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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예비 시아버지의 비밀 (114/118)


114. 예비 시아버지의 비밀
2023.03.04.



 
그리고 토요일이 성큼 다가왔다.

병호는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화장실로 들어와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너무 칙칙한가.”

진홍색의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면서 병호는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양 실장은 노란색 넥타이를 추천했지만, 고민하던 병호는 진홍색 넥타이를 매고 나왔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중요한 일정이 있는 날에는 항상 진홍색 넥타이를 매서였다.

그건 즉, 병호에게 수희와의 식사 자리가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손바닥으로 옷깃을 툴툴 털어 낸 병호가 화장실을 나와 직원의 뒤를 따랐다.

직원이 닫혀 있던 하얀색 문을 열어 주자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는 수희가 보였다.

점잖은 얼굴로 병호가 들어서자 긴장한 수희가 자리에서 일어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TV에서만 보던 수희가 제 앞에 서 있자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영상 속 장면이 제 눈앞에서 움직이는 기분이랄까.

이전까지만 해도 몰랐던 수희의 매력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라든지, 갈색빛이 도는 눈동자라든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라든지.

어느 곳 하나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으니 승조 녀석이 껌뻑 죽는 거구나 싶었다.


“아버지, 앉으세요.”

넋 놓고 수희를 보고 있던 병호는 괜히 목을 가다듬으며 두 사람의 건너편에 앉았다.

덩그러니 서 있던 수희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인사를 안 받아 주시네. 역시,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거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어도 자꾸만 마음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 정도에 풀 죽을 수는 없으니 수희가 병호에게 먼저 물음을 건넸다.


“오시는 데 길이 많이 막히진 않던가요?”

병호는 수희 대신 승조를 보며 나무랐다.


“쯧, 승조 너는 말이야, 집에서 이 구석진 곳까지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알면서 여기서 보자는 소리를 해?”

가만히 듣고 있던 수희가 아랫입술을 꼭 깨문 채 병호를 지그시 바라봤다.


“이 식당 음식이 정갈하고 맛도 좋아서 제가 승조 씨한테 여기로 오자고 했어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회장님.”

살짝 수그러드는 수희의 고개에 병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당황해 승조에게 시선을 돌리니, 불만 가득한 눈빛을 자신에게 보내고 있었다.

수희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꼬투리를 잡는 인간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억울한 병호가 해명할 틈도 없이 직원들이 애피타이저 접시를 가지고 룸 안으로 들어왔다.

직원이 흰 접시를 테이블 위에 내려 둔 뒤 룸을 나가자 수희가 말했다.


“대신 음식은 마음에 드실 거예요. 맛있게 드세요.”

살가운 말 한마디를 해 본 적이 없으니, 병호는 그저 숟가락을 들어 음식을 맛봤다.

겉보기에는 다른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양송이수프와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런데 부드럽게 목을 넘어가는 양송이 향이 무척이나 향긋했다.

입 안이 깔끔하게 비워졌지만 코끝에는 은은한 향이 남아 있었다.


“양송이 향이 진하구나.”

처음으로 돌아오는 병호의 대답에 수희는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이 레스토랑 주인분께서 농작물을 키우시는데, 직접 기르신 거라 그런지 재료가 신선하고 맛도 좋더라고요.”

“정말 그래. 재료가 신선한 게 느껴져.”

입 안에 깊게 맴도는 양송이 향에 계속해서 손이 가는 수프였다.

왜 수희가 서울 근교가 아닌 외곽에 있는 레스토랑까지 데려왔는지 알 수 있었다.


“승조 씨한테 들으니까, 회장님께서 당뇨 위험 판정을 받으셨다고 하더라고요.”

“승조 너는 쓸데없는 소리를 했구나.”

괜히 수희 신경 쓰이게.

혀를 끌끌 차는 병호가 승조를 홉뜬 눈으로 노려보자, 수희가 웃으며 승조의 팔을 쓸어내렸다.


“이 레스토랑이 친환경 농작물로 요리하기도 하고, 제가 오랫동안 레스토랑 주인분이랑 알고 지내서 특별히 신경 써 달라고 부탁했어요.”

이렇게 세심한 부분까지 배려할 줄 아는 아이였나.


“그래서 이 먼 곳까지 회장님을 모시게 됐습니다.”

버르장머리가 없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어른을 공경할 줄을 아는 애였구나.

