수희가 내리자, 차단 봉이 덜컹거릴 정도로 사람들이 앞으로 쏟아져 나왔다.


“꺄아아아! 언니 너무 예뻐요.”

“한 번만 봐 주세요!”

“언니 사랑해요!”

수희가 계단을 밟고 올라갈 때마다 팬들이 우렁찬 목소리를 냈다.

미소를 지은 수희가 손을 한 번 흔들자 팬들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몸을 뒤로 뉘었다.

대상 후보에 오른 수희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팬만이 아니라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수희가 포토 월에 서자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기자들이 연달아 셔터를 눌러 댔다.

단연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수희가 타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 앉아 라면으로 한 끼를 때우던 주형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젓가락을 테이블 위에 내동댕이친 주형은 온갖 짜증을 내며 신세를 한탄했다.


“초반에라도 돈 뺐으면 몇백은 건지는 건데.”

석진이 사라진 이후로 땡전 한 푼 없이 매일 라면과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전세금을 날리고 학교까지 그만뒀으니 누나가 가족의 연을 끊자고 할까 봐 겁이 나 연락도 못 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돈이 필요하긴 했지만 곧 죽어도 아르바이트는 하고 싶지 않았다.

제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돈을 벌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Rrrrr―

삭막한 분위기 속에서 울려 대는 벨 소리에 주형이 별 기대감 없이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역시나 전화를 걸어 온 건 돈을 빌린 친구 녀석 중 한 명이었다.

끈질기게 울리는 휴대폰을 덮으려던 찰나, 전화가 뚝 끊겼다.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데, 친구에게서 메시지 하나가 들어왔다.


[도둑놈 새끼. 돈 두 배로 주겠다더니, 연락 씹고 잠수냐?]

자존심을 긁는 메시지에 주형은 참지 못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끝까지 전해지기도 전에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오주형! 너 내 돈 어쩔 거야!]

“내가 왜 도둑놈이야! 내가 갚는다고 했지. 내가 안 갚는대?”

버럭버럭 터지는 소리에도 상대방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무려 재수 학원에 쓸 비용을 대 줬으니 눈이 돌아갈 만했다.


[그러니까 언제 갚을 거냐고. 일주일도 훨씬 지났잖아.]

“곧 갚는다고. 갚을 거라고, 새끼야!”

[너 애들한테도 돈 빌리고 쌩까고 있다며. 갚을 수 있는 거 맞냐?]

잠시 주춤한 주형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내 누나가 오수희야. TV 틀면 다 나오는 오수희. 날 보증할 사람이 공인이야. 그런데도 날 의심하냐? 어?”

오히려 돈을 빌린 주형이 당당하게 나오자 상대방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형의 말에 틀린 게 없었다. 지금 당장 TV를 틀어 채널을 몇 번 돌리지 않더라도 수희를 볼 수 있었다.


[알았으니까. 당장 갚아.]

“알았다고. 알았으니까 조용히 기다리고 있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린 주형은 휴대폰 전원을 완전히 꺼 버렸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주머니 안에 넣은 뒤 제 머리를 붙잡고 벅벅 긁어 댔다.


“아오! 진짜, 이석진!”

이석진만 나타난다면 모든 게 끝날 일이었지만, 석진의 집을 아는 친구들이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그날 이후로 휴대폰 번호까지 바뀌어 전화도 메시지도 남길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주형이 제 화를 참지 못하고 의자를 발로 찼다.

나뒹구는 플라스틱 의자를 바라보던 주형이 시선을 끌어 올렸다.

우연히 머문 시선 끝에 익숙한 사람이 들어왔다. 잘못 본 건가 싶어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그런데도 멀지 않은 곳에서 건널목을 건너고 있는 사람의 형상이 변하지 않았다.


“이석진.”

분명히 이석진이었다. 틀림없이 이석진이었다.

주형은 소리를 내지르면 석진이 도망칠까 봐 얼른 그 뒤를 밟았다.

신호등 불이 바뀌기 직전에 주형이 건너편으로 뛰어갔고, 아무것도 모르는 석진은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석진을 놓칠까 싶어 주형은 잠시도 쉬지 않고 다리를 움직였다.

병원 로비로 들어서려는데 밖으로 빠져나오는 사람들 때문에 주형은 잠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섰을 땐, 석진의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로비 이곳저곳을 누비던 주형은 엘리베이터에 막 올라타는 석진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이석진!”

반대편에서 소리를 질러 보지만, 석진은 들리지 않는 건지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힘껏 내달린 주형이 엘리베이터를 급히 잡아 보지만 이미 위로 올라간 뒤였다.


“X발!”

