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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새로운 가족 (117/118)


117. 새로운 가족
2023.03.14.



 
결혼식을 단 3주 앞둔 날이었다.

승조는 스튜디오 그린 대표실로 주형을 불렀다.

방금까지 창고 정리를 끝내고 온 건지 주형은 대표실 앞에서 몸을 털고 안으로 들어갔다.

입사한 지 불과 4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주형의 모습은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입사 초까지만 해도 왁스로 잔뜩 멋을 부리던 머리는 짧게 깎여 있었다.

게다가 언제든 비품을 정리할 수 있도록 주머니 뒤편에는 목장갑이 꽂혀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대표님.”

툭툭 튀어나오던 언사는 어디 가고 깍듯하게 승조에게 인사할 줄도 알았다.

공과 사를 구별 못 하고 승조에게 ‘매형’이라고 불러 대던 주형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승조는 책상에서 일어서며 앞에 놓인 소파를 눈짓했다.


“앉아.”

주형이 자리에 앉자 승조가 책상 서랍장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주형의 건너편 자리에 있는 소파에 앉은 승조가 손에 쥐고 있는 걸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은 손바닥만 한 남색 봉투였다.


“이게 뭐예요?”

“열어 봐.”

봉투를 끌어와 승조와 번갈아 보던 주형은 머뭇대다 봉투의 입구를 열었다.

안에 있는 걸 꺼내자 주형은 그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직감할 수 있었다.

남색 종이 위에는 승조와 수희의 이름이 로즈골드 빛 박으로 박혀 있었다.

안을 펼쳐 보자 흰 종이 위에 승조와 수희의 결혼식 장소와 날짜가 적혀 있었다.

청첩장을 덮으려던 주형은 결혼식 날짜를 가만히 바라봤다.

어딘가 낯익은 날이라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숫자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결혼식 날짜, 누나가 정한 거예요?”

승조가 고개만 주억거리자 주형이 제 입술을 꽉 말아 물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치자 대뜸 눈물이 치솟는 것만 같았다.


“이날, 아버지 생신이에요.”

결혼식 날짜는 승만의 생일이었다.

병원에서 2개월 시한부를 선고했지만, 승만은 4개월이 넘은 지금까지도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겨우 숨만 쉬며 살아 있는 승만이 언제 숨을 거둘지 알 수 없었다.

주형은 마지막까지 제 아버지 곁을 지키기 위해 주에 한 번씩 찾아가고 있었지만, 수희는 단 한 번도 승만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


“저는 누나가 아버지를 버린 줄 알았어요.”

“너희 누나가 누굴 버릴 사람은 아니잖아.”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주형이 입술을 떨어트렸다.


“전 버렸잖아요.”

“…….”

“아, 누나한테 뭐라고 하는 건 아니에요.”

고개를 저은 주형이 묻지도 않은 말들을 줄줄 늘어놓았다.


“누나 믿고 이제까지 방탕하게 살았으니 당연하죠.”

“수희가 그래? 널 버렸다고?”

잠시 말을 잃었던 주형이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아뇨. 그냥,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고만 했어요.”

“…….”

“직접 돈도 벌어 보고, 그 돈으로 공부도 하고, 사고 싶은 것도 사라고.”

“그렇게 직접 돈 벌어 보니까 어때.”

잠시 고민하던 주형이 먼지가 앉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자조적인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X나 힘들죠.”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있는 말이 없어 비속어를 입에 담았다.

승조가 웃음을 터트리자, 주형도 실없이 웃으며 말했다.


“누나가 저한테 깨달음을 주려고, 절 버린 거라는 말씀을 하시고 싶은 거죠?”

“수희는 단 한 번도 너 버린 적 없어.”

“아버지도, 저도 찾아오지 않잖아요.”

“꼭 눈앞에서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눠야지 그게 사랑인 건 아니잖아.”

고요히 눈을 키운 주형이 승조에게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누나가…… 계속 저랑 아버지를 지켜보고 있다는 말이에요?”

승조는 주형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아무런 말이 없는 승조에게 주형은 더는 답을 갈구하지 않았다.

한때는 제 누나처럼 매정한 인간은 없을 거라 저주를 퍼부은 적도 많았다.

어렸을 적에 어머니의 사랑 한번 온전히 받고 자란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매일 “누나가 우리들의 희망이다.”, “누나가 잘돼야 너도 잘되는 거다.”라며 수희에게만 집중했다. 처음에는 당연한 줄만 알았던 올곧은 어머니의 사랑이 잘못되었음을 안 건 중학생 때부터였다.

