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덕후의 현장을 덮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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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덕후의 현장을 덮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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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덕후의 현장을 덮치다
2023.02.28.
“저희 결혼하려고 합니다.”
“절대 안 된다.”
당연히 영순이 기뻐할 거라 예상했지, 반대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싸늘한 정적이 찾아오기도 전이었다. 영순이 수희를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예쁘고 착한 수희를 우리 손주한테 주기는 아까워.”
수희는 철렁이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영순에게 말했다.
“저는 저 마음에 안 들어서 반대하시는 줄 알았어요.”
“네가 어디가 마음에 안 들어. 수희 너만 한 처자가 어디 흔해? 예쁜 건 네가 제일일 거야.”
길게 손을 뻗어 온 영순이 수희의 손을 붙잡았다.
“나야 네가 승조와 결혼하면 좋지만, 네 청춘이 너무 아까워서 그래.”
자신을 아끼는 영순의 마음이 전해져, 수희가 영순의 주름진 손을 매만졌다.
“이렇게 늙고 나니까 결혼이라는 거, 놀 거 다~ 놀고 해도 늦지 않더라고.”
“오늘 할머니를 잘못 모셨네요. 수희랑 저, 응원해 주실 줄 알았는데.”
서운해진 손자가 끼어들자 영순이 수희의 손등을 토닥이다 손을 거뒀다.
“그래도 너희 둘이 마음이 같다면야 내가 반대해도 결혼하겠지. 안 그래?”
말없이 웃어 보이던 수희가 뒤늦게 입술을 떨어트렸다.
“승조 오빠 저한테 하나도 안 부족해요. 없으면 안 돼요, 저한테.”
“승조가 너한테 그렇게 잘해 줘?”
“네. 이런 사람 어딘가에 또 있을까, 할 만큼요.”
“내가 그러면 져 줘야지.”
영순이 가만히 있는 승조를 단속했다.
“승조 너는 네 아빠처럼 절대 고집 같은 거 부리지 말고. 항상 싸우면 네가 먼저 잘못했다고 하고.”
“제가 잘못했을 수도 있는데요.”
수희가 넌지시 말을 건네자 영순이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수희 너는 잘못 좀 해도 돼.”
누가 뭐라 해도 영순은 손자며느리 편이었다.
승조는 손자 편이 아닌 수희 편을 드는 영순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곁에서 든든하게 수희를 지켜 줄 가족은 이제 남지 않았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수희를 배신했다. 하나 남은 주형마저 수희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그러니 자신의 할머니라도 수희의 편이기를 바랐다.
“하여튼 결혼하기로 한 거, 둘이 알콩달콩하게 잘 살아.”
영순도 허락했으니 이제 남은 산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승조의 아버지 병호였다.
***
다음 날, 아침을 맞이한 수희와 승조가 아일랜드 식탁 앞에 앉았다.
부지런히 아침을 준비한 승조가 수희의 앞에 놓인 접시를 밀어 주었다.
“정말 샐러드만 먹어도 되겠어? 토스트라도 먹지.”
“결혼식도 올려야 하는데 이제부터 몸 관리해야지.”
“괜히 무리해서 다이어트하다가 쓰러질까 봐 그래.”
“오빠 앞에서는 이렇게 먹어도 일할 때는 군것질 많이 해.”
샐러드를 포크로 콕 집던 수희는 거실에 있는 TV로 시선이 꽂혔다.
테이블 위에 있던 리모컨을 든 수희가 작게 줄여 놓았던 TV 볼륨을 키웠다.
[배우 강은채 씨에게 학교 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 글을 올렸습니다. 10년 전, 고등학교에 다니는 내내 강은채 씨에게 지독한 학교 폭력에 시달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은채의 소식에 수희는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던 승조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잔에 든 우유를 마셨다.
[한편 강은채 씨의 소속사에서는 차후 사실을 확인 후 입장을 발표하겠다고 전했습니다.]
친하지는 않았어도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학교 폭력을 의심받으니 기분이 어수선했다.
“저 내용 사실 아니겠지? 학교 폭력이라니…….”
“글쎄, 뉴스까지 나올 정도면 사람들이 믿을 만한 증거가 있다는 거겠지.”
승조는 사실을 전부 알고 있으면서도 수희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한다면 기사를 터트린 장본인으로 자신을 의심할까 싶어서였다.
학교 폭력을 기사화한 건 승조가 아니었지만, 사실 피해자에게 유능한 변호사를 붙여 준 건 승조였다.
은채에겐 학교 폭력을 알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지, 피해자의 고소 진행까지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 강은채와의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니다.
