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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4)화 (4/60)

| 4화

내 예상은 정확했다. 지건호가 제 아내인 나를 대놓고 무시하기 시작하자 날 보는 사용인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연민 가득한 눈빛 아래에는 왠지 모를 통쾌함도 서린 듯했다.

집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일주일. 달라진 것은 딱 그 정도였다. 내 기억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요즘 나는 신생아와도 다름없는 생활 중이다. 창원댁이 차린 밥을 먹고, 김수연이 챙겨 주는 약을 먹는다. 그 뒤엔 운동이랍시고 1층 정원을 산책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낮잠을 자거나 지금처럼 수연의 옆에서 책을 읽는다. 따분하기 짝이 없는 시간. 내 생활 반경은 모두 이 집 안에 국한되어 있었다.

“아직 비가 오려나.”

김수연의 눈치를 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수연은 제가 가진 서류에서 눈을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기지개를 켜는 척하며 은근슬쩍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 창가로 향했다.

다행히 이 집 생활은 아직까지 그리 답답하지만은 않았다. 병원 생활에 비하면 천국인 셈이다. 필요한 것을 말하면 의사의 허락 없이 즉각 대령할 수 있는 사람도 몇이나 있었다.

게다가 이 집은 누구 하나 숨어 있어도 쉽게 찾지 못할 만큼 넓었다. 비록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지건호는 제 생활에서 나를 철저하게 배제한 듯했다. 그는 내가 퇴원한 첫날, 우리가 첫 대화를 나눈 뒤로 2층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드레스룸에 있던 그의 옷가지와 시계, 향수 등은 다음 날 2층으로 사라졌다.

그의 퇴근은 자정 무렵으로 평소보다 더 늦춰졌고, 출근 시간은 동트기 전으로 더 빨라졌다. 그 결과 나는 일주일 동안 그와 대화는커녕 얼굴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는 날 아예 없는 사람 취급 했고, 나 역시 그의 눈에 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직까지는.

나는 거실 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갔다. 나무 데크를 지나면 그보다는 몇 배 넓은 잔디가 깔린 곳이었다. 곳곳에는 관리 잘된 소나무가 제 값어치를 자랑하며 서 있고, 그 옆으로는 언젠가 꽃을 피울, 이름 모를 나무들도 있다.

그나마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는 곳. 아마 난 이 집에서 이 공간을 제일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비는 그친 것 같은데 조금만 더 나가볼까. 등을 돌려 수연을 힐끔 쳐다봤다. 태산건설 일 때문일까, 그녀는 요즘따라 뭔가 바쁜 듯했다. 왜 내가 아직도 수연의 눈치를 보는지는 의문이지만, 나는 저지레하는 애처럼 살금살금 발을 뗐다.

몇 걸음 발을 떼다가 슬리퍼도 마저 벗었다. 사용인 중에 유난스러울 정도로 깔끔떠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슬리퍼가 젖은 걸 보면 나라 하나 망했다는 듯이 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발이야 씻으면 되는 거였고.

비는 오는 듯 마는 듯 짧게 뿌리고 갠 날씨였지만 잔디는 여전히 축축했다. 맨발로 젖은 잔디를 밟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불쾌한 듯 간지러운 느낌.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런 게 좋아, 지원아?’

문득 귓전을 파고드는 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지건호의 목소리였다. 출근했다는 걸 알면서도 무심결에 그를 찾다가 환청인 걸 깨닫고는 가슴을 쓸었다.

사실 내 기억에 전혀 변화가 없다는 건 거짓말이다. 때때로 지건호는 이런 식으로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온 이후에 나타난 증상이었다. 확실히 익숙한 곳으로 돌아오니 기억도 하나둘씩 돌아오려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뚜렷한 기억이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그냥, 드문드문. 지금처럼 그의 목소리만 환청처럼 느껴질 뿐. 이런 건 아무런 단서도 될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지내고 있는 2층을 쳐다봤다. 내게는 암묵적으로 출입이 금지된 구역이었다. 생각해 보면 올라가면 안 된다는 말도 없었는데 지레 피하고 있었다.