사랑에 목말라 어머니에게 나도 좀 봐 달라며 말썽도 부리고 떼도 써 봤지만 변한 건 없었다.

그렇게 성인이 되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았다.

그 뒤로 성격은 완전히 어긋나 버리고, 받지 못한 사랑에 대해 수희에게 화풀이했다.

그리고 수희의 말대로 직접 돈을 벌어 보니 세상에 쉬운 건 없다는 걸 알았다.


“누나한테 상처 줄 거 다 줘 놓고 이제야 깨달았어요.”

너무나 늦게 수희가 했던 말들이 가슴에 와닿았다.

돈 같은 거 쉽게 버는 건 줄 알았다. 제 누나를 보니 그렇게 보였다.

그저 사람들 앞에서 웃어 주기만 하면 돈이 들어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수희는 제 동생으로 인해 이미지가 실추됐음에도 공백기 없이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섰다.

그 속이 얼마나 썩어 들어갔을지 알고 있기에, 주형은 그런 수희를 보며 가슴이 저렸다.


“저 결혼식 못 가요.”

주형은 테이블 위에 청첩장을 올려 두었다.


“인생에 단 한 번뿐인 결혼식이야.”

“그래서 더 못 가죠. 그 행복한 날, 제가 있으면 누나가 신경 쓰일 테니까.”

“아직도 수희가 널 미워한다고 생각해?”

가만히 앉아 있던 주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나는 누구 미워하는 거 잘 못해요.”

“아는데 왜 오지 않는다고 하는 거야.”

주형은 답을 알려 주지 않고 앞에 놓인 청첩장을 밀어냈다.


“정중하게 거절하겠습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 주형이 깍듯하게 인사를 하며 돌아섰다.

수희라면 자신이 결혼식에 와 주길 바랄 것이다.

그런데도 찾아가지 못하는 건, 괜히 수희의 결혼식을 망칠까 싶어서였다.

극비리에 진행되는 결혼식이었지만, 기자들은 곳곳에 있을 것이다.

이제야 겨우 자신에 대한 소문이 덮어졌다. 자신의 욕심으로 수희를 보러 갔다가, 식장을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행복을 빌어 주는 건 뒤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여겼다.

아쉬운 듯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긴 주형이 대표실을 나갔다.

***

예약하는 것도 전쟁 같은 고급 레스토랑이 휴일도 아닌데 전부 비어 있었다.

단 한 테이블을 제외하고 말이다. 긴 테이블에 앉은 사람은 총 여섯이었다.

지긋이 나이를 먹은 남성들이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중 다섯 명의 눈은 스테이크가 아닌 오늘의 주인공인 병호를 향해 있었다.


“오랜만에 모여서 다 같이 식사하니까 좋네.”

KK산업 고 회장이 넉살 좋게 웃으면서 말을 꺼내며 분위기를 띄웠다.


“한 회장, 며느리가 유명한 배우라고 하던데. 좋겠어.”

엔 코스메틱 임 회장이 다들 궁금해할 만한 주제를 꺼냈다.

이미 예상했던 질문인 듯 병호가 입술을 씩 들어 올리며 와인을 마셨다.


“뭐가 좋아. 승조, 그 녀석이 좋지.”

“나도 그 배우 아주 좋아해. 얼마 전에 <침수>였나. 그 영화도 두 번이나 봤다고.”

어딘지 모르게 어깨가 으쓱 들어 올려지는 것 같은 건 병호의 착각이 아니었다.


“수희가 거기서 연기를 제일 잘했어. 난 어제 한 번 더 봤으니 벌써 열한 번째지.”

승조가 <침수>를 열 번을 봤으니, 승조의 기록을 병호가 깬 셈이었다.

다들 병호의 며느리 사랑에 의외라는 듯 눈알을 굴렸다.


“그래도 배우 며느리라니. 우리는 좀 더 대단한 며느리가 들어올 줄 알았어.”

나지막하게 일침을 가해 오는 건 병호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위 회장이었다.

위 회장은 가람 그룹의 총수로, 가람생명보험, 가람물산, 가람생활건강 등 여러 가지 계열사를 가지고 있었다.

둘은 비슷한 시기에 며느리를 들이게 되며 묘한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


“두 달 뒤에 위 회장 아들도 결혼한다고 했던가?”

병호는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물었다.

위 회장은 잔뜩 들떠서는 제 며느리 자랑을 해 댔다.


