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승만의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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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승만의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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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승만의 회개
2023.03.07.
병호와의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운전 중이던 승조는 조수석에 앉아 있는 수희를 곁눈질했다.
식사를 끝낸 후부터 집으로 돌아가는 지금까지 혼자서 싱글벙글 웃었다.
“나 잠깐 자리 비웠을 때, 아버지랑 무슨 이야기 했어.”
“내가 아버님이랑 무슨 이야기 했는지 궁금해?”
“당연하지. 계속 웃고 있잖아. 같이 좀 웃자.”
병호와 처음 만든 비밀을 하루 만에 발설할 수는 없었다.
“아버님이랑 비밀 지키기로 약속까지 했어. 절대 안 돼.”
정지 신호에 차가 멈추고, 승조가 수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까 아까부터 회장님이 아니라 아버님이라고 부르네.”
“회장님이 아버님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했어.”
승조는 도대체 그 짧은 시간 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자신을 룸 밖으로 내보내기에 수희에게 겁박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그 반대인 듯했다.
갑자기 변해 버린 제 아버지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엇이 아버지를 바꿔 놓은 건지 알고 싶어도 수희가 입을 다무니 알 수 없었다.
수희를 가만히 바라보던 승조가 앞으로 몸을 깊숙이 기울였다.
가늘게 눈을 뜬 채 승조가 수희의 똥그란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왜, 왜?”
갑자기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수희가 당황했다.
승조는 수희의 눈과 코, 입을 차례로 눈에 담더니 작게 혼잣말을 뱉어 냈다.
“아버지가 이제야 예쁜 걸 알아차렸나?”
조용한 차 안에 내려앉는 그의 목소리에 수희의 볼이 발그스레하게 달아올랐다.
“오빠 눈에나 그렇게 보이는 거야. 아버님은 외모 안 보셔.”
승조의 어깨를 두 손으로 살짝 밀어낸 수희가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쯤 숙이고 있던 허리를 바로 세운 승조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 아버지 외모 봐. 만나고 다니던 여자분들이 다 연예인이었으니 말 다 했지.”
“그래도 아버님은 나 외모 때문에 좋아하시는 거 아니야.”
“수희 너, 꽤 확신한다?”
“어! 신호 바뀌었다.”
은근슬쩍 말까지 돌리고. 분명 둘 사이에 뭔가 있었던 게 분명한데 전혀 모르겠단 말이야.
더 물어봤자 수희가 알려 주지 않을 것 같으니 승조가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액셀을 밟은 승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머물렀다.
무슨 일이 있었건, 수희가 웃으니 그걸로 됐다 싶었다.
기분 좋은 하루 끝에 선 두 사람의 얼굴에는 오랫동안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결혼식 날짜가 확정되자마자 어디서 새어 나간 건지 승조와 수희의 결혼설이 돌기 시작했다.
무성하게 피어오르는 결혼설에 철용과 친분 있는 기자를 통해 기사를 내보냈다.
[‘5월의 신부’ 오수희, 예비 신랑은 FL 그룹 회장 외동아들.]
결혼 기사가 나오자마자 간간이 나오던 애란과 관련된 기사들은 전부 묻혀 버렸다.
기획사 대표실에서 대본을 보고 있던 수희는 책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을 바라봤다.
낯선 지역 번호에 수희는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번호였지만, 이끌리듯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여기 참바른 요양병원입니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병원 이름에 수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네, 그런데요.”
[오승만 씨 자제분 되실까요?]
아주 오랜만에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 아버지의 이름에 수희는 입술이 붙어 버렸다.
잠깐 사이에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건 승만이 요양병원에 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었다.
혹여 승만의 상태가 악화돼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려는 걸까 봐 겁이 났다.
“네, 제가 오승만 씨 딸인데요.”
[시간 되시면 저희 요양병원에 잠시 들러 주실 수 있을까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수희는 곧바로 거절하지 못했다.
승만이 저지른 기만으로 인해 천륜은 어겨 버린 지 오래였고,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고 한들 다시는 승만을 만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쉽게 끊어 낼 수가 없는 게 가족이었다.
