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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1)화 (1/60)

| 1화

나는 도망자였다. 엉망 그 자체인 머릿속에서 그 사실 하나만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중이었고, 안간힘을 다해 도망가는 중이었다.

단언컨대 계획은 완벽했을 것이다. 매일같이 꾸는 꿈 속에서 나는 그리 외치고 있었으니까.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그날 밤, 예보에 없던 비만 내리지 않았다면 난 계획대로 도망에 성공했을 것이다.

사고는 한순간에 일어났다. 빗길 운전에 미숙해서 그랬을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가 일부러 의도한 사고였는지도.

그러나 원인이야 어찌 됐든 이제는 상관없었다. 확실한 건 그 사고로 인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것이니까.

그것도 대부분의 기억을 날려버린 채로 말이다.

“소감이 어떠세요?”

나를 향한 질문에 병원복을 벗다 말고 눈을 돌렸다. 무슨 소감. 짧게 눈짓하자 내 또래의 여자, 김수연이 살며시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드디어 퇴원하시는 날이잖아요.”

그녀의 단정한 얼굴만큼이나 깔끔하고 고상한 말투는 내가 가진 것과는 퍽 대조적이었다.

태산기획 출신이라고 했던가. 아나운서를 해도 좋았을 법한 목소리는 머릿속에 잔상을 깊게 남겼다. 되레 불쾌할 정도로.

“기분, 좋으시죠?”

김수연은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단어는 끊어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 같은 경우는 내 기분이다. 얼핏 들으면 내 기분을 살피는 것 같지만 세뇌와도 비슷한 말이다.

아마 기분 좋은 척이라도 하라는 뉘앙스겠지.

기분이 좋지 못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좋을 이유도 없었다. 한순간의 사고로 내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머리가 텅 빈 상태가 되었는데 마냥 기분이 좋아도 이상한 것 아닌가.

그럼에도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긍정했다. 김수연과 괜한 대화를 길게 나누고 싶진 않았다. 더군다나 몇 달간의 병원 생활을 드디어 청산한다는 데에 나름의 의의가 있긴 했으니까.

“이렇게 다시 걸으실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사모님.”

나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김수연과 대화를 짧게 끝내고 싶은 것에는 이 이유도 있었다. 말끝마다 따라붙는 사모님 소리. 그리고 내가 다시 두 발을 딛고 선다는 게 대단한 기적인 양 굴고 있는, 위선적인 태도.

기억을 통째로 날려버렸다고는 해도 머저리가 된 건 아니었다. 사고 전의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잘 몰라도 지금의 나는 최소한의 분별력은 갖고 있었다. 다시 말해 눈앞의 여자가 내 편인지 아닌지쯤은 파악 가능했다.

유감스럽게도 김수연은 내 편은 아닐 것이다. 나는 내 개인 비서, 그래 봤자 간병인의 명목으로 곁을 지키는 게 전부인 그녀에게 적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본능에 기인한 직감이었을 뿐.

“오늘도 어제처럼 날이 궂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수연 씨.”

“네, 사모님.”

병실 창밖으로부터 떼어낸 시선을 김수연에게 붙였다. 하나로 낮게 묶은 결 좋은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어느 쪽인지는 금세 잊어버렸지만, 조부모 중 한 명이 독일인이라던 수연은 유독 옅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저 눈을 마주 보고 있노라면, 어딘가 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이 감정의 원인을 찾고 싶어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떠오르는 게 없으니 답답함만 가증될 뿐이었다.

나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입술을 다물었다. 구태여 내 감정을 숨길 이유는 없지만 일부러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까지는 김수연을 필요로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녀와 척을 져 봤자 손해보는 건 나 한 사람뿐일 테니까.

“어디 불편하세요, 사모님?”

“……아니에요. 막상 집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좀 긴장되어서.”

김수연은 사고 전부터 날 전담했던 수행비서라고 했다. 대체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을 했기에 비서까지 두고 있었냐는 질문에 수연은 작게 웃으며 답했다.