“연애는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더니, 강서식품 차녀를 데려왔더라고.”

강서식품이라는 말에 테이블 위가 떠들썩해졌다.

백화점에 납품되는 업체 중 강서식품 제품이 가장 많다고 할 정도로, 최근 들어 소비자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기업이었다.


“우리 아들 덕분에 강서식품에서 우리 그룹을 물심양면 돕겠다더군.”

다들 부러워할 이야기였지만, 병호는 어째서인지 짠하다는 눈빛이었다.


“위 회장, 회사 사정이 안 좋나 봐.”

“뭐?”

“그렇게 지원받을 만큼 회사 사정이 안 좋았으면 우리 쪽에 먼저 말하지.”

붉으락푸르락해진 위 회장의 얼굴이 볼만했던 건지 사람들은 웃음 참기에 돌입했다.


“한 회장,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을 해.”

이를 악문 위 회장의 입가가 덜덜 떨려 왔다.

여유가 넘치는 얼굴로 병호가 두툼한 고기를 썰었다.


“이번 연도도 우리 그룹 실적이 부동의 1위를 지켰다지. 그런 내가 며느리 주머니를 본다?”

“…….”

“말이 안 되는 소리야, 위 회장.”

어디 하나 반박할 수 있는 부분이 없자 위 회장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역시 병호가 죽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한 회장은 예쁘장하기만 한 며느리로 만족한다는 말이야?”

끝까지 지지 않으려 위 회장이 병호의 위상을 끌어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야심 차게 꺼낸 말은 병호의 자존심을 털끝 하나 건들지 못했다.


“일 잘하는 아들이 예쁜 며느리까지 데려왔으니, 이 늙은이가 좋아해야지 그럼.”

“…….”

“내 며느리가 위 회장네 며느리보다 예뻐서 샘나서 그러는 건가? 어디 한번 볼까.”

병호는 주머니 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며 위 회장에게 물었다.


“어디 식품이라고? 강약식품? 강강식품?”

“하. 진짜 이 사람이.”

열이 뻗친 위 회장이 냅킨을 냅다 테이블에 집어 던지며 큰소리를 쳤다.


“지금 사람 무시해?”

스르륵,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선 병호가 평온한 얼굴을 지우고 그러데이션 분노를 선보였다.


“사람은 네가 무시했지!”

“내가 뭘 무시했는데.”

“잘난 식품 집 며느리 들였다고 배우 며느리 무시하는데, 그걸 나더러 지켜만 보라는 거야?”

“내가 안타까워서 그래. FL 그룹 외동아들이 데려온 게 겨우! 배우 며느리라서 그러지.”

병호는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위 회장이 위선으로 하는 말들이라는 걸.

위 회장은 어떻게든 FL 그룹의 체면을 구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인 것처럼 보였다.


“위 회장. 한 마디만 더 해 봐.”

검지를 들어 올린 병호가 위 회장에게 손가락질했다.


“내 모든 걸 걸고 너희 회사 문 닫게 해 줄 테니까.”

 

 
위 회장은 마른침을 연달아 꿀꺽 삼켰다.


“내, 내가 어디 구멍가게 연 줄 알아?”

“그건 지켜보면 알겠지.”

구겨진 옷깃을 훌훌 털어 낸 병호가 엄한 눈을 하고는 일러두었다.


“내 집안에 들어왔으니 내 사람이고, 내 가족이야.”

“…….”

“나는 내 가족 무시하는 건 못 참아.”

병호는 위 회장이 했던 것처럼 냅킨을 보란 듯 테이블 위에 집어 던졌다.


“궁금하면 계속 나 건드려.”

고저 없는 목소리가 테이블 위에 내려앉고, 병호가 망설임 없이 자리를 떠났다.

레스토랑을 떠나자 테이블 위는 더욱 살얼음판처럼 얼어붙어 버렸다.

잔뜩 기분이 상해 버린 위 회장도 이를 바득바득 갈다가 인사도 없이 나가 버렸다.

고요해진 테이블은 두 사람이 나가자 금방 시끌벅적해졌다.


“이번에 위 회장이 한 방 먹었는데?”

“위 회장은 부러우면 그냥 부럽다고 할 것이지.”

“위 회장 오수희 팬이잖아. 지금 위 회장 가람생명보험 전속 모델이 오수희지, 아마.”

이유가 있었던 위 회장의 질투에 사람들이 서로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잘잘 저었다.

***

그날 저녁, 병호는 수희와 승조를 자신의 집으로 소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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