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끝이 아닌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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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끝이 아닌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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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끝이 아닌 시작
2023.03.18.
식당에 앉은 세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가정부가 준비해 둔 차를 마시고 있었다.
수희는 회사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승조와 병호를 번갈아 보았다.
자신을 부른 데엔 이유가 있을 거라 여겼는데, 병호는 별다른 말을 건네 오지 않았다.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차만 홀짝이고 있는데, 승조가 손목에 찬 시계를 보고 자리를 마무리하려 했다.
“시간이 늦었네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승조가 일어서기도 전에 병호가 손을 들어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수희한테 할 말이 있어서 불렀다.”
찻잔을 내려 둔 수희가 병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수희한테 FL 물산 주식 100만 주 정도를 증여할 생각이야.”
놀란 수희가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병호는 그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FL 패션몰 주식도 50만 주 정도 가지고 있는 게 좋겠구나.”
“아, 아버님.”
“그래. FL 계열사 중에 가지고 싶은 주식이 있으면 말만 해라.”
이미 병호는 증여해 주기로 작정한 듯, 수희에게 통보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FL 그룹의 주식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수희는 지금 이 상황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승조에게 도와 달라는 눈빛을 보내자, 그가 대신 입을 열었다.
“갑자기 주식 증여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FL 그룹 회장이 가지고 있는 주식 좀 떼서 며느리 준다는데, 뭐가 잘못됐냐?”
“150만 주는 조금이 아닙니다.”
“왜. 네가 아니라 수희를 줘서 그러는 거냐?”
“수희가 부담스러워하니까 하는 말입니다.”
승조와 병호 사이에 낀 수희는 납작한 종이처럼 눌리는 것만 같았다.
이리저리 눈동자만 굴리고 있던 수희가 병호에게 말했다.
“아버님이 절 생각해 주시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주식은 양도받을 수 없습니다.”
“승조 말대로 부담스러워서 그런 거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병호가 목소리를 높였다.
“네,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지금 당장 정확한 계산을 할 수는 없었지만, 150만 주면 족히 500억을 가뿐히 넘는 양이었다.
솔직한 수희의 말에 병호는 토라진 듯 코끝을 찡그렸다.
“넌 이제 좋든 싫든 FL 그룹 며느리다. 이 정도는 당연히 받아 둬도 된다는 거야.”
자식도 아니고 며느리였다. 며느리에게 150만 주를 증여하겠다고 나서면, 다들 떠들썩하게 기사를 써 댈 게 분명했다.
아끼는 며느리가 배우라는 이유로 무시를 당하니 그 체면을 자신이 세워 줄 심산이었다.
“아버님 말씀도 맞지만, 제게는 너무 많은 돈입니다.”
조심스레 소신을 밝혔지만, 병호는 인정하지 않았다.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병호가 며칠 전에 봤던 기사 하나를 떠올렸다.
“얼마 전에 10억을 기부했더구나.”
승만이 결혼식에 보태 쓰라고 준 돈은 8억이었다.
봉투 안에 들어 있던 돈이 8억 원이라는 건, 받은 지 이틀 후에야 확인하고 알아차렸다.
이미 받은 돈을 돌려줄 수도 없었기에 2억을 더 보태 익명으로 기부했다.
그러나 익명 기부자의 이름이 밝혀지게 되면서 떠들썩하게 기사가 나게 됐다.
“너도 네 돈을 네가 원하는 곳에 쓰는 것처럼, 나도 내가 원하는 곳에 쓸 권리가 있어.”
“……하지만.”
“나한테 하지만은 없다.”
조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엄포하듯 병호의 목소리에 잔뜩 힘이 실려 있었다.
제 뜻을 굽히지 않던 수희는 처음으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우리 집안에 들어온 며느리에게 주는 선물 같은 거야. 어른이 주는 걸 계속 무시할 생각이냐?”
“……받겠습니다.”
“그래야지.”
결국, 병호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내 할 말은 이제 끝났다. 가 봐라.”
수희와 승조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급하게 병호가 수희를 앉히려 했다.
“수희, 너는 나랑 잠깐 이야기 좀 더 하자꾸나.”
마치 한 몸처럼 승조가 다시 앉으려 하자, 병호가 눈을 부라리며 식당 밖으로 눈짓했다.
