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 살인자 오수희 (109/118)


109. 살인자 오수희
2023.02.14.



 
[살인자 오수희]

석진은 자신이 올린 게시물이 어떤 파동을 불러일으킬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글을 올린 건 단순히 수희의 몰락을 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멱살까지 부여잡고는 돈을 내놓으라던 주형이 병에 걸린 제 누나를 보고 독촉도, 원망도 하지 않았다. 복도에 덩그러니 서 있다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게 전혀 고맙지 않은 건 주형의 눈빛 때문이었다.

병실로 누나를 데려가던 자신에게 쏟아진 눈길에는 안타까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원치도 않은 동정을 주고는 더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석진은 주형을 잘 알고 있었다. 가오에 죽고 가오에 사는 놈이었다.

마치 불쌍한 놈에게 기부나 하자는 식으로 떠났을 것이고, 그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친구들에게 떠들어 댈 게 분명했다.

그것이 주형을 향해 꾸준히 쌓아 놓았던 경멸과 분노를 폭발시켰다.


“어디 갔다 왔어?”

잠이 든 줄 알았던 누나가 조용히 커튼을 걷고 들어오는 석진에게 물었다.


“그냥, 휴게실에 좀 앉아 있다 왔어.”

“너도 계속 병실에 있으니까 답답하지?”

석진은 누나가 덮고 있던 이불을 정리해 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요새 밖에 추워서 나가기도 싫어.”

“그래도 잠은 집에 가서 자. 여기서 자면 불편하잖아.”

“난 여기가 편해요.”

이부자리를 정리한 석진이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

주머니 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들었지만 석진은 차마 전원을 켤 용기는 없었다.

지금쯤 인터넷이 수희의 이야기로 떠들썩해졌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휴대폰을 도로 넣어 둔 석진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 누나를 바라봤다.

주형은 제 분수에 넘치는 걸 가지고 있었다. 건강하고, 착하고, 다정한 누나.

귀중한 걸 쥐고서도 불평불만만 늘어놓으니 빼앗으려는 것뿐이었다.

삐뚤어져 버린 질투라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주형이 조금이라도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다면 그걸로 만족했다.

***

연기 대상 2부가 시작되기 직전.

수희는 뒤쪽에 보이는 관객석에서 승조를 찾기 위해 이쪽저쪽 휘휘 둘러보았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 속에서 승조를 찾는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희는 들고 온 클러치 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승조에게 연락하기 위해 전원 버튼을 가볍게 눌러 보지만, 액정은 여전히 검은 화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분명 시상식장으로 출발하기 전에 배터리가 남아 있는 걸 확인했는데 몇 시간 사이 방전된 듯했다.

2부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시상식장 전체가 소등되자 수희가 휴대폰을 클러치 안에 넣어 두었다.

이제 우수상과 최우수상, 대상 시상을 남겨 두고 있었다.


“어머.”

한창 시상식의 분위기가 달아올랐을 때, 건너편에 앉아 있던 은채가 탄식을 뱉어 냈다.

은채는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도 테이블 아래에서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테이블에 앉은 <패밀리> 팀이 은채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은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휴대폰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우수상 수상이 끝나고 CF 구간에 들어선 시상식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몰고 왔다.


“수희야. 이 기사 정말이야?”

“뭐가?”

“아직 못 봤구나?”

먹잇감을 발견한 듯 은채의 눈은 닦아 놓은 유리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수희는 은채가 친절하게 내미는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오수희는 살인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쳐.” 친동생의 제보]

기사 제목을 본 수희의 두 눈이 한순간에 크기를 키웠다.

기사에는 동영상이 첨부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는 동영상의 대화들이 적혀 있었다.

친구와 나눈 걸로 되어 있는 내용을 믿을 수가 없어 영상을 재생해 귓가에 가져다 댔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고 수희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따로 확인할 것도 없이 주형의 목소리가 확실했다.

벌어진 입술 새로 가슴이 저며 오는 숨이 퍼져 나왔다.

귓가에서 휴대폰을 떨어트려 다른 기사들을 확인했다.

