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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결혼 반대 선언 (112/118)


112. 결혼 반대 선언
2023.02.25.



 
주형은 수희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카페에 나와서 몇 번이나 통화하려고 했지만 내내 휴대폰은 꺼져 있는 상태였다.


[누나, 내가 진짜 이번에는 정신 차릴게. 한 번만 봐줘.]

이때까지 아쉬운 소리 한 번 한 적 없던 주형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처음 보는 수희의 모습에 주형은 겁을 먹어 버렸다.

어떻게든 수희가 끊으려는 가족의 연을 붙들려고 했다.


“하아, 진짜.”

친구 집에서 얹혀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좁은 원룸에서 남자 둘이 살려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휴대폰을 빤히 바라보던 주형은 승조에게서 연락이 오자 즉각 전화를 받았다.


“매형. 잘 지내셨어요?”

인도 한쪽 구석에 선 주형이 평소와 다르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수희에 관한 기사는 봤지?]

“그거 사실 아니에요. 누나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여요.”

[알면서 그런 말을 하고 다녔어?]

“그건…….”

말문이 막혀 버린 주형은 애꿎은 손톱만 이로 잘근잘근 깨물었다.


[네가 해명할 생각이 있으면, 기자 한 명 소개해 줄게. 우호적으로 기사 써 줄 거야.]

“알겠어요. 전부 사실이 아니라고 밝힐게요.”

[전화 끊으면 연락처 보낼게.]

“자, 잠깐만요!”

전화가 끊길까 싶어 주형이 급하게 승조를 불렀다.


“매형 저…… 일자리도 하나 소개받고 싶은데.”

[내가 소개해 주면 앉아서 편하게 쉬면서 돈 벌 수 있는 곳으로 알려 줄 것 같아?]

그럴 것 같아서 부탁한 거였는데, 승조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주형은 승조를 모욕한 것도 아닌데 왜 승조가 제 누나보다 더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차마 속에 있는 말을 다 뱉어 내지 못하고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어디든 소개해 주면 열심히 할게요.”

[인사팀에 말해 둘게. 내일까지 연락 갈 거야.]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주형의 휴대폰으로 몇 분 지나지 않아 메시지가 도착했다.

기자의 이름과 휴대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주형은 길가에 한참 서서 고민하다가 전화를 걸었다.


“한승조 대표님 소개로 연락드렸는데요.”

 

***

그날 오후, 주형이 기자를 만나고 세 시간 뒤에 단독 기사가 나왔다.

[자신의 누나를 ‘살인자’로 만들었던 오수희의 동생과 단독 인터뷰]

기사는 어제 나온 동영상에 관한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동영상에 나온 내용이 사실이냐는 기자의 물음에 주형이 답했다.


[동영상에서 친구와 나눈 이야기는 사실이 아닙니다. 평소 제게 악감정이 있었던 친구는 제가 술을 마셨다는 점을 이용해서 누나에 관한 주제를 계속해서 끌어냈습니다. 누나와 다투었던 저는, 욱하는 마음에 사실도 아닌 말을 친구한테 하게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잘못은 자신에게 있다는 말도 잊지 않고 했다.

기사가 뜬 이후의 여론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

수희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인터뷰했다는 사람과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어머니에게 그랬을 리 없다는 반응으로 나뉘었다.

거실에 앉아 기사를 읽던 수희의 옆에 승조가 앉았다.


“기사 보고 있었어?”

“응. 주형이가 전부 사실이 아니라고 했어.”

주방에서 커피 두 잔을 가져온 승조가 뒤늦게 기사를 확인했다.

깔끔하게 쓰인 기사는 기자의 생각보다는 사실만을 전하고 있었다.

역시나 사람들의 반응은 분명하게 갈렸지만, 여론은 수희의 편으로 서서히 돌아서고 있었다.


“이제 기사는 신경 쓰지 마. 내가 마무리할 테니까.”

“마무리? 이게 끝이 아니야?”

“논란은 논란으로 덮어야지.”

그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직 승조의 계획은 끝난 게 아닌 듯했다.

그래도 자신의 발목을 붙잡으려던 일이 일단락되자 마음은 편했다.

승조는 수희에게 커피 한 잔을 건네주며 물었다.


“수희 너는 5월이 좋아, 10월이 좋아?”

너무나 갑작스러운 물음이었지만 진지하게 생각해 본 수희가 대답했다.


“난 10월보다는 5월이 더 좋아.”

궁금증이 풀린 승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결혼식은 내년 5월에 하자.”

“큽.”

수희는 머금고 있던 커피를 그대로 승조에게 뿜을 뻔했다.

