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 도망칠 것인가, 부딪칠 것인가 (110/118)


110. 도망칠 것인가, 부딪칠 것인가
2023.02.18.



 


“도망치는 거야?”

레드 카펫 위에 나타난 승조와 수희를 보고 기자들은 열심히 셔터를 눌러 댔다.

자신의 기사에 엮여 승조까지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를 밀어내는 것도, 그를 피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이 떠돌고 있는 기사를 인정하는 것만 같아서였다.

그 역시 내가 그런 짓을 했다고 믿을까.

승조라면 그럴 리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검게 좀먹은 자존심에 그에게 설명할 용기마저 사라졌다.


“내가 도망치는 거라고 하면…… 그럼 나한테 실망할 거야?”

가득 눈물이 찬 눈망울에 승조가 담겼다.

수희는 제 손안에 들어오는 온기에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어느샌가 승조의 손이 수희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세지도 그렇다고 약하지도 않은 힘으로 수희의 손을 감싸 쥐고 있었다.


“아니. 너 데리고 같이 도망갈 거야.”

살갗으로 전해지는 그의 따스한 체온만으로도 승조에게 위로받는 듯했다.


“넌 선택만 하면 돼. 나랑 도망갈 건지, 다시 돌아갈 건지.”

“나 무서워, 오빠.”

“…….”

“아무것도 모르면서 날 살인자라도 된 것처럼 보는 게, 날 보면서 하나같이 입을 모아서 수군거리는 게, 너무 무서워.”

겨우 잊고 있었던 그날의 일들이 떠올랐다.

제 딸이 함께 떨어질까 싶어 손을 놓았던 애란의 모습.

그리고 차가운 바닥에 누워 눈도 감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던 모습.

단편의 장면들이 스치자 추위가 덮친 것처럼 온몸이 벌벌 떨려 왔다.

초점 없이 허공을 바라보던 수희를 승조가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수희는 자신을 휩쓸었던 공포가 연기처럼 날아가는 걸 느꼈다.


“내가 한 가지 약속할게.”

허리에 감겨 있는 그의 팔에 점차 힘이 들어갔다.


“지금 도망치면 이 순간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네가 지금 느끼는 그 감정에서까지 벗어나지는 못해.”

“…….”

“그런데, 네가 다시 돌아가서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선다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누명 벗겨 낼 거야.”

단단하고 선명한 그의 음성이 확신을 더했다.

그가 단순히 자신을 다시 시상식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시상식보다 ‘나’라는 사람을 더 소중히 해 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책임감 없이 뱉는 말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내가 다시 사람들 앞에 설 수 있을까?”

“넌 충분히 할 수 있어. 내가 아는 오수희는 그것보다 더 힘든 것도 견뎌 냈으니까.”

두 손을 들어 올린 승조가 수희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승조의 손길에 수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영상 하나에 살인자라고 낙인찍히고 손가락질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밝히는 진실을 들어 줄 사람은 분명 있을 것이다.


“네 꿈이었잖아. 다시 연기를 하는 거.”

“…….”

“타인의 생각보다 네 꿈이 더 소중해.”

애란이 떠나고 난 후에 대본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무슨 짓이라도 할 테니 연기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매일 밤 빌었다.

그런데 지레 겁을 먹고 도망쳐 버리면 그토록 바라던 연기를 다시 할 수 없게 돼 버린다.


“다른 사람의 생각은 네가 충분히 바꿀 수 있지만, 지금 가 버리면 네 꿈은 영영 버려지는 거야.”

대중 앞에 서고, 대중에게 평가받는 직업이었다.

그러니 평가를 받더라도 대중의 앞에 서서 해야 했다.

이렇게 쉽게 모든 걸 포기하고 도망치려 한 건, 글을 다시 읽을 수 없게 될까 봐 겁이 나서였다.

읽을 수 없다면 전처럼 들으면 될 일이었다.

