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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평범한 행복 (116/118)


116. 평범한 행복
2023.03.11.



 
수희가 요양병원에서 전화를 받고 온 곳은 스튜디오 그린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수희가 대표실 안으로 들어가자 승조가 책상 앞에서 일어섰다.


“왔어?”

승조가 다가오자 수희가 두 팔을 활짝 펼치고 그에게 안겼다.

요양병원에 다녀온 사이에 기운이 빠져 버린 수희가 힘없이 말했다.


“나 충전이 필요해.”

승조는 수희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좀 더 깊숙이 끌어안았다.

크게 숨을 들이쉬기 어려울 만큼 서로의 몸이 밀착했지만, 수희의 입술 끝은 오히려 서서히 올라섰다.


“충전 좀 됐어?”

“조금 더.”

승조가 떨어지려 하자 수희가 그의 허리를 꽉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피곤한 줄 알았으면 내가 너 데리러 갔을 텐데.”

“내가 오빠 빨리 보고 싶어서 달려온 건데, 뭐.”

충분히 승조의 품 안에 안겨 있던 수희가 고개를 뒤로 물렸다.


“충전도 했겠다, 이제 나머지는 밥으로 채워야지.”

허전한 배를 토닥이는 수희를 보며 승조가 물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으음. 연어덮밥? 아니면 장어덮밥?”

“근처에 연어덮밥 맛있게 하는 곳 알고 있어. 거기로 가자.”

“응.”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수희에게 승조가 손을 내밀었다.

익숙하게 그의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수희가 걸음을 옮겼다.

그와 함께 있는 순간이면 모든 걱정거리가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평범한 행복, 그게 자신의 손안에 있는 듯했다.

***

수희는 요양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꽤 덤덤한 어조로 승조에게 꺼내 놓았다.

승조를 만나러 가는 동안 어수선했던 마음을 정리한 뒤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끝까지 승만을 보지 않기로 했다 하더라도, 제 아버지인데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애써 웃어 보이는 수희를 보며 승조는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괜히 그녀가 또 아픔을 억눌러 참다가 속으로 다치기라도 할까 봐서였다.


“수희야,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다 네 탓이 아닌 거 알지?”

“…….”

“다 네가 짊어질 필요는 없어.”

그가 하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에 수희는 고개만 끄덕였다.

자신의 뺨에 닿는 시선에 수희가 쭈뼛거리며 덮밥집을 쓱 둘러보았다.

점심을 먹기 위해 나온 회사 직원들이 모두 수희와 승조의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희는 제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백을 품에 끌어안으며 승조에게 속닥거렸다.


“사람들이 왜 우리만 쳐다보지? 내 가방에 돈 들어 있다는 거 들었나?”

진지한 수희의 반응에 승조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선글라스 안 끼고 왔잖아.”

점심을 먹으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인 덮밥집에 연예인이 앉아 있으니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수희는 이제야 시선을 알아차린 듯했지만, 승조는 막 들어섰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다.

수희는 제 눈가를 만져 보고는 턱이 벌어졌다.


“아, 차에서 안 끼고 나왔나 봐.”

“괜찮아. 밥 먹을 때도 선글라스 끼고 있는 거 불편하잖아.”

마침 덮밥집 사장이 두툼한 연어가 올려진 덮밥 두 그릇을 놓아 주었다.

승조는 이곳에 차 비서와도 온 적이 있지만 이렇게 두꺼운 연어를 본 건 처음이었다.

수희의 팬이었던 건지 사장이 수희에게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가실 때 사인 한 번 부탁드립니다.”

사장은 주변 테이블의 눈치를 보며 속닥거렸다.


“오수희 씨.”

이미 수희의 정체가 탄로 났는데,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에게 들킬까 싶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따라서 목소리를 줄인 수희가 웃어 보이자, 사장이 엄지를 척 들어 올리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승조는 수희 덕분에 연어로 빼곡히 덮인 덮밥을 먹게 됐지만 영 탐탁지 않았다.

나이가 많든 적든 수희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유 불문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수희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어서 먹자. 맛있겠다.”

“응, 먹자.”

숟가락을 든 수희가 덮밥을 먹고 있을 때, 옆 테이블에서 카메라가 반짝였다.

승조가 고개를 돌려 옆 테이블을 보자, 휴대폰을 들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카메라가 수희를 향하고 있는 걸 확인한 승조가 말없이 덮밥을 푹푹 찔러 댔다.


‘당. 장. 치. 워. 라.’

남자는 마치 승조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압도적인 아우라에 남자는 휴대폰을 거두고 소지품을 챙겨 식당을 나갔다.

그제야 마음 놓고 밥을 먹던 승조는 한 가지 수희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작은 입을 오물거리는 수희를 바라보자, 승조의 눈길을 느낀 수희가 고개를 들었다.


“왜?”

수희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승조가 그릇을 숟가락으로 의미 없이 비비적댔다.