알게 모르게 감격하고 있던 병호는 가슴 한편에 꽃이 봉긋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진심 어린 존중과 관심을 받아 본 게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다.

아내와 헤어지고 나서는 자신에게 건네 오는 많은 여자의 유혹을 굳이 뿌리치지 않았다.

성격 차이로 합의하고 헤어졌지만 허한 마음은 숨길 수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여러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것도 불혹이 넘어가니 귀찮아졌다.

병호는 회사를 키우는 목적만 가지고 사람들과도 담을 쌓았다.

그런데 파릇파릇 자라나는 새싹과 닮은 수희를 만나니 자신에게도 사람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 병호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잘한 선택이야. 마음에 들어.”

예기치 못한 칭찬에 수희가 깜짝 놀라 승조를 바라봤다.

승조도 순순히 자신의 아버지가 칭찬할 줄은 몰랐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순항을 이어 가는 분위기 속에서 식사는 마저 이어졌다.

메인 요리인 스테이크가 나오고, 직원이 물러나자 승조는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수희와 결혼하려고 합니다.”

근엄하게 자세를 고친 병호가 손에 쥐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 두었다.

잔뜩 긴장한 수희가 손을 말아 쥐자, 테이블 아래에서 승조의 손이 소리 없이 넘어왔다.

수희의 손등을 감싸 쥔 승조가 말을 이었다.


“식은 5월에 올리려고 합니다.”

승조의 말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병호의 대답이 돌아오지를 않았다.

쿵쾅대던 심장이 입 밖으로 벌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병호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어서 수희가 하얀 테이블 위만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날짜 정해지는 대로 양 실장 통해서 전해. 일정 미리 빼 둬야 하니.”

당연히 한 번은 역정을 낼 줄 알았건만, 병호는 순순히 두 사람의 결혼을 받아들였다.

병호는 이곳에 오기 전부터 승조가 꺼낼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구니 곧 결혼하겠다, 짐작하고 있어서였다.


“저희 결혼 반대 안 하십니까?”

갑자기 달라진 병호의 태도에 승조가 물음을 던졌다.


“내가 헤어지라고 한다 한들, 둘이 헤어질 거냐?”

“절대요.”

“아뇨.”

곧장 나오는 승조와 수희의 대답에 병호가 콧방귀를 뀌며 스테이크를 썰었다.


“그렇게 마음이 잘 맞는 걸 보니 결혼할 만하구나.”

수희는 혹시 병호에게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해졌다.

한때 병호는 제 주변 사람들을 고난에 빠트리면서까지 승조와 헤어지길 바랐었다.

아무리 승조가 회사를 빼앗으려 했다 하더라도, 자신을 대하는 태도까지 바뀐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서 먹지 않고 뭐 해. 비싼 음식 식는다.”

“아, 네.”

병호가 수희의 접시를 보며 나무라자, 수희가 뒤늦게 나이프와 포크를 손에 쥐었다.

메인 요리로 어느 정도 배를 채웠을 때, 병호가 냅킨으로 입을 닦아 냈다.


“너는 결혼하고 난 뒤에도 계속 연기할 생각이냐?”

수희는 자신에게 묻는 말임을 깨닫고 얼른 입에 있던 고기를 씹어 넘겼다.

급하게 음식을 넘기다 사레가 걸려 수희가 가슴팍을 내리치자, 옆에 있던 승조가 나서 대신 답했다.


“결혼한다고 일 그만둘 필요는 없으니까요.”

물로 칼칼한 목을 달랜 수희가 비장하기까지 한 어투로 제 뜻을 전했다.


“연기는 죽을 때까지 하고 싶습니다, 회장님.”

절대 반대하려던 게 아닌데, 어쩐지 자신이 훼방을 놓으려는 것처럼 돼 버렸다.

당혹스러운 얼굴을 갈무리한 병호가 고개만 주억거렸다.

병호의 속뜻을 알 리 없는 수희는 명치가 묵직하게 아려 왔다.


‘내가 계속 연기하는 게 마음에 드시지 않는 걸까.’

수희의 속을 알 리 없는 병호가 자기 딴에는 공감대를 만들기 위해 대화를 끌어냈다.


“아기는 언제 가질 생각이냐.”

하지만 노력과 다르게 꺼내는 주제마다 두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아이는 아직 생각 없습니다.”

