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111/118)


111.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2023.02.21.



 
야유 소리는 점차 커지더니 진행이 어려울 만큼 소란스러워졌다.

2층에 앉아 있는 관객들은 엄지를 아래를 내리는 시늉까지 하며 격하게 반응했다.

사람들의 반응에 둥근 테이블에 앉아 있던 배우들이 2층을 올려다보며 수군거렸다.

어수선해진 분위기에 MC들은 당황하며 스태프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남자 MC가 관객들에게 양해를 구하려고 할 때였다.


“절 향한 비난은 모두 조금 전 뜬 기사 때문이라는 걸 압니다. 그렇기에 여러분들이 야유를 보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스피커 밖으로 흘러나오는 수희의 목소리에 야유 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제게 날아오는 야유가 타당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사가 모두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작아지던 사람들의 소리는 어느새 들리지 않았다.


“신은 감당할 수 있는 시련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올 한 해는 제가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시련을 계속해서 안겨 줬습니다.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신께서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닌가, 하고.”

잔잔하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어느새 사람들이 수희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숨을 천천히 들이켠 수희는 그간 숨기고 있던 것을 밝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저는 한동안 연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연기를 할 수 없었던 건, 단순히 슬럼프가 아닌, 대본을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읽히지 않았습니다.”

눈을 감은 수희는 심장이 제 귀에서 뛰어 대는 것만 같았다.

덤덤하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떨리는 것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길어지는 공백기에 임신 스캔들이 터졌고, 저는 모든 걸 그만두려 한 순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기적처럼 다시 연기를 할 수 있게 되었고, <패밀리>라는 작품을 만났습니다.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가고, 저 역시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던 상처에서는 아직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지금처럼요.”

눈을 뜬 수희가 객석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벗어날 수 없어서 도망도 쳐 볼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전 평생 이뤄야 하는 꿈이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라 잠시 숨을 멈췄다.


“할 수만 있다면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연기를 하자.”

찬찬히 객석을 둘러보던 수희는 객석의 중심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무대에서 한참 먼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승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치 그가 수희를 응원해 주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저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이곳에 섰습니다.”

한층 더 숙연해진 분위기 속에서도 수희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소감이 말미에 다다르자 늘 곧기만 했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 왔다.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배우라고 했던 어머니의 말이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되겠습니다.”

고개를 들어 올린 수희가 어디선가 보고 있을 애란에게 말했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에게 이 상을 바칩니다. 감사합니다.”

허리를 굽힌 수희가 사람들에게 인사를 남겼다.

역시나 이번에도 박수는 없었다.

겸허히 자신에게 돌아오는 침묵을 받아들인 수희가 상체를 세웠다.

마이크에서 한 발짝 물러서는데, 어디선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곳이 어디인지 수희는 찾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2층 객석의 중심에 선 승조가 수희를 향해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패밀리> 지정 테이블에 앉아 있던 준영이 일어서 손을 부딪치자, 하나둘 자리에서 기립하더니 열렬한 환호를 보내왔다.

군데군데에서 터져 나오던 박수는 어느새 하나가 되어 우레와 같은 소리를 만들어 냈다.

가슴 한편에 밀려들어 오는 감정이 모두 담을 수 없을 만큼 넘쳐흘렀다.

거친 파도 위에 올라선 아름다운 일몰처럼 지금 이 광경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계단 아래로 수희가 내려오자 다들 아무런 말 없이 손뼉을 쳐 줄 뿐이었다.

깨고 싶지 않은 꿈을 꾸는 것처럼 수희는 이 순간을 소중히 눈에 담았다.

***

시상식이 끝난 수희는 건물 지하에 있는 주차장에 도착했다.

배우들의 밴 사이에서 철용이 몰고 온 밴을 찾기 위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덥석, 제 어깨를 붙잡아 돌리는 손에 수희의 몸이 돌아갔다.


“역시 대상은 다르네. 연기 잘하더라?”

수희는 제 어깨에 있는 은채의 손을 쳐 냈다.

결국 수희가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서는 꼴을 보기 싫었던 거였다.


“네 동생이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뻔뻔하게 그 기사는 사실이 아니다?”