본부장님 지시였다고. 그 짧은 대답에 나는 자격지심 같은 걸 느꼈던 건지도 모르겠다.

수연의 말에 따르면 나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코스를 밟은 사람이었다. 우연히 돈 많은 남자 눈에 걸려서 용케도 결혼까지 성공한, 가난을 등에 업은 여자.

“곧 익숙해질 거예요. 여태껏 그러셨듯이.”

“그렇겠죠.”

“제가 사모님 곁에 항상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내게 부모는 없다고 했다. 언제 돌아가셨냐는 질문에 김수연은 거기까진 잘 모른다고 말했으니 결혼 전부터 내 부모는 없었던 셈이다. 어차피 기억도 없는 사람에게 잘된 일이었다. 되찾아야 할 기억이 하나 없어진 것이니까.

부서진 뼈를 맞추고 재활치료를 하는 내내 기억을 찾는 치료가 계속되었으나 별다른 차도는 없었다.

병원에서는 뇌손상을 염두에 두고 검사를 진행했지만 다행히도 그건 아니었고, 심리적으로 충격받은 사건이 있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백지와 다름없는 상태에서 나는 그 충격이 무엇인지 떠올리는 것도 힘들었다.

담당의는 굳이 무리해서 기억을 찾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 이 정도로 기억나지 않는다면 지우고 싶은 이유가 있지 않겠냐고 덧붙이면서.

나 역시 그의 말에 어느 정도는 공감했고, 더 이상 지난 기억을 되찾으려고 애쓰는 것도 싫었기에 몸이 회복되는 대로 퇴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몇 가지 추가 검사를 더 거친 후에 결정된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퇴원 준비를 차치하더라도, 지난 일주일 동안은 내가 기억하는 몇 개월의 인생 중 가장 바쁜 시간이었을 것이다.

김수연은 내게 몇몇 주의사항을 당부하며 내 과거를 거의 외우게끔 했는데, 대부분은 남편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이를테면 내가 남편과 어떻게 처음 만났고, 어떻게 연애를 시작했으며, 어떻게 결혼을 했는지. 어느 드라마나 로맨스 소설에서나 들었을 법한 낯간지러운 이야기를 김수연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전해들었다.

“사모님?”

……그래, 설명. 내 지난 삶은 이제 설명이 필요해졌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를 일을 남의 입으로 들으면서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남편에 비해 한없이 초라한 내 배경을 하나씩 외우고, 나조차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에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행동의 결과를 두고 원인을 지레짐작하는 사람들에게 설명을 구걸해야만 했다.

“수연 씨는 언제부터…… 그 사람 밑에서 일했다고 그랬죠?”

나는 어딘가 비참한 마음을 억누르며 온화한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남편 대신 그 사람이라고 말하는 입술이 어색해서 딱딱하게 굳는 기분이었다.

“본부장님 밑에서 일한 지는 올해로 7년째입니다. 사모님을 모신 건 2년째네요.”

“그럼 수연 씨가 나보다도 그 사람에 대해선 더 잘 알겠네요.”

수연은 부정하지 않았다. 나는 그 거만한 침묵이 우스워 입꼬리를 당겼다가 빠르게 내려놓았다.

질투 따위를 하는 건 결코 아니었다. 그냥 다소 빈정 상했다고나 할까. 나는 아까부터 김수연이 줄곧 들고 있던 원피스를 턱짓하며 다시 물었다.

“어떤 남자예요, 그 사람?”

애써 지은 덤덤한 표정에 비해 목소리는 꽤 앙칼졌다. 괜한 머쓱함에 병원복을 마저 벗자 김수연이 원피스를 건네왔다.

기억이란 어찌도 이렇게나 속물적일 수 있을지.

우습게도 나를 둘러싼 기억은 지워버린 상태였으나 뭣 모르는 눈으로도 이 원피스의 값어치 정도는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다소 놀랐던 눈을 감추려 노력했지만 이미 들킨 것 같았다.

김수연이 옷 매무시를 도와주며 말했다.