수희가 잔잔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승조가 두 사람을 두고 식당을 나갔다.
병호는 식당 문이 닫히자마자 설레는 얼굴빛을 숨기지 못한 채 말을 꺼냈다.
“얼마 전에 영화 찍고 있다는 말 우연히 들었다.”
‘우연히’가 아니라 병호가 직접 컴퓨터를 두드려 찾아냈다.
“네, 승조 씨 제작사 측하고 영화 작업하고 있어요.”
“흐음, 그래.”
분명 하고 싶은 말이 있을 텐데 병호는 차만 마실 뿐이었다.
말을 해 주지 않으니 수희는 병호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추측해야 했다.
“영화 개봉 날짜 나오면 말씀드릴게요.”
원하는 말이 아니었던 건지 쓴 커피를 마신 것처럼 병호가 입술을 짓눌렀다.
찻잔을 내려 둔 병호가 가늘게 눈을 뜨며 결국 직접 운을 뗐다.
“보통 영화가 개봉하면 콜록, 초대권 같은 걸 준다고 하던데.”
헛기침까지 더해 가며 병호가 원하는 목적을 꺼내 놓았다.
용케 병호의 의도를 알아차린 수희가 부드러운 어조로 답했다.
“당연히 아버님께 VIP 초대권 드려야죠. 가장 좋은 자리로 준비해 달라고 할게요.”
“뭘 또, 좋은 자리까지야.”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한 병호의 한쪽 입매가 씩 올라섰다.
“개봉하면 꼭 와 주셔야 해요.”
“내가 시간이 된다면 가마.”
흐뭇하게 웃어 보이는 병호를 보니 수희도 따라 미소가 지어졌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잡아먹을 듯 굴었던 병호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정말 가족이 된 것처럼 수희를 보는 병호의 눈은 호의로 가득 차 있었다.
편안한 공간에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이 순간이 수희에게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
서울 한 호텔의 야외 결혼식장.
철통 보안 속에서 수희와 승조의 결혼식이 준비되고 있었다.
가까운 지인들만 초대된 이 결혼식에는 초대장이 있어야만 지정된 자리에 입장할 수 있었다.
하얀 버진 로드 위의 시작과 끝에는 아치 모양의 화려한 꽃들이 풍성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선선히 불어오는 실바람에 얹어진 꽃향기가 야외에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대화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낮게 깔린 음악이 한층 줄어들었다.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잠시 뒤, 신랑 한승조 군과 신부 오수희 양의 결혼식이 시작되겠습니다. 내빈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모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의 말에 따라 테이블은 초대받은 이들로 속속들이 채워졌다.
실내에 있는 신부 대기실에서 수희는 식장으로 입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철용은 휴대폰을 든 채 그런 수희의 모습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담아냈다.
“지금 기분이 어때?”
철용의 물음에 수희는 밭은 숨을 내쉬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엄청나게 두근거려.”
“결혼식장에서 드라마 촬영한 적도 있잖아.”
“그때랑 전혀 달라. 그때는 홀가분한 마음이 컸는데, 지금은 그냥…… 엄청나게 떨려.”
떨린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하얀 부케를 내려다보며 수희는 자꾸만 쿵쿵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지금 가장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야?”
갑작스러운 철용의 질문에 수희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가족. 내 가족.”
자그마한 소리로 전했지만 큰 울림이 화면 너머로까지 전해졌다.
휠체어에 타고 있는 승만의 뒤로 수많은 기기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상담실 TV 화면에는 철용이 찍고 있는 영상이 실시간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가족, 내 가족.]
수희의 목소리가 스피커 밖으로 나오자마자 승만은 마른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 냈다.
소리 없이 숨죽여 우는 승만의 목에서는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승만에게 영상으로나마 결혼식 상황을 전하고 싶다고 한 건 수희였다.
한때 가정을 버리고 가족을 배반했던 아버지였다.
아픈 아버지를 보고 이제 와 용서한 건 아니었다.
단지 승만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생일 선물을 주고 싶었을 뿐이다.
눈물을 흘리는 순간마저 아까운지 승만은 손등으로 젖은 눈가를 꾹꾹 눌렀다.
“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았어.”