그에게 프러포즈를 받았으니 결혼을 하게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깜빡이도 없이 급작스레 치고 들어오니 충격이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레가 들려 가슴을 퍽퍽 치던 수희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일부러 나 놀라게 하려고 그런 거지.”

“그럴 리가.”

승조가 가볍게 웃음을 흩트려 놓으며 수희의 손을 붙잡았다.

왼손에 있는 반지를 매만지며 승조가 말했다.


“얼른 내가 책임지고 싶어서 그러지.”

심장이 간질거려 수희는 괜히 커피를 홀짝거리며 다른 곳을 바라봤다.


“내년 5월이면 얼마 안 남았는데?”

“얼마 안 남았으니까 얼른 정해야지.”

수희는 손가락 하나하나 접어 가며 필요한 것들을 떠올렸다.


“결혼식 사진도 찍어야 하고, 식장 예약해야 하고, 신혼여행지도 정해야 하는데 5월까지 진행이 될까?”

“웨딩 플래너 구해 뒀으니까 크게 신경 쓸 건 없을 거야.”

동그랗게 눈을 뜬 수희가 물었다.


“언제 웨딩 플래너까지 구해 둔 거야?”

“반지 준비하면서 같이 했지.”

“내가 거절하면 어떻게 하려고?”

“거절하면 몇 번이고 고백하려고 했지. 받아 줄 때까지.”

한 번은 튕겨 볼 걸 그랬네. 받아 줄 때까지 졸졸 따라다니는 오빠 모습이 보고 싶긴 한데.

머릿속으로 승조가 반지를 내밀며 종일 자신에게 고백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수희의 표정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던 승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지금 수락한 거 후회하고 있지.”

“후회하는 건 아니고, 오빠가 나한테 절절하게 매달리는 걸 보고 싶은 거지.”

“그게 그거잖아요, 오수희 씨.”

승조가 동그랗게 엄지와 검지를 말아 수희의 동그란 이마에 부딪쳤다.

톡 하고 닿는 손이 아프지도 않으면서 수희가 이마를 매만졌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게 있어 엉덩이를 들썩였다.


“결혼식 준비하기 전에 회장님부터 봬야겠네.”

“네가 직접 안 만나도 돼. 내가 만나 뵐게.”

수희에게 괜히 상처 되는 말을 할까 싶어 승조 혼자 병호를 만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수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래도 결혼하기로 한 건 같이 알려야지.”

“아버지가 너한테 화내는 거 싫어.”

“내가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 화내신다고 매번 피할 수만은 없으니까.”

결혼식 전에 병호를 단 한 번도 보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자신을 싫어한다고 하더라도 지켜야 할 도리가 있었다.


“알겠어. 내가 아버지랑 날짜 잡아 볼게.”

싱긋 미소 짓는 수희를 보자 걱정거리마저 날아가는 것 같았다.

가만히 수희를 바라보던 승조가 입술을 떨어트렸다.


“아직 하나 말을 안 한 게 있는데.”

“뭔데?”

“내일 시간 돼? 내일 시간 안 되면 모레라도.”

잠시 자신의 스케줄을 떠올리던 수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4시 스케줄 하나 있어.”

“그럼 점심때 나랑 누구 좀 만나러 가자.”

“누구?”

“있어. 네가 보면 아주 좋아할 만한 사람.”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던 수희가 승조에게 바짝 붙어 앉았다.


“누군데? 힌트라도 줘.”

궁금해하는 수희를 보니 승조는 얄궂게도 더욱 알려 주고 싶지 않아졌다.


“비밀이야.”

“너무해!”

수희가 토라지려 하자 승조가 고개를 앞으로 빼며 제 입술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키스해 주면 말하고 싶어질 것 같은데.”

“목적은 그거였어?”

혹시나 도망이라도 갈까 싶어 승조가 수희의 턱 끝을 살포시 붙잡아 끌어당겼다.


“얼마나 두드려야 말하고 싶어질지, 어서 확인해 봐야지.”

“내가 확인 안 하고 싶으면?”

“그럼…….”

승조의 입술 끝이 선명하게 올라섰다.


“그냥 내가 덮쳐야지.”

말이 끝나자마자 승조는 굶주린 짐승처럼 수희의 위를 덮쳐 왔다.

무방비 상태였던 수희는 자신을 덮치는 승조에게 깔려 버둥거렸다.


“잠깐만! 잠깐만! 간지러워.”

옷깃 사이로 흘러들어 오는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오늘따라 유난히 간지러웠다.

그는 수희의 살결을 유유히 헤치고 다니며 쇄골에 깊이 입술을 맞췄다.