“너한테 아직 말 못 한 게 있어서.”

“뭔데?”

“주형이에 관한 거야.”

제 동생 이름이 나오자 밝았던 수희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주형이가 오빠한테 돈 빌려 달래?”

혹여 그에게 폐를 끼쳤을까 봐 걱정되는 투였다.


“아니, 그런 말은 안 했어.”

“하아, 다행이다.”

“돈 빌려 달라고 해도 안 줘. 없어서가 아니라 주면 안 되는 걸 아니까.”

“응, 맞아.”

처음에 손을 벌리는 게 어렵지, 그 이후에는 돈을 버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그걸 깨닫는다면 수희가 시달렸던 것처럼 그 역시 시달릴 게 분명했다.

수희는 자신과 달리 승조가 무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돈 빌려 달라는 말 대신, 직장을 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자신 모르게 승조에게 그런 부탁을 했을 줄이야.


“그래서 스튜디오 그린 비품 관리 쪽으로 자리 알아봐 줬어. 지금 거기서 일하고 있고.”

“왜 그랬어. 혼자서 알아서 하도록 해야지.”

“그래도 네 동생이잖아. 이 정도는 내가 해 줘도 되겠다 싶었어.”

수희와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길거리에 나앉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쉽게 돈을 벌기 위해 수희가 마련해 준 거처를 팔아넘겼다.

그런데도 아량을 베푼 건, 어쨌거나 수희의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고마워, 오빠. 신경 써 줘서.”

“고마워할 필요 없어. 스튜디오 그린에도 마침 직원이 필요한 참이라 인력 넣은 거니까.”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승조는 덮밥을 숟가락으로 비비며 수희가 묻지 않은 말들을 늘어놓았다.


“차 비서한테 들어 보니까 수희 네 동생이라고 알리지 않았더라고. 인사 평가도 내가 생각했던 기준보다 더 잘 받았어.”

“…….”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오주형이 아주 엉망은 아니었나 봐.”

아무런 말 없이 밥을 먹던 수희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난 모르겠어.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하는 건지.”

제 아버지도 자신이 저지른 일을 후회한다고 했다.

자식을 버리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걸.

하지만 생이 얼마 남지 않아 마음의 짐을 덜어 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닐까.

순수한 마음으로 제 아버지도, 제 동생도 보고 싶었지만, 수희가 받은 깊은 상처들은 쉽게 덮어지지 않았다.


“급하게 말고,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

“…….”

“그러면 알게 되겠지. 사람이 변했는지, 변한 척하는 건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수희가 뒤늦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직은 주형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후에는 주형이 이런 제 생각을 바꿔 주길 바랐다.

***

주형이 어디서 무엇을 하건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막상 승조에게 주형의 소식을 듣고 나니 발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비품 관리부는 팀장과 사원 두 명으로 이루어진 부서였다. 사원 둘 중 하나가 주형이었다.


“이거 다 정리하고 들어가요.”

팀장의 말에 주형이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는 상자들을 둘러보았다.


“언제까지 하면 될까요?”

“오늘까지. 이거 말고 정리할 거 산더미니까 후딱후딱 해요. 젊으니까 손도 빠를 거 아니야.”

“……알겠습니다.”

비품 관리실에서 팀장이 나오자 수희가 등을 돌려 건너편 창고로 들어갔다.

팀장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수희가 선글라스를 끌어 올리며 창고에서 나왔다.

점심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주형은 비품 관리실에서 가득 쌓인 물품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무슨 일을 점심시간에 시키냐고.”

먼지가 가득한 비품 관리실에서 묵묵하게 물품을 분류하던 주형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점심시간이 20분 남아 엎드려 자고 있었더니 팀장이 비품 관리실로 불러온 것이다.

비품을 상자에서 꺼내던 주형이 날카로운 종이의 외곽에 찔려 손을 얼른 빼냈다.


“아오! 씨!”

손을 부여잡은 주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상자를 발로 차며 날뛰었다.


“내가 돈 몇 푼 벌자고 이걸 해야 하냐고.”

혼자서 씩씩대는 주형을 보면서 수희는 한숨을 쉬며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발길을 채 돌리기도 전에 주형이 털썩 주저앉으며 상자 안을 들여다봤다.


“그래도 해야지. 어쩌겠어.”

예전과 달리 쉬이 포기하지 않는 주형을 보고 수희는 작게 미소를 띠었다.

언젠가 바뀔지 모른다는 기대감과 함께 말이다.

네 시간을 내리 물품을 정리하던 주형이 손을 털며 밖으로 나왔다.

묵직한 문고리에 고개를 내려 보니 검은색 비닐봉지가 문고리에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봉지를 꺼내 안을 들여다보자 주형이 즐겨 마시는 자몽 음료가 들어 있었다.

텅 빈 복도를 둘러보던 주형은 누가 뒀는지 모를 자몽 음료를 마셨다.