욕지거리를 내뱉은 주형이 발만 동동 구르다 엘리베이터 숫자판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위로 올라가던 엘리베이터가 4층에서 멈춰 섰다.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5층을 건너뛰고 6층에서 한참 엘리베이터가 머물렀다.

석진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던 사람은 두 명이 더 있었다.

석진이 어디에서 내린 건지 알 수 없으니 무작정 뒤져 보는 수밖에 없었다.

4층에서 내린 주형은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석진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간호사실, 중환자실, 병실을 한 바퀴 돈 주형은 자신이 탔던 엘리베이터로 돌아왔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석진이 있을 만한 곳은 없었다.


“어디 간 거야.”

엘리베이터에 다시 올라탄 주형이 6층으로 올라갔다.

4층과 달리 병실이 많은 6층 복도에는 많은 사람이 오갔다.

이 많은 사람 중에서 석진을 찾으려니 머리가 터지려고 했다.

머리를 두 손으로 벅벅 긁던 주형은 일단 보이는 대로 병실 안을 들여다봤다.

병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봤지만 조금도 상관없었다.

돈 앞에선 민망한 것도 없었다. 전 재산을 털어 간 놈을 잡을 수 있다면, 이 정도쯤이야 별거 아니었다.

병실을 들여다보며 복도를 거닐던 주형은 물병을 들고 나오는 이와 눈이 마주쳤다.

주형과 반대편에 서 있는 이의 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찾았다. 이석진.”

어금니를 바득 갈던 주형이 석진에게 뛰어갔고, 들고 있던 물병을 내동댕이친 석진이 비상구를 향해 뛰어갔다.

눈앞에 석진이 있는데 놓칠 수는 없었다. 빠른 속도로 석진과의 거리를 좁힌 주형이 손을 뻗었다.

주형이 안간힘을 써 보지만, 석진의 옷깃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비상구 문이 열리고 석진이 그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주형이 몸을 내던져 석진의 뒤를 덮쳤고, 석진은 채 한 발을 빼기도 전에 앞으로 엎어졌다.

주형의 밑에 깔린 석진은 빠져나가려 발악했다. 안간힘을 써 봐도 체구가 상대적으로 큰 주형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제 밑에 1억 4,120만 원이 깔려 있었다. 눈에 흙이 들어간다 해도 절대 놓아줄 수 없었다.


“내 돈 먹었으면 해외로라도 도망가야지. 간 크게 아직 한국에 붙어 있었네?”

“놔! 놓으라고!”

“내가 미쳤다고 놓냐?”

주형이 엎어져 있는 석진의 멱살을 잡아 앞으로 돌렸다.


“잘 먹고 잘살았나 보다? 얼굴이 번질번질하네.”

멱살을 부여잡은 주형의 손을 떼려 해도 조금도 꼼짝하지 않았다.

석진은 눈알을 굴리며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석을 찾아봤다.

좀 더 강하게 석진의 옷깃을 움켜잡은 주형이 비꼬아 댔다.


“쥐새끼 같은 놈 아니랄까 봐 도망갈 구멍이라도 찾냐?”

“…….”

“근데 네 새끼가 들어갈 구멍이 있을까? 있어도 내가 다 막아 버릴 건데?”

주형은 입 안에 있는 침을 끌어모아 석진의 얼굴 옆에 툭 뱉어 냈다.


“친구 등에 칼 꽂은 더러운 새끼. 한때 널 친구라고 생각한 내가 등신이었다.”

“네가 날 친구라고 생각했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잔뜩 빈정거리는 어투에 주형의 눈이 돌아 버렸다.


“넌 지금 나한테 무릎을 꿇고 빌어도 모자라. 알아?”

“무릎 꿇고 빌면 없던 일로 쳐줄 거냐?”

“아니? 사과는 받고 돈도 돌려받아야지.”

“내가 왜?”

“뭐?”

능청스레 석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넣으라고 협박이라도 했어? 네가 먼저 알려 달라며. 그래서 알려 줬을 뿐인데 내가 왜 너한테 돈을 줘?”

“네가 나한테 작업 친 거잖아! 이제 와서 발뺌해?”

“증거 있어? 내가 작업 쳤다는 증거.”

눈이 시뻘게진 주형이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너도 찔리는 게 있어서 도망쳤을 거 아냐! 어?”

한층 높아진 목소리에 석진이 근처에 있는 병실들을 눈으로 훑었다.

그러다 한 병실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차분히 가라앉은 어조로 읊조렸다.


“나가서 말해. 여기서 이러지 말고.”

“왜. 도둑놈 새끼가 쪽팔린 게 뭔지는 아냐?”