그렇게 진한 자국을 남긴 뒤, 승조는 수희의 등을 받쳐 한순간에 번쩍 안아 들었다.

바닥에서 발이 붕 뜨자 수희는 승조의 단단한 허리를 다리로 엮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침실로 걸음을 옮기는 그를 보면서 타격감 없는 작은 주먹으로 승조의 어깨를 내리쳤다.


“왜 우리가 침실로 가고 있는 거야?”

“허니문 연습은 해야지.”

“누가 허니문을 연습까지 해.”

“너랑 내가.”

아, 정말. 한승조를 말릴 수가 없다.

어쩌면 이런 오빠라서 더 좋은 게 아닐까.

가늘게 눈을 뜨던 수희는 이내 웃음을 터트리며 승조에게 쉼 없이 입술을 부딪쳤다.


 

***

결국 그날 밤 승조에게 잡아먹힌 수희는 비밀을 듣기는커녕 힌트조차 듣지 못했다.

그날 저녁 키스에서 바로 다음 단계로 진행되기도 했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물으니 이미 유효 기간이 지났다며 다시 제 입술을 두드렸다.

물론 궁금하니 입술을 부딪쳤지만, 역시나 한승조는 짓궂었다.

홀랑 키스를 훔치고는 출근길에 나서 버려 수희는 단단히 삐쳐 있었다.

오전 스케줄을 끝낸 수희는 승조가 알려 준 한정식집에 도착했다. 직원은 문이 닫혀 있는 룸을 가리키며 살짝 허리를 숙였다.


“다른 손님들께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승조가 누구와 함께 왔을지 모르니 괜스레 심장이 두근거렸다.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연 수희는 안쪽에 있던 사람을 보고 눈을 크게 키웠다.


“할머니.”

승조의 옆에 앉아 있던 영순은 수희를 보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희야.”

영순이 두 팔을 펼치며 반기자, 수희가 활짝 웃으며 영순의 품에 안겼다.


“할머니,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 몰랐어요.”

“이게 몇 년 만이니. 지금이라도 다시 보게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다정하게 수희의 머리를 쓰다듬던 영순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번에 승조 아비 집 앞에서 바로 못 알아봐서 미안해.”

“아니에요. 저도 그때 인사 못 드렸는걸요.”

“또 승조 아비가 괴롭히면 이 할미한테 말해.”

“말하면 회장님이랑 싸워 주시는 거예요?”

근엄한 얼굴을 하고 영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아주 혼쭐을 내 줘야지!”

든든한 자신의 편이 생겼다는 생각에 수희가 밝게 웃음을 터트렸다.

직원이 룸의 문을 열고 들어오자 승조가 제 옆자리에 있는 의자를 당겼다.


“밥 먹으면서 못다 한 이야기 해요.”

“수희 배고프겠네. 어서 앉자.”

영순은 수희를 승조의 옆자리로 보내고 자리에 앉았다.

예약해 둔 정식이 테이블 위에 차려지고, 수희와 영순은 그간 못 했던 대화를 나눴다.


“저 예전에 할머니가 끓여 주신 참치김치찌개 아직도 한 번씩 생각나요.”

“그래? 나중에 한번 끓여서 가져올까?”

“아니에요. 할머니 힘드시잖아요. 레시피만 알려 주시면 제가 끓여 볼게요.”

“뭣 하러 그래. 다음에 내가 올라올 때 끓여서 가져올게.”

두 사람은 따끈한 밥 한 술 뜨지 않고 조잘조잘 떠들어 댔다.


“이제 그만들 식사해요. 다 식겠어요.”

승조는 멈추지 않는 이야기에 입가에 미소를 띠고 중재했다.


“오랜만에 할머님 만나 뵈니까 너무 반가워서 배도 안 고프네요.”

“너도 그래? 이 할미도 오랜만에 손녀 보는 것 같아서 밥 안 먹어도 배가 불러.”

고개를 작게 저어 내던 승조가 수희와 영순의 하얀 쌀밥 위에 뼈가 발라진 생선을 올려 두었다.


“그래도 밥은 드세요.”

“알겠습니다.”

숟가락을 든 수희가 흰밥을 푹 펐다. 영순도 그제야 숟가락을 움직여 밥을 떠먹기 시작했다.

간간이 대화를 나누며 밥을 먹다 보니 어느새 식사가 끝이 났다.

승조는 수희와 영순을 번갈아 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머니께 말씀드릴 게 있어요.”

수희는 승조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마른침을 삼킨 수희가 영순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저희 결혼하려고 합니다.”

“절대 안 된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나오는 말에 승조와 수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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