팔짱을 낀 은채가 수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요새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네 말 몇 마디에 사람들이 속아 줄 것 같아?”

“아깐 내가 걱정된다더니 역시 거짓말이구나.”

“다~ 너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웃음을 흘리던 수희가 표정을 갈무리하며 물었다.


“대상까지 탄 내 걱정을 왜 네가 해.”

“야. 대상 탔다고 잘난 척이라도 하고 싶어?”

“강은채, 그 정도만 해.”

수희는 꽃다발과 트로피를 든 자신과는 달리, 두 손에 아무것도 쥔 게 없는 은채를 바라봤다.


“네가 상 못 타 놓고 왜 나한테 화풀이를 해?”

“겁도 없네요, 강은채 씨. 수희를 건드리고.”

은채의 대답 대신 뒤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어깨에 닿는 손길에 고개를 돌려 보니 승조가 매서운 시선을 은채에게 꽂아 넣고 있었다.


“강은채 씨, 수희한테 더 할 말 있습니까?”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은채에게 닿자, 은채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저었다.

이화정이 어떻게 배우계를 떠나게 되었는지는 직접 눈으로 봤기에 알고 있었다.

자신 역시 이화정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기에, 최대한 승조에게 거슬리는 행동은 하지 않으려 했다.


“수희야, 가자.”

은채는 수희의 어깨에 올려져 있는 승조의 손을 바라봤다.

승조의 네 번째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에 은채는 두 눈을 확 키웠다.

숨을 한껏 들이켠 은채가 제 입을 틀어막은 채 수희의 손을 내려다봤다.

역시나 비슷한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결혼반지가 틀림없었다.

두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은채는 두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아아악!”

부러워, 괘씸해, 재수 없어.

분노를 감추지 못한 은채가 구둣발로 바닥을 쾅쾅 찍어 댔다.

***

기사를 본 주형은 종일 수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수희의 휴대폰은 꺼져 있는 상태였고, 메시지를 남겨도 읽지 않았다.

석진을 만나기 위해 병원까지 찾아갔지만, 오늘 오전에 퇴원했다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수희의 집에도 찾아가 보았지만, 경비원이 이사했다고 알려 주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주형은 수희의 아파트 앞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어떻게든 누나를 만나 해명하고 싶은데 상황이 도와주지를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승조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신호음에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매형.”

[왜 승조 씨한테 연락했어?]

낮게 들리는 목소리는 승조의 것이 아니었다. 제 누나인 수희였다.


“누나! 왜 전화를 안 받아.”

반가운 감정도 있었지만, 자신의 애를 태운 수희가 밉기도 했다.


[내일 만나서 이야기해. 메시지로 장소 보내 둘게.]

“누나.”

귓가에서 휴대폰을 떼어 낸 주형이 액정을 바라봤다.

수희가 제 할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끊자 주형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왜 사람 말하고 있는데 끊어.”

그래도 자신과 만나서 대화를 하려는 걸 보니 이번 일로 혼을 내려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수희가 살인자라며 손가락질까지 받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혼 좀 나지, 뭐.”

내일 만날 장소가 적힌 메시지를 확인한 주형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

수희가 보낸 약속 장소에 도착한 주형은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도 없고 손님도 없는 카페에는 수희만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있는 수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단단히 화났나 보네.’

어쩔 수 있나, 내가 기어들어 가야지.

주형은 의기소침한 얼굴로 수희의 앞에 앉았다.


“누나. 화 많이 났어?”

“화 안 났어.”

“정말 화 안 났어?”

“응.”

수희는 마시고 있던 커피를 내려놓으며 주형을 바라봤다.

주형은 화가 나지 않았다는 말에 안도의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또 누나가 나한테 화난 줄 알고 놀랐잖아.”

“난 너한테 어떤 존재니.”

갑작스러운 물음에 주형은 제 앞에 있는 커피를 호록 마셨다.


“누나지. 어떤 존재기는.”

“너한테 돈이나 주는 ATM기나, 네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라?”

잔뜩 감정이 실린 목소리에 주형이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려 두었다.


“방금 화 안 났다며.”

“화는 안 났어. 너한테 실망했을 뿐이지.”

“그게 그거잖아.”