현재 진행되는 연기 대상의 내용은 어디에도 없고, 전부 수희 가족들과 관련된 기사뿐이었다.

[오수희 친동생이 밝힌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진상]

[오수희 모친의 죽음 재조명]

[오수희의 어머니…… 자살 아닌 타살?]

휴대폰을 붙들고 있는 손이 덜덜 떨리고, 머리가 하얗게 번져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누나.”

수희는 제 어깨를 두드리는 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준영이 무대 쪽으로 눈짓하며 말했다.


“최우수상 시상식 곧 시작해요.”

“어?”

“같이 올라가야죠.”

그제야 수희는 최우수상 시상을 준영과 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게 떠올랐다.

멍한 눈빛으로 들고 있던 은채의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최우수상 시상 전에 CF 구간에 들어서, 주변은 어수선하게 들썩거렸다.

배우들은 테이블 아래로 고개를 떨군 채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눈이 수희를 향하고, 수희와 눈을 마주칠 때면 시선을 피했다.

[배우 오수희의 친동생은 어머니의 죽음이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 가해자로 자신의 누나인 오수희를 지목했다.]

은채의 휴대폰으로 봤던 기사 내용이 눈앞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은 수희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속은 자꾸만 울렁거렸다.

주형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닌 건지 알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휴대폰은 방전됐고 당장은 시상을 마쳐야 했다.

무대의 뒤편으로 간 수희에게 스태프가 대본을 건넸다


“오수희 씨, 대사 수정된 게 있어서 확인해 주세요.”

스태프가 쥐여 준 대본을 내려다본 수희의 초점이 일순 흔들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무리 없이 확인했던 대본의 글자들이 물결처럼 일렁거렸다.

익숙한 증상에 수희는 대본에서 시선을 떼어 내야 했다. 머리는 어지럽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속이 뒤집혔다.


“5분 뒤에 올라갈게요.”

스태프의 목소리가 귓가에 이명처럼 윙윙거렸다.

준영이 대본을 든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수희의 얼굴을 살폈다.


“누나, 괜찮아요? 얼굴이 안 좋아요.”

몸이 저 아래 깊은 수면으로 빠지는 기분에 수희는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연기 대상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수희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아니, 2부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웃으며 대화를 하던 수희였다.

아주 잠깐 사이에 수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준영은 수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상황을 듣고 싶었지만, 둘에게 남은 시간은 채 5분도 되지 않았다.


“준영아. 나 수정된 대사 좀 알려 줄래?”

힘겹게 입술을 떨어트린 수희가 묻자 준영이 수정된 대사를 확인했다.


“앞부분이 안부 인사로 내용이 바뀌었어요.”

전반부가 완전히 바뀌어 버린 내용에 수희가 혼란스러울 것 같았다.

게다가 수희의 표정을 보니 알려 준다고 해도 귓가에 들어오지 않을 듯했다.


“누나, 대본 신경 쓰지 마요. 제가 리드할게요. 평소 대화 나누는 것처럼 하면 될 것 같아요.”

“알겠어, 준영아.”

대화가 끝나자마자 스태프가 계단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오수희 씨, 차준영 씨. 무대 올라갈게요.”

준영이 팔을 내밀자 수희가 굳은 표정으로 그 위에 손을 얹었다.

무대와 연결된 계단을 오르자 곧장 카메라 한 대가 수희와 준영에게 따라붙었다.

아무 일 없다는 것처럼 웃어야 하는 걸 아는데도 입술 끝이 올라가질 않았다.

넓은 시상대 중심에 선 수희는 준영의 팔에서 손을 거두었다.

대본을 쥔 수희의 손이 잘게 떨리는 게 무대 앞에 앉아 있는 배우들에게도 보일 정도였다.

옆에 선 준영은 진행하는 게 어려워 보이는 수희에게 말을 건네기 어려웠다.

수희의 상태를 봐서는 촬영을 중지시켜야 했지만, 생방송이니 그럴 수도 없었다.


“오수희 씨.”