***

순백으로 흩날렸던 눈이 녹고,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봄이 찾아왔다.

얼마 남지 않은 결혼식으로 수희는 승조와 함께 웨딩드레스 숍을 찾았다.

둥근 단상 뒤에 있는 문으로 들어간 수희가 가장 먼저 준비된 드레스를 입었다.

머리에 티아라까지 얹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영락없는 새 신부를 닮아 있었다.


“아직 식장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긴장되네요.”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정리해 주던 직원 두 명이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처음으로 예비 신랑님한테 드레스 입은 걸 보여 주는 거잖아요.”

“드레스 입은 걸 보고 우시는 예비 신랑님들도 드물게 계세요.”

수희는 승조가 울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이미 <패밀리> 마지막 촬영에서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승조가 봤기 때문이다.

만약, 그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그가 울었을까.

아마 눈에 습기 정도는 차지 않았을까.


“커튼 열게요.”

직원의 말에 수희가 단상 위에 올라섰다.

모형 부케를 쥐고 있는 수희의 손이 잘게 떨렸다.

흰 커튼이 걷히고 소파에 앉아 있는 승조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래로 떨어트렸던 시선을 끌어 올리자 승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말이라도 해 주면 좋으련만, 승조는 아무런 말 없이 수희만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아무 말이 없어?”

하다못해 예쁘다는 말도 없이, 넋이 나간 사람처럼 쳐다만 볼 뿐이었다.

뒤에서 지켜만 보던 직원들도 승조의 얼어 버린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예뻐?”

“응, 예뻐.”

수희의 물음에 겨우 꺼낸 말이었다.

예상치 못한 그의 반응에 뚱한 얼굴로 수희가 입술을 내밀었다.

직원들도 보고 있으니 차마 투덜대지는 못하고 수희가 획 돌아서 안으로 들어갔다.

수희는 어깨를 털썩 내려놓으며 직원에게 물었다.


“우는 예비 신랑 말고, 무심한 예비 신랑도 있었나요?”

“저 정도 반응은 평범하죠. 휴대폰 보는 예비 신랑님도 있는데.”

“휴대폰을 본다고요?”

“그럼요. 마지막 드레스는 보지도 않고 약속 있다고 가는 예비 신랑님도 있었는걸요?”

눈동자에 습기는 안 차도 박수 정도는 쳐 줄 수 있지 않나.

뚱한 수희는 차례로 준비된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승조의 반응은 다음 드레스를 입고 나왔을 때도 비슷했다.

설마 했건만 세 번째, 네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슬슬 수희의 분도 차츰차츰 쌓여 갈 때쯤.

마지막 드레스를 입은 수희가 단상 위에 올라섰다. 이번에도 그의 반응은 전과 다름없을 거라 여기며 커튼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닫혀 있던 커튼이 걷히고 한층 어두워진 실내에 서 있는 승조가 보였다.

남색 정장을 입고 있던 승조는 어느 틈에 검은색 턱시도로 갈아입은 채였다.


“오빠.”

얼떨떨한 얼굴로 수희가 승조를 부르는데, 그가 등 뒤에 숨겨 두었던 꽃다발을 꺼냈다.

수희의 뺨처럼 분홍색으로 물든 장미꽃을 들고 있는 승조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


“네가 드레스 입은 거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네가 저 위에 서 있는데 말문이 턱 막히더라.”

“…….”

“너무 예뻐서. 저렇게 예쁜 사람이 내 신부라는 게 안 믿겨서, 그래서 말이 안 나왔어.”

뜨뜻미지근했던 반응도, 내내 굳어 있던 표정도, 모두 설렘과 두근거림 때문이었다.

한 발자국, 승조가 다가서자 두 사람의 거리가 한껏 좁혀졌다.

시선을 끌어 올린 수희에게 승조가 분홍 꽃다발을 내밀었다.


“나랑 결혼해 줘서 고마워, 수희야.”

내미는 꽃다발을 받아 든 수희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목구멍에 달라붙어 있는 울음이 금방 터져 나올 것만 같아서였다.


“나한테 잡혀 줘서, 고마워.”

“응.”

“다시는 안 놓칠게. 다시는 안 놓을게.”

“응, 응.”

결국, 눈물은 속절없이 터져 버렸다.

볼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에 허리를 숙인 승조가 수희와 눈을 맞췄다.


“왜 울어.”

“그냥.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너무 기뻐서 우는 거야.”

“기쁘면 웃어야지.”

고개를 끄덕거린 수희가 눈물을 지우고 입매를 들어 올렸다.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방울이 아래로 톡 떨어졌다.

반달로 휘어진 수희의 눈가를 쓸어내린 승조가 수희와 이마를 맞댔다.


“내가 오빠 평생 책임질게.”

“내가 책임져 줄 거야. 그러니까 넌 옆에만 있어.”

푸스스, 달빛이 부서지듯 두 사람의 반짝이는 미소가 입가에 은은하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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