거칠게 숨을 내쉬며 승만이 중얼거리자, 뒤에 서 있던 선아가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선생님, 뭐라고 하셨어요?”
“난 이 긴 여행이 끝나고 나면, 다시 여행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어.”
살아가다 죽는 건 어쩌면 여행 같은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승만은 이제 곧 그 여행이 끝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행의 끝이 다시 새로운 시작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신이 다시 한번 내가 이 여행을 시작하길 바란다면.”
“…….”
“다시 저 아이의 아버지로 태어나고 싶어.”
눈가에 가득 맺힌 눈물이 뜨겁게 흘러내렸다.
후회와 미련으로 가득 찬 이 삶을, 다음 생에서라도 털어 내고 싶었다.
“그렇게 해 준다면 난 내 모든 걸 바쳐 가족들을 지킬 거야.”
저 스스로 하는 다짐과도 같은 말이 상담실에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
“지금부터 신랑 신부의 입장이 있겠습니다.”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식이 시작되자 한순간에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신랑 한승조 군이 입장하면, 힘찬 박수로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버진 로드 끝에 선 승조에게 많은 사람의 시선이 쏟아졌다.
“신랑 입장!”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께 승조가 버진 로드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조금도 긴장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무게감 있게 버진 로드 위를 가로질러 갔다.
뜨거운 환호를 받으며 승조가 주례자의 단상 앞에 섰다.
승조가 뒤로 돌자 뒤편에 있는 하얀 문 쪽으로 시선이 옮겨 갔다.
“오늘의 주인공이죠. 신부 입장!”
서서히 열리는 문에 모두 숨을 죽인 채 수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환한 조명이 뒤를 비추자 아래로 길게 떨어진 웨딩드레스가 별 가루처럼 반짝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수희의 입가에는 아직 긴장감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은 느렸지만, 모두 그 걸음마다 응원을 더해 주듯 박수를 보탰다.
승조와 눈이 마주치자 수희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환하게 웃음 짓는 수희의 모습은 지켜보고 있던 이들도 따라서 미소 짓게 했다.
승조가 손을 건네자 수희가 하얀 손끝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사람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수희는 주례자 앞으로 돌아서려는 찰나, 멀찍이 거리를 두고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시야에 맺힌 사람은 금방 사라져 버렸지만, 결혼식을 보러 온 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동생 주형이었다.
어렵사리 결혼식 초대장을 거절하고 대표실을 나왔지만, 승조는 끝까지 주형을 따라와서 손에 초대장을 쥐여 주었다.
당일까지 결혼식장에 찾아오는 걸 고민했던 주형은 수희의 입장만 보고 바로 사라졌다.
주형의 모습을 눈으로 좇던 수희는 승조의 손길에 몸을 돌렸다.
한때 미워했던 감정들은 잠시 밀어 둔 채, 주형이 자신을 지켜봐 주길 바랐다.
미워도 한때는 사랑했고, 어쩔 수 없이 가족의 울타리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주형을 보고 나니 가슴 한편에 묵직했던 걱정거리가 사라진 듯했다.
“신랑 신부 맞절.”
사회자의 진행에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본 채 고개를 숙였다.
숙였던 시선을 끌어 올린 수희는 비로소 제 앞에 선 승조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이제 막 결혼식이 시작됐는데 벅차오르는 기쁨에 입가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입가에 흐르는 미소가 지워지지 않는 건 승조도 마찬가지였다.
결혼식이 이어지는 내내 행복에 젖어 있어야 했다.
예정된 진행이 모두 끝난 후 두 사람은 걸어왔던 버진 로드를 바라보고 섰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터지는 꽃잎들을 배경으로, 부부로 가는 첫발을 내디뎠다.
고개를 들어 올린 수희가 승조를 바라보자, 그가 습관처럼 하는 말을 입에 담았다.
“사랑해.”
지켜 줄게, 끝까지.
“사랑해.”
곁에 있을게, 끝까지.
버진 로드의 끝에 선 두 사람은 맞잡은 손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핑크빛 꽃잎이 파란 하늘 위에 흩날리고,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맞췄다.
쏟아지는 환호와 축복 속에서 결혼식이 끝이 났다.
끝이 아닌 시작.
두 사람의 이야기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