석진의 멱살을 붙잡은 채 상체를 들어 올린 주형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배에 잔뜩 힘을 준 채 외쳤다.


“여기 좀 봐 주세요! 여기 내 돈 훔쳐 간 도둑놈 있어요!”

“야! 오주형!”

“왜! 이석진!”

버럭 내지르는 소리를 갚아 준 주형이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네가 암이라도 걸렸다고 하면 위로금으로 그 돈 줄게.”

“…….”

“대신 아니면 넌 내 손에 죽는 거야, 이 X새끼야!”

주형의 난동에 병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튀어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리자 석진이 조급한 마음에 덩달아 소리를 쳤다.


“진상 짓 그만하고 밖에서 이야기하자고!”

“석진아?”

석진은 주형의 등 뒤로 보이는 얼굴에 하얗게 질려 버렸다.


“누나.”

자그맣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주형이 고개를 돌리는데, 주형 역시 올라섰던 입매가 아래로 떨어졌다.

주형과 석진을 번갈아 보는 사람은 병원복을 입은 여성이었다.

링거대를 끌고 온 여성은 무슨 병을 가진 건지 머리를 삭발한 상태였다.

그대로 굳어 버린 주형을 밀어내며 석진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세웠다.


“누나, 들어가자.”

석진이 왜소한 제 누나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석진의 누나는 무작정 자신을 끌고 가는 석진의 팔을 붙잡으며 주형을 눈으로 흘겼다.


“너 왜 저 사람이랑 싸우고 있었어? 무슨 일 있어?”

방금까지만 해도 석진을 몰아붙이던 주형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눈의 초점이 휘청거린 석진이 주형의 입을 막기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하려 했다.

그러나 주형의 입술이 먼저 벌어졌다.


“석진이 친누나예요?”

석진의 누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쪽은 누구세요?”

분노를 감추지 못하던 주형은 아픈 석진의 누나를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옷깃 밖으로 나온 팔뚝과 다리는 앙상했고, 얼굴은 핏기 없이 허옇게 번져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품고 있는 병이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누나, 가자. 가서 이야기해.”

석진은 급하게 제 누나의 팔을 끌어당기며 도망치듯 병실로 향했다.

차마 아픈 누나 앞에서 모든 걸 실토할 수 없었던 주형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6인실 병실이 석진의 새로운 거처였다.

1년 전 누나의 병이 재발하게 되면서 함께 살던 원룸 전셋집을 나오게 되었다.

항암 치료를 막 끝낸 누나의 병원비에 석진은 돈을 벌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뛰어들었다.

더러운 일이라도 상관없었다. 아픈 누나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그 사람 네 또래 같던데, 친구랑 싸운 거야?”

간이침대에 앉아 있는 석진을 내려다보며 누나가 물었다.


“……누나한테 그런 모습 보여서 미안해.”

석진은 차마 제 누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어떻게 사람이랑 다 친하게 지내니. 안 맞으면 싸울 수도 있고, 절교도 할 수 있는 거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누나가 석진의 어깨를 토닥였다.

축 처진 석진의 어깨를 바라보던 누나는 괜스레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다.


“석진아. 사실 누나 꿈도 배우였다?”

고개를 들어 올린 석진은 제 누나의 시선을 따라갔다.

냉장고 위에 달린 자그마한 공용 TV에서는 VTV 연기 대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침 화면에 잡힌 수희는 환한 미소를 보이며 시상식에 선 MC들을 향해 손뼉을 치고 있었다.


“왜 말 안 했어? 꿈이 배우였다고.”

“이렇게 아픈데 나한테 꿈은 사치잖아.”

나을 수 있다고, 나으면 꿈을 이루자고 할 수가 없었다.

다 나은 줄 알았던 백혈병이 재발한 누나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냥…… 지금은 평범하게 사는 게 내 꿈이야. 안 아프고, 건강하게 사는 거.”

혼잣말과 닮은 중얼거림이 석진의 마음을 울렸다.

누나가 잠이 든 사이에 휴게실로 온 석진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휴대폰을 몇 번 누르던 석진은 가만히 액정만 들여다봤다.

무엇을 망설이는 건지 액정 위에서 엄지가 배회하기만 했다.

그러다 마침내 마른 입술을 깨문 석진이 ‘등록’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새 글이 제대로 올라갔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석진은 휴대폰 전원을 꺼 버렸다.

잠시 뒤,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트래픽이 초과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그건 석진이 올린 하나의 글 때문이었다.

[살인자 오수희]

짧은 제목 아래에는 아무런 글도 적혀 있지 않았다.

대신 주형이 애란의 죽음에 의문을 품었던 영상이 첨부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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