“……제가 시간이 안 될 것 같네요.”
[바쁘지 않으실 때 들러 주세요. 꼭 드려야 하는 것도 있어서요.]
“끊겠습니다.”
완전한 거절을 하지 못하고 수희가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책상 위에 올려 둔 수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요양병원에서 자신에게 전달해야 할 게 무어란 말인가.
머리가 어지럽고, 숨이 턱턱 막혔다.
겨우 제 아버지를 잊고 살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화 한 통에 이때까지 한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전화가 왔던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수희는 뜨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
결국 그간 했던 다짐들을 저버리고 수희는 요양병원을 찾았다.
선글라스를 낀 수희가 안으로 들어서자 로비 데스크에 있던 직원들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수희는 넓은 내부를 둘러보며 입술을 뗐다.
“오승만 씨…… 때문에 왔습니다.”
승만의 이름이 나오자 데스크 뒤쪽에 있던 비품실에서 직원 한 명이 튀어나왔다.
직원은 상자를 품에 안은 채 반가운 표정으로 수희에게 말을 걸어 왔다.
“오승만 씨 자제분이시죠?”
“네, 맞아요. 저한테 주실 게 있다고 해서 찾아왔어요.”
“잠시만요!”
활발한 성격의 직원은 데스크에 앉아 있던 직원에게 비품 정리를 부탁했다.
그러고는 데스크 밖으로 나와 위층과 연결된 계단을 손으로 가리키며 허리를 굽신댔다.
“위쪽으로 올라가서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네.”
직원을 따라 올라온 수희는 2층에 있는 상담실 중 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 좋은 일로 찾아온 게 아니어서 그런지 얼른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가고 싶었다.
“무슨 일로 절 부르신 건가요?”
수희의 물음에 직원이 “아차차.” 하며 주머니에 있던 명함 하나를 꺼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이제야 소개하네요.”
명함을 받아 들자 직원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근무하고 있는 요양 보호사 임선아라고 합니다.”
나이는 어림잡아 서른 중반 정도로 보이는 선아는 눈매가 서글서글했다.
수희는 제 소개를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이미 승만이 알렸을지 몰라도, 굳이 자신의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묘하게 감도는 어색한 분위기에 선아가 미소를 띠며 말을 건넸다.
“수희 씨에 대해서는 아버님께 많이 들었어요.”
역시나 선아는 수희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다.
선망이랄까, 존경이랄까, 반짝이는 선아의 눈동자를 보자 수희는 숙연해졌다.
아픈 아버지를 단 한 번도 보러 오지 않는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뻔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제 이야기를 많이 하셨나 봐요.”
“그럼요. 아주 자랑스러운 딸이라고 하셨죠.”
그 자랑스러운 딸을 왜 아프고 나서야 찾았을까요.
입에 맴도는 말을 삼킨 수희가 시답지 않은 생각들을 지워 냈다.
“어떤 용건으로 절 부르신 건가요.”
벽이 느껴지는 수희의 냉담한 반응에 선아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제가 주제넘은 건 알지만, 아버님의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어서요.”
“소원요?”
선아는 상담실로 올라오기 전에 미리 챙겨 둔 흰 봉투 하나를 꺼냈다.
두툼한 흰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선아가 수희에게 살포시 밀어냈다.
“이게 뭔가요?”
“아버님께서 수희 씨 결혼 소식 보고 많이 우셨어요. 지금까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면서요.”
“……그래서요.”
퉁명스러운 수희의 대답에도 선아는 멈추지 않았다.
“주제넘어 보일지 몰라도, 전 오승만 환자 전담 보호사니까요. 조금이라도 오승만 환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고자 이걸 전달해 드리게 됐어요.”
“…….”
“오수희 씨 결혼할 때 보태라고 오승만 환자께서 제게 대신 전해 주셨어요.”
결혼을 진행하면서 단 한 번도 승만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런데도 제 머릿속에서 승만을 지워 냈던 건, 승만을 용서할 만큼 아픔이 채 가시지 않아서였다.