이건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려 온 피해자를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주형의 동영상이 불러온 여파를 덮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설령 이 모든 사실을 수희가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멀리할 리는 없었지만, 조금이나마 수희에게 미움받을 만한 일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Rrrrr―
승조는 테이블 위에서 간절하게 울려 대는 휴대폰을 바라봤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지만, 지금 이 타이밍에 전화를 걸어 올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승조가 전화를 받지 않고 통화 거절 버튼을 누르자 수희가 의아해했다.
“누구 전환데 안 받아?”
“안 받아도 돼. 스팸 전화야.”
“그렇구나.”
아무런 의심 없이 수희가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승조는 휴대폰을 들어 전화 온 번호를 망설임 없이 차단했다.
***
회장실 불을 끈 채 병호는 TV로 영화 <침수>를 관람하고 있었다.
이왕이면 영화관 하나를 통째로 빌려 큰 화면으로 볼까 했지만, 저녁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어 양 실장을 시켜 TV로 영화를 결제했다.
<침수>는 수희의 등장으로 시작됐다. 홀로 아픈 할머니를 모시는 수희는 저녁을 만들기 위해, 마트로 가 반찬거리를 사던 중이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계산을 하려던 중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게 된다.
똑똑.
흥미진진한 진행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양 실장이 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회장님, 한 대표님 오셨습니다.”
“승조가? 잠깐 기다리라고 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병호는 리모컨을 쥐어 잡다가 양 실장에게 벽 쪽으로 손가락질했다.
“불 좀 켜, 양 실장.”
“네.”
양 실장이 불을 켜자 병호는 얼른 TV를 끄고 책상 앞으로 뛰어갔다.
의자에 착석하자마자 문을 열고 승조가 안으로 들어왔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한창 바쁜 시기에 이렇게 회장실 왔다 갔다 해도 되는 거야?”
그리 화를 낼 만한 일이 아닌데도 병호는 승조에게 호된 꾸지람을 했다.
승조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꺼내려다 어딘가 어두운 회장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창가에는 회색 암막 커튼이 쳐져 있었다.
“왜 커튼을 치고 계셨습니까?”
승조는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환한 빛이 새어 들어오자 병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헛기침을 했다.
“너무 밝아서 커튼 치고 있었던 거야.”
“평소에 어두운 걸 싫어하셨잖아요.”
승조가 양쪽에 있던 커튼을 걷어 내자 병호는 꽁한 심기를 내비치지 못해 안달이 났다.
“나이가 드니 밝은 게 싫어진 거야. 놔둬.”
“어두운 곳에 오래 있으면 눈 나빠지십니다.”
하고 싶은 말을 속 시원하게 하지 못하니 병호의 입술에 경련이 일어났다.
‘저놈의 자식이 안 하던 짓을 해.’
영화를 마저 보기 위해 병호는 얼른 승조를 내쫓아야겠다 싶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 때문에 온 거야.”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되시면 수희랑 같이 저녁 드시죠.”
“오수희랑 같이?”
“싫으십니까?”
승조의 되물음에 병호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같이 먹고 싶다고 하니 먹어 줘야지.”
“일전에 수희랑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무슨 일.”
“평소의 아버지시라면 당연히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소름 끼칠 정도로 날카로운 녀석.
수희가 나온 드라마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병호에게 수희란 딴따라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패밀리>를 본 순간 ‘딴따라’라는 속어는 저 멀리 치워 버리게 되었다.
오랜만에 자신을 울고 웃게 했던 수희에게 그런 불경스러운 단어를 붙일 수 없었다.
“그래도 네 체면이 있는데 거절할 수 없지.”
“아버지가 언제 제 체면 생각해 주셨습니까?”
“이놈의 자식이! 꼬박꼬박 말대답은!”
병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승조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양 실장님한테 일정 조율해서 장소랑 시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앉아서 떠들 시간 없어. 해야 할 일이 많아. 어서 나가 봐.”
머리 꼭대기까지 욱하고 치솟았던 화를 삭이며 병호가 손을 훠이훠이 저어 냈다.
승조는 평소와 다르게 별다른 논쟁 없이 대화를 끝내는 이 상황이 어색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병호에게 결혼 이야기를 아직 꺼내지 않았기에 가능한 건가 싶었다.
승조가 돌아서 회장실을 나가자마자, 병호가 결재판을 향해 있던 고개를 슥 들어 올렸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병호는 엉덩이에 불이 난 것처럼 벌떡 일어서서는 커튼부터 쳤다.