손에 쥔 걸 포기하고 도망치기 전에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고 노력은 해야 했다.

수희는 제 뺨에 얹어진 승조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 냈다.


“나 가 볼게, 오빠.”

“지켜보고 있을게. 가까운 곳에서.”

고개를 끄덕인 수희가 뒤로 돌아섰다. 층계참을 벗어나 계단을 밟아 올라가던 수희는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서더니 올라왔던 계단을 다시 내려갔다.

그러고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승조의 목을 끌어안아 입술을 겹쳤다.

팡팡, 폭죽처럼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졌다.

기자들이 지켜보는 건 전혀 상관없었다. 지금은 오직 제 앞에 있는 승조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 결심했어.”

“무슨 결심?”

벅차오르는 감정에 숨까지 차는 것 같았다.


“나 오빠를 책임.”

“수희야.”

밝게 목소리를 냈던 수희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꽤 오랫동안 한 고민의 결실이었기에 꼭 그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승조는 뭐 때문인지 수희의 말을 끊어 냈다.


“이번에는 나한테도 기회를 줘.”

승조가 아래로 떨어져 있던 수희의 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너 책임지고 싶어. 평생.”

시선을 떨어트리자 자신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보였다.

시상식을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없었던 반지가 네 번째 손가락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혹시나 해 승조의 왼손을 보자 역시나 같은 자리에 비슷한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화이트 골드 링의 중심에 다이아몬드가 촘촘하게 빙 둘린 자신의 것과 달리, 승조의 반지는 화려한 보석이 박히지 않은 화이트 골드의 모던한 링이었다.

수희는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결혼하자.”

기대하고 있던 말이 흘러나오자 수희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기다렸던 말일지도 모르는데 이 모든 상황이 꿈만 같아 금방이라도 깨 버릴 것 같았다.

한참 수희가 말이 없자 승조가 자그맣게 웃음을 터트렸다.


“혹시, 거절하는 거야?”

수희가 고개가 떨어져라 좌우로 머리를 저어 냈다.

손에 끼워진 다이아몬드 반지보다 더욱 반짝이는 미소로 수희가 화답했다.


“결혼할래. 오빠랑.”

“이제 정말 내 옆에만 있어야 하는 거야.”

“내가 바라던 바야.”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수희를 납치라도 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지만 이제 그녀를 보내 줄 때였다.

붙잡고 있던 수희의 손을 놓아준 승조가 계단 끝을 올려다봤다.

수희가 걱정돼 건물 밖으로 나온 철용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어서 가 봐.”

“응.”

수희가 제 손에 끼워진 반지를 매만졌다.


“다시 올게. 오빠 곁으로.”

발길을 돌린 수희가 레드 카펫이 깔린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쉼 없이 계단을 오르던 수희는 뒤에 서 있는 승조를 향해 돌아섰다.

이미 한참 멀어진 수희가 입술을 꼼지락 움직였다.

세 글자를 반복해 천천히 말하자, 승조의 입매가 서서히 올라섰다.


‘사랑해.’

수희는 자신의 마음이 승조에게 전해졌다는 걸 깨닫고 철용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철용도 기사를 접한 건지 휴대폰을 움켜쥐고 있었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철용이 수희의 눈치만 살폈다. 자신도 혼란스러울 텐데도 그는 수희를 안심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수희야. 나 이 기사 안 믿어. 알지?”

“고마워, 믿어 줘서.”

왜 바보같이 몰랐을까.

자신을 믿어 주는 사람이 이렇게 곁에 있는데.

넘어졌으니 지금은 무릎을 털고 일어설 때였다.

등 뒤에는 낭떠러지였다. 더는 물러설 곳도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수희는 곧게 허리를 편 채 무대 앞쪽에 있는 <패밀리> 테이블로 걸어갔다.

무대 한편에서 MC들이 진행 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 모두 테이블로 돌아오는 수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수희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수희가 자리에 앉자 뒤편에 앉아 있던 준영이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물었다.