준영이 수희를 부르자, 정면을 향해 있던 고개가 돌아갔다.


“떨리지 않으세요? 전 시상자로 나왔는데도 가슴이 떨리네요.”

시청자들 역시 수희의 떨림을 모를 수 없을 거라 여긴 준영은 그 자리에서 즉각 대사를 추가했다.

마른침을 넘긴 수희가 안간힘을 쓰며 입술 끝을 들어 올렸다.


“저도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서서 그런지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최우수상 후보로 오른 배우분들께서는 얼마나 떨릴지 가늠조차 되지 않네요.”

자연스러운 대화를 유도한 덕분에 수정된 대본을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준영이 대본 한 장을 넘기며 다음 장에 있는 후보들을 확인했다.


“그럼 먼저 여자 후보를 만나 보실까요.”

영상이 수희와 준영의 뒤편에 있는 모니터로 송출되었다.

그런데 관객들은 최우수상 후보보다는 무대에 서 있는 수희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점점 관객들이 어수선하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수희가 있는 무대까지 소란이 전해졌다.

준비된 후보 영상이 끝나 가는데도 관객들이 진행하기 어려울 만큼 목소리를 높였다.

어쩔 수 없이 스태프들까지 나서야 하는 상황에 이르자 수희는 혼란에 사로잡혔다.

사람들의 입이, 사람들의 손가락이 모두 자신을 향하는 것만 같았다.


“……발표할까요?”

“…….”

“오수희 씨?”

준영의 목소리에도 수희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침묵을 유지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시끄러웠던 관객들도 입을 다물었다.

수희는 옆에서 느껴지는 준영의 시선에 뒤늦게 손에 쥐고 있던 봉투를 열었다.

안에 들어 있는 흰 종이 위에 여자 최우수상을 받을 배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수희는 그 후보의 이름을 읽을 수가 없었다.

화면이 정지한 것처럼 수희가 멈추고 말았다.

생방송이었고, 모든 상황이 전국에 송출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긴장한 수희 씨를 대신해 제가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준영은 조심스레 수희의 손에 있는 종이를 가져가 이름을 확인했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준영이 후보 중 한 명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네가 돌아오는 날에>의 신예린 씨. 축하드립니다.”

드문드문 터지던 박수 소리가 점차 커다래지고, 뒤늦게 정신이 든 수희가 손바닥을 부딪쳤다.

진행 요원에게서 꽃다발을 전달받은 수희가 예린에게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옆으로 물러난 수희는 제 손에 들린 대본을 구겨져라 움켜쥐었다.

주형의 동영상으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본을 읽기는커녕 준영의 리드를 따라가지도 못했다.

얼굴이 붉게 물들 만큼 창피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누나, 가요.”

수상자의 소감이 끝나자 준영이 출구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빠른 걸음으로 뒤편에 있는 계단을 내려온 수희는 많은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스태프들은 말은 하지 않아도 의심의 눈초리로 수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있는 준영마저 느껴질 정도라 절로 인상이 찌푸려 들었다.

준영이 수희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수희는 더는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긴 드레스의 끝자락을 붙잡고 수희는 무작정 앞만 보고 뛰었다.


“누나!”

뒤에서 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무대 뒤편과 연결된 문을 열어젖히자 텅 빈 로비가 나왔다.

힘껏 발을 차며 로비를 가로질러 또 하나의 문을 열었다.

환한 조명이 눈가에 쏟아져 내리고, 레드 카펫이 수희의 앞에 드러났다.

퇴장할 연예인들을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차단 봉 앞에 바짝 서서 사진을 마구 찍어 댔다.

기나긴 계단을 내려다볼 틈도 없이 수희는 무작정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하나, 둘, 셋, 넷…… 정신없이 계단을 밟고 내려가던 수희의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수희의 시야 끝에 익숙한 사람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오빠.”

거짓말처럼 승조가 층계참 중심에 서서 수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밟아 내려간 수희가 눈물이 잔잔히 깔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찰칵대는 셔터 소리만 가득한 계단 위에 승조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내려앉았다.


“도망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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