“본부장님은 좋은 분이세요. 이런 명품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게 선물하실 수 있는.”

“돈이 많아 좋은 남자라는 건가요?”

“저처럼 월급 받는 직원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그렇죠. 본부장님 밑에 있는 한, 월급 밀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남자로서의 내 남편에 대해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제 상사로서 그가 어떤지였다. 나는 김수연의 기민한 답변에 속으로 경탄하며 그녀가 건네준 구두로 시선을 내렸다. 원피스와 같은 브랜드의 로고가 박힌 구두였다. 굽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신기에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것도 그 사람이 준비한 건가요?”

“네. 사모님께 어울릴 거라고도 말씀하셨어요.”

이로써 나는 혹시나 하고 품고 있던 남편에 대한 기대감을 온전히 내려놓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병원에 있는 나를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것까지는 이해했다. 오히려 속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로서는 전혀 마음도 없는 남자를 남편으로 대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퇴원하는 날까지 한 번도 못 볼 줄이야. 게다가 이런 원피스며 구두는…….

그래도 뼈가 으스러졌던 사람인데. 나라면 적어도 발 편한 운동화를 보냈을 텐데. 하지만 구두까지 신고 거울 속의 나를 보자 그가 왜 이런 선물을 보냈는지 이해는 갔다.

“예쁘네요.”

그에게 나는 그냥 고장난 장난감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제 수리가 끝난 뒤 주인을 맞이해야 하니 다시 예쁘게 포장할 수밖에.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사모님?”

기분 탓인지 가슴 언저리가 답답했다. 기억에는 없지만 신데렐라 생활이 익숙해졌을 만도 한데. 이런 옷은 처음 걸쳐본다는 듯 몸이 죄는 느낌이었다. 눈썹을 올리며 김수연을 돌아봤다.

“병원에 있는 동안 몸무게가 늘었나 봐요.”

“이번 시즌 옷이 유난히 작게 나왔어요. 몸무게는 사고 전 건강검진 때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사모님.”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듯, 김수연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깃들었다. 뭘 안다고 저리 당당할까 싶지만 당장은 그녀가 가진 정보에 의존해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원피스 차림의 거울 속 내 모습으로부터 시선을 떼어 내며 김수연에게 물었다.

“아마 그 사람 취향인 거겠죠? 이런 옷을 입은 여자가.”

대답을 바란 질문은 아니었지만 김수연은 역시나 긍정적인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대체로는 가진 것 없는 여자가 돈 많은 남자를 꿰차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조건이 필요했다. 나 같은 경우는, 외모였으려나. 돼먹지도 않은 자신감에 조소하며 병실을 크게 한번 훑어봤다.

도대체 난 어떤 삶을 살아온 건지. 어쩌다가 이런 변곡점을 맞이한 건지. 지워진 과거보다 앞으로의 미래가 더 깜깜하고 어두웠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잘 알지도 못하는 그 남자와의 결혼생활이.

“준비 다 되셨으면 이제 댁으로 모셔도 될까요, 사모님.”

김수연의 말에 나는 한숨을 작게 내뱉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다시, 어쩌면 처음으로 내 남편을 만나는 시간.

사진으로, 또 영상으로만 보던 그 남자는 실물도 똑같으려나. 과거의 나는 그를 뭐라고 불렀을까. 사고 전까지도 우리는 살가운 부부였을까.

첫 소풍을 앞둔 애처럼 미약한 설렘을 느끼던 것도 잠시였을 뿐. 사고 당시의 단편적인 기억이 떠오르자 불안감이 온몸을 감쌌다.

그날 밤, 난 대체 누구로부터 도망치고자 했던 걸까. 혹시 남편이 병원에 있는 날 찾지 않았던 이유도 사고와 관련된 것일까.

“가시죠.”

김수연이 병실 문을 열며 내게 눈짓했다.

어쩌면 기억을 지워버린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기억을 되찾은 내가 지금의 순간을 후회하지 않길.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하나씩 옮겼다.

부디 내 예감이 틀린 것이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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