“누나, 괜찮아요?”

“괜찮아졌어.”

한결 편안해 보이는 표정에 준영은 그 말을 믿기로 했다.

수희의 건너편에 앉아 있던 은채는 비아냥조로 물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넌 내가 안 괜찮길 바라는 말투네.”

손으로 제 가슴을 짚은 은채가 미간을 좁혔다.


“설마~ 난 단지 네가 걱정돼서 그런 거지.”

“설마 네가 내 걱정을 할까.”

입매를 비스듬하게 올린 수희가 은채의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도망이라도 간 줄 알았더니 다시 제 앞에 나타난 수희가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이제 대망의 대상만 남겨 두고 있죠?”

남자 MC의 말에 여자 MC가 맞장구를 치며 대본을 눈으로 흘겼다.


“맞습니다. 올해 대상 후보들도 아주 쟁쟁한데요. 과연 어떤 분이 영광을 누릴지 아주 궁금합니다.”

“대상 시상에는 작년도 대상 수상자인 서경수 씨와 VTV 이강문 사장님이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무대 위로 서경수와 이강문이 올라오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연기 대상의 꽃은 대상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 늦은 시간까지 연기 대상을 지켜보는 사람들 역시, 대상 수상자를 보기 위해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시상을 위해 서경수와 이강문이 나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무대 옆에 달린 커다란 전광판에는 후보 네 명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수희는 전광판에 보이는 자신의 얼굴을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형식적인 안부 인사를 끝낸 이강문이 흰 봉투 안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서경수가 종이에 적힌 이름을 보더니 적잖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침내 이강문은 허리를 기울여 마이크에 바짝 입술을 가져다 댔다.


“발표하겠습니다. 2023, VTV 연기 대상, 대상.”

스피커 밖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이강문이 금방이라도 대상을 밝힐 것처럼 커다랗게 입을 벌렸다.

마이크 밖으로 숨소리가 흘러나오고, 모두 숨을 죽이고 이강문에게 집중했다.

두구두구두구. 점차 커지는 음악 소리와 함께, 이강문이 종이를 들고 옆으로 돌아섰다.


“서경수 씨께서 발표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발표할까요?”

종이를 받아 든 서경수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후보들을 한 명씩 살폈다.


“저도 이분 연기를 감명 깊게 봤는데요. 축하드립니다.”

숨을 들이켠 서경수가 대상 수상자의 이름을 뱉어 냈다.


“<패밀리>의 오수희 씨.”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을 향해 화려한 꽃가루가 흩날렸다.

테이블에서 모두 일어나 손뼉을 치는데 수희 혼자만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제 이름이 불렸는데도 불구하고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쟁쟁한 후보들 사이에서 자신이 대상의 주인공이라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누나, 일어나야죠.”

수희의 뒤에 서 있던 준영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가만히 앉아 있던 수희가 얼결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패밀리> 테이블에 앉아 있던 출연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축하를 전했다.


“난 수희 씨가 탈 줄 알았어.”

“정말 축하해요, 수희 씨.”

“나중에 한턱내는 거야.”

물론 은채를 제외하고 말이다.

수상을 예상 못 했던 수희는 얼떨떨한 얼굴로 무대로 올라갔다.

시상자인 서경수가 꽃을 전달했고, 사장인 이강문이 대상 트로피를 건넸다.

꽃과 트로피를 받은 수희가 마이크 앞에 서자 시상자들이 옆으로 비켜섰다.

박수 소리가 끊어지고 나니 주변은 더욱 고요해졌다.

다른 수상자들이 나왔을 때와는 언뜻 다른 분위기라고 여겼는데, 그건 수희의 기분 탓이 아닌 듯했다.

붙어 있던 입술을 채 떼기도 전이었다.


“우우우우.”

2층에 있는 관객석에서 수희를 향한 야유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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