짜증스레 인상을 찌푸린 주형의 모습에 수희는 제 동생에게 기대 같은 건 하지 않기로 했다.


“주형아, 넌 언제나 내 든든한 동생이었어. 한때 내 꿈에 힘을 실어 준 것도 너였으니까.”

애란이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주형과의 사이가 이토록 틀어져 버릴 줄 몰랐다.

운동을 좋아해 어렸을 땐 수희와 공을 차며 운동장을 돌아다녔고, 새벽에는 엄마 몰래 라면을 끓여 와 내내 식단 관리를 한 수희와 먹기도 했다.

아빠가 자신들을 버리고 사라졌을 때 함께 슬픔을 나눈 것도 주형이었다.

사랑스러운 동생, 친구 같은 동생,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

그게 남매였고, 가족이었다.


“모든 게 나 때문인 것 같아서 가족이라는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애썼어.”

“…….”

“난 너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어. 그저 내가 주는 사랑을 받고 네가 잘 컸으면…….”

문득 목이 메어 와 수희가 말을 삼켰다.


“그거 하나 바랐어, 나.”

엄마를 잃고 자신과 남게 된 주형이 기대지도 못할까 봐 앞에서 울어 본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의 동생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애란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자신이 줄 수 있는 건 뭐든 내주었다.

그런데 그게 제 동생에게 독이 된다는 걸 너무 늦게나마 알아 버렸다.


“근데 네 말처럼 나는 엄마가 될 수 없더라.”

“…….”

“이번 일, 네 책임 아냐. 내가 널 그렇게 만든 거야.”

“누나.”

주형은 그제야 제 누나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정리한 수희를 붙잡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너한테 책망 같은 거 하기 싫어. 이미 너도 네가 잘못한 거 알 테니까.”

“왜 그래, 무섭게. 그냥 화를 내. 소리치고, 전처럼 때리든가.”

피식, 힘없이 웃어 보인 수희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런 거 하기 싫어.”

“누나.”

수희가 의자를 끌고 일어서자 주형의 고개가 자연스레 들어 올려졌다.


“아르바이트 시작해. 네 힘으로 직접 돈 벌고, 그 돈으로 공부도 하고, 사고 싶은 것도 사.”

이게 무슨 소리야. 주형은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오늘 수희를 만나러 나온 목적엔 돈을 빌리기 위한 것도 있었다.

집도 없고, 빌린 돈도 갚아야 하니, 수희에게 손 좀 벌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가 볼게.”

“나 사실 이석진, 그 새끼한테 사기당했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주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든 수희를 붙잡아야 했다.


“이석진?”

“내 동영상 올린 그 자식 이름이 이석진이야.”

“그런데.”

냉정한 수희의 눈빛에 주형은 머뭇대다가 말했다.


“그 자식이 나한테 무조건 돈 벌 수 있다고, 돈만 만들라는 거 있지. 그래서 내가 잠깐 미쳐서 등록금이랑 전세금 싹 끌어모아서 코인에 투자했는데…… 그게 사기였던 거 있지.”

주형은 몸을 웅크러트리며 최대한 불쌍한 척 굴었다.


“누나……. 나 이번만 좀 도와줘라. 응?”

지그시 주형을 지켜보던 수희가 입술을 뗐다.


“그러고 보니까 넌 항상 남들보다 ‘100’ 먼저 앞서가고 있었어.”

“…….”

“편히 공부하고 잘 수 있는 집도 있었고, 원하는 건 살 수 있는 돈도 있었지. 등록금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됐고.”

불안한 기운이 주형의 뒤를 덮쳐 왔다.


“이번에야말로 남들처럼 ‘0’에서부터 시작해 봐.”

“그게 무슨 말이야!”

“다 너 도움 되라고 하는 말이야.”

아연실색해 버린 주형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망했다는 걸 이제야 직감한 것이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

“…….”

“그리고, 이제 정신 차려, 오주형.”

선글라스를 낀 수희가 핸드백을 챙겨 망설임 없이 주형의 옆을 지나쳐 갔다.

그리고 유리문을 열고 나가 커피숍 앞에 세워 둔 차를 타고 떠나 버렸다.

딸랑―

문에 달린 종소리가 주형의 골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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