“아버님께서는 결혼식에 초대받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하셨어요. 자신이 한 행동이 있는데 어떻게 그 자리를 가겠냐고요. 대신, 아버지 된 도리로 돈이라도 조금 보태 드리고 싶다고 하셨어요.”
“아버지 상태가 어떤가요. ……혹시, 아직도 간 이식이 가능한 상태인가요.”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선아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아뇨. 3주 전에 폐와 뼈까지 전이된 걸 확인하고 저희 요양병원에 있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오셨습니다.”
이제 더는 간 이식이 필요 없는 상태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여린 안쪽 살을 잘근잘근 깨물던 수희가 가장 묻고 싶은 말을 꺼냈다.
“살날이 얼마나 남았나요.”
“저희 병원에서는 길면 두 달…… 보고 있습니다.”
두 달.
지금은 12월의 초입이었다.
5월에 있는 수희의 결혼식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는 말이었다.
뾰족한 칼날 끝이 가슴을 쿡쿡 쑤셔 대는 것 같았다.
절절한 연민 같은 게 심장을 파고들어 왔다.
수희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가족을 끊어 내는 법을 말이다.
“이곳은 남아 있는 여생을 아픔 없이 보내게 해 드리는 곳이지만, 저는 아버님의 마음마저 편하게 보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수희 씨가 곤란한 입장이라는 걸 알면서 연락드렸습니다.”
선아는 수희에게 고개를 푹 수그렸다.
“죄송합니다.”
“고개 드세요. 하셔야 할 일을 하신 것뿐이니까요.”
내내 예민하게 반응했던 수희도 한결 신경이 누그러들었다.
화를 낼 상대는 앞에 있는 선아가 아니라는 걸 깨달아서였다.
수희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흰 봉투에 손을 얹었다.
“이걸 받으면 아버지 마음이 편할까요?”
“그럼요!”
자리에서 일어선 수희가 핸드백 안에 흰 봉투를 밀어 넣었다.
“제가 아빠한테 할 수 있는 유일한 선의예요.”
“잘 생각하셨어요. 아버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가 보겠습니다.”
수희가 고개를 수그리자 선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수희는 그대로 돌아서려다 핸드백 안에 있는 자신의 명함과 펜을 꺼냈다.
명함 뒤에 무언가를 적은 수희가 선아에게 내밀었다.
“제 동생 휴대폰 번호예요.”
“…….”
“동생이 아버지를 잘 따랐어요. 지금 아버지 소식을 듣는다면 아마 뵈러 올 거예요.”
아무리 수희가 천륜을 저버렸다 하더라도, 주형이 승만과 연을 끊는 것까지 관여할 수는 없었다.
“동생한테도 아버지 소식 전해 주실 수 있나요?”
“네, 그렇게 할게요.”
“감사합니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겨우 돌려 상담실 문을 열고 나온 수희는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로비를 밟는 구두 굽 소리가 점차 빨라졌다. 요양병원 밖으로 나온 수희는 급하게 차에 올라탔다.
“하아.”
긴 숨을 내쉬며 수희가 좌석에 머리를 기댔다.
뜨끈한 이마에 손등을 가져다 댄 수희는 달달 떨리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상담실을 나올 때까지 목구멍에 맺혀 있던 말 하나가 있었다.
“아버지를 만나 뵙고 갈게요.”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그 말을 하지 못하고 나왔다. 아니,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어머니를 두고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자식을 버린 아버지였다.
10년이 훌쩍 지나 나타나 간을 목적으로 다시 자식들에게 접근해 왔다.
게다가 거짓으로 죽은 어머니를 매도하려 했다.
과연 지금 모든 걸 후회한다 해서 이 모든 걸 용서할 수 있는 걸까.
용서하지 못하는 내가 잔인하고 모진 걸까.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앞으로 쏟아진 몸에 핸들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Rrrrr―
흐트러진 정신을 깨우는 벨 소리에 수희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