어려운 문제에 수희가 답하기도 전에 승조가 나서 막아섰다.

어째서인지 병호가 이야기를 꺼낼 때면 공기가 딱딱하게 엉겨 붙는 듯했다.

뚝뚝 끊기는 대화에 병호는 원하는 방향과 조금 다르게 흘러간다 싶었다.

마지막 요리인 디저트가 나오고 세 사람이 식사를 마무리해 갈 때쯤이었다.


“수희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승조 너는 나가 있어.”

병호가 승조에게 갑작스러운 퇴장 명령을 날리자 수희가 더 당황해서 눈을 굴렸다.

승조는 혹여 병호가 수희에게 아픈 말들만 골라서 할까 자리를 뜨지 않았다.


“저 있는 자리에서 하시죠.”

“나가 있으래도.”

“여기 있겠습니다.”

“씁! 이놈이 말을 왜 이렇게 안 들어!”

점차 병호의 소리가 높아지자, 수희는 승조의 팔을 살포시 짚어 냈다.


“오빠 나가 있어요. 회장님이랑 단둘이 이야기할게요.”

“그래도.”

“괜찮으니까 어서.”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선 승조가 병호에게 한마디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승조가 문을 닫고 나가자 테이블 위에는 그야말로 싸늘한 정적이 찾아왔다.

어색한 공기가 머물자 수희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심하고 있었다.


“여기 방음은 잘되냐.”

먼저 정적을 깨트린 건 의외로 병호였다.

수희가 잔잔히 고개를 끄덕이자 병호가 괜히 목을 가다듬으며 운을 뗐다.


“내가 얼마 전에 아주 우연히, 정말 우연히 네가 나오는 <침수> 영화를 보게 됐다.”

여전히 거짓말을 영 못하는 병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거기서 네가 할머니는 이미 죽었을 거라고 포기하라던 사람들한테 한 대사가 있었지.”

“아, 영식 아저씨가 살 만큼 사셨으니 젊은 네가 물에 뛰어들 필요 없다, 했던 부분요?”

“그래, 그 부분.”

손뼉까지 쳐 보이며 병호가 신난 얼굴을 했다.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재밌게 본 듯하니 수희 또한 내심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그 부분을 인상 깊게 보셨나 봐요.”

“그다음에 나온 네 대사, 직접 들어 보고 싶더구나.”

아. 그래서 오빠한테 나가라고 한 거구나.

이제 보니 병호는 연기를 계속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것도 모르고 병호가 결혼 후에 배우를 그만두길 바란다고 생각했다니.

자신을 길에 지나가는 벌레 보듯 했던 병호의 눈길이 바뀌자 수희는 열정이 샘솟았다.

의자를 밀고 일어선 수희가 감정을 잡은 뒤 병호에게 말했다.


“잘될지 모르겠지만, 한번 해 보겠습니다.”

최근에 이렇게 떨린 적이 있었던가.

차가워진 손끝을 쥐락펴락했던 수희가 심호흡한 뒤 금방 연기에 빠져들었다.


“누가 그래요. 나이 들면 쉽게 죽어도 된다고.”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수희의 대사에 병호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젊든 나이 들었든, 똑같은 생명이니까 소중히 해야 하는 거잖아요.”

영상에서 보던 것보다 실제로 앞에서 펼쳐지는 수희의 연기가 더욱 깊게 와닿았다.

길었던 대사를 끝낸 수희가 병호를 보자, 병호는 저도 모르게 손뼉을 치고 말았다.

조용한 룸 안에 박수 소리만 가득 차자 병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수고했다. 앉아라.”

병호가 앞에 놓인 의자를 눈짓하자, 수희가 신이 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입가에 내내 맴도는 미소에 병호가 뚱한 얼굴로 꼬집어 물었다.


“왜 웃고 그래.”

“회장님이랑 저 사이에 비밀이 생긴 게 신기해서요.”

분명 승조에게는 수희의 연기에 깊이 감명한 걸 알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승조를 내보낸 것이다.


“회장님이라니.”

엄하게 일러두는 목소리에 수희가 미소를 지웠다.


“……불러라.”

“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아버님!’이라고 부르라고.”

괜스레 버럭 소리를 냈던 병호는 민망해진 건지 수희의 눈을 피했다.

동그랗게 솟아오른 뺨이 아플 만큼 수희는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네, 아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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