그리고 벽에 붙은 스위치를 눌러 회장실 불을 전부 끈 뒤에 소파에 편히 앉아 안경까지 썼다.
마지막으로 테이블 위의 리모컨을 들어 보다 만 영화를 틀었다.
[지진이다! 모두 대피해!]
[모두 밖으로 나가요! 어서!]
[영수야! 어디 있어! 영수야! 저희 아들 보셨어요?]
바닥이 균열 날 정도의 거대한 지진에 마트 안 사람들이 종이 인형처럼 쓰러졌다.
그중에는 수희도 있었다. 수희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시멘트들을 피해 계산대 아래로 숨었다.
지진으로 당장 대피해도 모자랄 판국에 수희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당장 나가야지. 전화할 시간이 어디 있어.”
병호는 손으로 무릎을 ‘탁’ 치며 역정을 냈다.
수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단축 번호 1번을 눌렀다.
그리고 흙먼지가 나뒹구는 마트에서 몸을 웅크린 채 상대방이 전화를 받기를 기다렸다.
달칵,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마자 수희가 급박한 목소리를 냈다.
[할머니, 나 아진이. 할머니, 내가 금방 갈 테니까 겁먹지 말고 큰길로 나가 있어. 알겠지?]
분명 전화는 받았는데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바르르 입술을 떨며 수희가 간절하게 휴대폰을 붙들었다.
[할머니, 내가 꼭 갈게.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할머니한테 갈게!]
과몰입한 병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입가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왠지 가슴이 구름으로 가득 찬 것처럼 몽글거리며 펑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뒤늦게 갱년기라도 오는 건지 TV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병호의 눈에 습기가 찼다.
“이 장면 보고 저도 감동했었습니다.”
“감동할 수밖에 없지. 자기 안위보다 할머니가 우선이라니.”
응? 회장실에는 나 혼자밖에 없을텐데.
내내 TV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린 병호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몸을 펄떡였다.
“억! 네가 여기 왜 있어!”
병호는 땀이 흥건한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회장실을 나갔었던 승조가 소리도 없이 제 곁에 서 있었다.
“제가 들어오는 소리도 못 들으실 만큼 영화에 집중하고 계시던데요?”
“집중하다니! 우연히 TV를 틀었는데 나오길래 보고 있었던 것뿐이야.”
“아버지, 왜 거짓말을 하세요. 수상하게.”
병호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고 싶었지만, 원체 거짓말에는 서툴러 말을 더듬거렸다.
“뭐, 뭐가 수상해.”
“이 영화 개봉한 지 아직 1년도 안 된 작품이라 무료로 방영할 리가 없을 텐데요.”
이 위기를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수희를 승조의 곁에서 떼어 내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하던 병호였다.
그런데 이제 와 수희가 나오는 드라마와 영화들을 골라 보고 있었다고 어떻게 말할까.
“양 실장!”
소파에서 일어선 병호가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양 실장을 불러 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양 실장이 들어오자 병호가 TV를 가리켰다.
“이거 양 실장이 틀어 놨던데, 양 실장이 결제해 놓은 거야?”
병호는 오른쪽 눈을 열심히 깜박였다.
병호와 30년을 넘게 일한 양 실장이었다. 병호의 눈짓에 양 실장이 바로 고개를 숙였다.
“맞습니다, 회장님. 제가 회장님 보시라고 결제해 놨습니다.”
“왜 쓸데없는 짓을 하고 그래! 양 실장도 내가 오수희 인정했으면 좋겠나? 나는 지금 오수희가 마음에 들어서 내버려 두는 게 아니야! 이런 걸로 내 마음 돌릴 생각 하지 말라고!”
미안해, 양 실장.
눈썹을 찌푸린 병호가 양 실장에게 애잔한 눈빛을 보냈다.
아닙니다, 회장님.
양 실장 역시 병호의 마음을 전부 이해하기에 잔잔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병호가 TV를 끄자 양 실장이 회장실의 불을 켰다.
“어서 너도 나가 봐. 할 이야기는 다음에 하고.”
“알겠습니다.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회장실을 나온 승조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병호의 행동이 영 수상했다.
드라마, 영화는커녕 뉴스조차 TV로 보는 걸 못 봤다.
그러고 보니 회장실이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이다 했더니 없었던 TV가 생겨났다.
설마…… 수희가 나오는 영화를 보기 위해서?
“그럴 리가 없지.”
수희를 딴따라라고 부르며 모욕하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영화 하나 때문에 저 큰 TV를 덜컥 회장실 안에 들일 리가 없다.
고개를 절절 저어 낸 승조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