언제 한번 올라가 볼까. 저곳에 올라가면 더 많은 기억이 떠오를지도 모르는데.

한편으로는 지건호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남편에게 구태여 관심을 구걸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를 향한 내 관심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제 공간에 들어간 걸 그가 알게 되면 뭔 사달이 날까 두렵기도 했다. 굳이 소란을 피울 이유가 있나.

고개를 저으며 다시 등을 돌렸다. 비가 내린 뒤라 그런지 조금 한기가 들었다. 나는 카디건을 여미고 팔짱을 낀 채로 정원 끝에 다다랐다.

북악 스카이웨이 안쪽에 위치한 이 집은 이 동네에서도 제일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대중교통도 없고 마트 같은 편의 시설도 없지만 그만큼 완벽한 프라이버시를 보장받고 있다.

은밀한 뒷거래로 부를 축적하고 명예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이니 사생활만큼은 새어 나갈 틈이 없었다. 서울 시내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인 동시에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은 절대 올려다보지 못할 곳이 바로 여기인 셈이었다.

탁 트인 시야에 해방감을 느끼던 나는 소나무 주위를 괜스레 얼쩡거리다가 작은 묘목 앞에 발을 멈췄다. 여기 이런 게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뜬금없는 묘목이었다. 이 집 정원과도 다소 어울리지 않는 듯하고.

무슨 나무려나.

나무 앞에 꽂아둔 팻말을 보려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정작 내려간 시선 끝에 보이는 글씨는 ‘솔’뿐이었다.

솔. 나무 종류를 뜻하는 건 아닌 것 같고, 나무에게 이름을 지어준 것일까. 단정한 글씨는 아마 그의 필체인 듯하다. 지건호가 이런 곳에 관심이 있었던 걸까.

더럽게 안 어울린다며 속으로 웃다가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을 돌렸다.

지건호였다.

아직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계단을 오르던 그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다가 걸음을 멈추고는 소리를 버럭 질렀는데, 내가 못 알아듣는 걸로 봐서 한국말은 아닌 것 같았다.

‘여기, 이렇게 하는 게 더 좋은가 본데.’

순간 습기 찬 목소리가 또 한 번 귓가에 달라붙었다.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와의 잠자리에서 나누던 대화일 것이다. 나만 들었을 환청이겠지만 누군가에게 섹스 장면을 들킨 것 같아 괜히 목 언저리가 달아올랐다.

나는 자리에 가만히 멈추어 선 채 현관문으로 향하는 그를 지켜봤다. 그가 날 그냥 지나친다고 해도 괜찮았고, 알아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아니, 지금은 날 모르는 척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역시 뭔가 이상했던 걸까. 평소 때와 다르다고 느꼈는지 그가 갑자기 시선을 돌렸다.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날 위아래로 훑어보던 그는 이번에도 뭐라고 욕 같은 걸 내뱉고는 빠르게 전화를 끊었다.

순간 인사를 해야 하나 망설였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성큼성큼 나를 향해 다가왔다. 구겨진 인상은 그대로였다.

“이번엔 또 뭐야.”

지건호가 내 맨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또 사고라도 친 양, 타박하는 말투였다.

“뭐가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고.”

“그냥 좀, 안에만 있기 답답해서 나왔어요.”

나는 겨우 이런 것도 안 되냐는 식으로 그를 쏘아봤다. 대화 소리가 안까지 들렸는지 거실에서 김수연이 나오는 게 보였다. 날 따라 같이 고개를 돌린 그는 수연에게 내 발을 가리키며 뭐라 말했다. 역시나 한국말은 아니었는데, 수연은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한숨을 작게 내뱉고는 그제야 내게 시선을 주었다. 오늘도 여전히 피곤한 기색. 일주일 전보다 더 거칠어진 얼굴이었다.

일이 힘들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내가 이 집에 다시 들어와서 그런 걸까. 마음 한편으로 걱정이 되는 걸 보면 한때나마 그와 사랑했던 사이는 맞는 것 같았다.

‘지원아. 하, 지원아…….’

왜 하필이면 이 순간 이따위의 조각난 기억만 떠오를까. 수치스러웠다. 나 같은 건 이제 안중에도 없는 지건호를 앞에 두고 고작 이런 생각을…….

마치 지금 눈앞의 남자에게 깔린 듯 숨이 턱턱 막혀왔다. 이런 기억이라면 안 찾느니만 못했다.

나는 행여 내 생각이 새어 나갈까 두려워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한심하다는 듯, 내 맨발로부터 시선을 끌어올린 그가 내 뒤에 있는 묘목을 잠시 흘깃거렸다. 짙은 눈썹 사이로 실금이 생겼다.

아, 설마 내가 저 나무에 장난질이라도 쳤다고 생각한 건가. 어딘가 비뚤어진 마음에 그를 탓하며 말을 이었다.

“덕분에 감금 생활도 그럭저럭 재밌게 하고 있어요. 정원도 못 나오게 간섭할 줄은 몰랐지만.”

“말은 정확히 해야지. 감금한 적 없어.”

“당신이 나 집 밖으로 못 나가게 했잖아.”

“그렇게 말한 적도 없고. 밖으로 나갈 거면 김 실장이랑 같이 나가라고 한 거지.”

“나한테는 같은 말이에요. 지금 며칠 동안 나는…….”

“어차피 너 혼자 갈 수 있는 곳도 없잖아, 그 정신으로.”

지건호는 내 말을 끊으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한 차례 한숨을 내쉰 그는 마침 다가온 김수연으로부터 뭔가를 건네받았다. 타월이었다.

그는 수연에게 또 뭐라고 알아듣지 못할 얘기를 했다. 영어는 아닌 것 같았고, 스페인어. 아니, 이탈리아언가. 그것도 아니면 독어, 러시아어……. 모르겠다. 기억을 잃기 전에도 이쪽으론 무지했는지 나로서는 전혀 가늠도 안 되었다.

수연과 대화를 나누던 그는 목소리를 조금 키웠다가 내가 움찔거리자 소리를 낮추었다. 몇 단어를 강조하듯 여러 번 말한 그는 수연에게 들어가 보라는 듯 눈짓했다. 내내 그와 같은 언어로 대화하던 수연은 그제야 한국말로 내게 인사하며 내일 뵙겠다고 덧붙였다.

나는 멀어지는 수연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며 그에게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한 거예요?”

“알 거 없어.”

“내가 들으면 안 되는 거예요?”

“일 얘기니까.”

“그렇다고 내 앞에서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떠들 건 없지 않나. 사람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무시?”

그는 굉장히 재밌는 얘기를 들었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마치 날 무시했다는 내 말이 얼토당토않다는 듯 비웃음 치는 그의 표정은 어딘가 선득하기까지 했다.

나는 입술을 말아 문 채로 뒷말을 삼켰다. 기억이 없는 한, 그와 나의 관계에서 약자는 언제나 나였다. 내 성질껏 지내라고 한 건 그였지만 그 말에 어쩐지 눈치 보듯 숨을 죽이는 것 또한, 나다.

지건호는 날 빤히 쳐다보더니 낮게 욕을 삼키고는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무슨 짓인지 물을 것도 없었다. 그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는 수연에게서 건네받은 타월로 내 맨발을 감쌌다.

툭툭. 무심한 손길로 종아리에 튄 물기까지 닦아낸 그는 내 오금 뒤로 팔을 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몸이 들린 나는 내 허리를 감싼 손길에 놀랄 틈도 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

‘지원아.’

나는 내 머리를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옛 기억인 걸 알면서도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내 시선에 딱히 응답하진 않았다. 그냥 제 품에 안긴 날 힐끗 내려다보고는 발을 옮겼을 뿐.

지원아, 지원아.

한 발씩 뗄 때마다 꾹 다문 입매에서 그의 목소리가 퍼지는 듯했다. 한때는 다정하게 날 부르던 그의 목소리.

그가 다시 내 이름을 불러줄 때가 또 올까.

나는 막연한 희망을 품었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기억을 꼭 되찾아야 한다면 그 시절의 기억에서 끝났으면 좋겠다고 잠시나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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