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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5)화 (5/60)

| 5화

기억을 잃기 전 나는 종종 그에게 안겨서 이동했나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정도까지의 안정감을 느낄 리가 없었다. 지건호에겐 날 안고 옮기는 일련의 과정이 일상인 듯했으나, 난 뜻하지 않던 익숙함 속에서 도통 생각나는 게 없어 유감이었다.

그는 날 안은 채로 정원을 가로질러 거실로 들어갔다. 그의 지시였을까. 가방을 든 김수연과 다른 도우미들이 서둘러 현관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창원댁은 오늘 개인 사정으로 휴가를 낸 차였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이 집에는 지건호 나, 두 사람뿐이다.

그의 품에 태연하게 안겨 있던 나는 그제야 어색함을 느끼고 그의 팔을 살짝 두드렸다. 이제 그만 내려달라는 뜻이었다.

두 발로 바닥을 딛자 허리를 감쌌던 그의 손이 카디건 자락을 스치며 떨어졌다. 내 무릎께에 닿았던 그의 시선은 발아래로 미끄러졌다.

지건호에게는 예민한 도우미 못지않은 강박증이 있는 듯했다. 감히 짐작하건대 그건 그의 성장 환경이 만든 성격일 것이다. 아무리 모범적인 집안을 찾는 게 더 힘든 대한민국 재벌가라 하지만, 그중에서도 여성 편력으로 유명세를 떨친 사람이 바로 지건호의 아버지이자 현 태산의 회장 지용현이었으니까.

지용현의 첫째 아들인 지건호는 엄밀히 따지자면 태산의 적장자는 아니었다. 본처 소생은 아니었던 탓이다. 그러나 혼외자라고 하기에도 어딘가 애매했던 것이, 지용현이 결혼하기 몇 달 전 제 첫사랑과의 사이에서 생겨난 아이가 지건호였기 때문이다.

첫사랑. 말이 좋아 첫사랑이었다. 지용현은 지건호의 존재를 알면서도 약혼녀와 결혼을 감행했고,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또 아이를 가졌다. 태산의 호적상 장자, 그러나 지용현에게는 둘째 아들인 지현민이었다.

당시 아나운서였던 지건호의 모친은, 지용현의 득남 소식이 매스컴에 보도되자 제 아들의 손을 잡고 지용현의 집을 당당히 찾았다고 한다.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집안의 여자와 결혼해서 살고 있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당신이 뿌린 씨는 알아서 잘 키워보라는 말과 함께.

그녀는 지용현의 사탕발림, 제 결혼은 사업상 필요해서 하는 전략일 뿐이고 서류가 정리되는 대로 지건호와 그녀를 제대로 들이겠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고 했다.

물론 김수연이 이런 얘기까지 해 준 건 아니었다. 이런 정보쯤이야 인터넷에 조금만 검색해도 나오는 공공재 같은 것이었다. 일부 출처는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여성 잡지였는데, 그중에는 미국으로 이민 간 지건호 모친의 인터뷰도 있었으니 모두가 근거 없는 소문만도 아닌 셈이었다.

어쨌거나 지건호는 사생아 아닌 사생아 출신으로서, 태산의 장손으로 제대로 인정받기 위해 착실하게 살아야 했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아내만 세 번을 바꾼 제 아버지를 보고 자랐으니 결벽증도 갖고 있을 테고.

어딘가 갑갑하리만큼 줄 맞춰 정돈된 이 집만 보더라도…….

무심결에 거실을 훑던 것도 잠시, 여전히 눈을 내리깐 그를 보고 나도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는 지금 제집을 더럽힌 내 맨발을 보며 불쾌함을 억누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공간을 멋대로 침범한 나에 대한 분노를 짓누르듯이.

난 눈치껏 손에 들고 있던 슬리퍼를 다시 신으려다가 속으로 허, 코웃음을 쳤다. 구두 차림의 그의 발을 발견한 탓이었다.

뭐야. 나더러 맨발로 잔디 좀 밟았다고 눈치 줘놓고, 정작 본인은 구두 신고 실내로 들어오는 건 대체 무슨 심보란 말인가, 어이없게. 적반하장이 따로 없었다.

뭐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어떻게 보면 난 이 집에서 세입자 같은 신분이 아니던가. 이런 걸 굳이 언급해 봤자 실속은 없을 것이다.

괜히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을 꺼냈다.

“오늘은 일찍 들어왔네요, 웬일로.”

아, 이건 뭔가 아닌데. 여태 그를 기다렸다는 뉘앙스였다. 날 보는 그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이상하다 싶겠지.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데.

방금 내뱉은 말을 후회하며 입술 안쪽을 짓씹다가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그러고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상황을 벗어나고자 아무 말이나 빨리 덧붙였다.

“저녁은…….”

창원댁이 감동해 마지않을 대사였다. 내가 지건호의 저녁 식사 여부를 묻고 있다니. 장족의 발전이다. 만약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이제야 부부 같다며, 살갑게 웃어보라고 한술 더 뜨며 거들었을 것이다. 맘 넓은 여자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느니 하는 소리로 어제도 내게 조언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내게는 남자에게 떨 아양 같은 건 없었다. 나는 그의 구두가 남긴 흔적을 원망스레 흘긴 뒤 눈꺼풀을 접어 올렸다. 뻘쭘해 죽을 것 같은 나와는 달리 다행히 그는 별 반응이 없었다.

사실 그가 저녁을 안 먹었다고 해도 문제였다. 까딱하면 그와 마주 앉아 저녁을 먹어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오늘은 간식도 넘긴 터라 배가 좀 고프긴 했지만 일단은 지금 상황부터 벗어나는 게 좋을 듯했다.

“쉬어요, 그럼.”

어깨를 으쓱이며 서둘러 등을 돌렸다. 물기 남은 맨발이 대리석 바닥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첩, 첩, 거실에 울렸다. 그렇게 몇 발짝 내디뎠을까. 지건호가 입술을 뗐다.

“봤어?”

등을 돌려 멀뚱히 그를 바라봤다. 뭘 봤냐고 묻는 걸까. 내가 봐야 할 게 있어서 묻는 건지, 아니면 보지 말아야 할 게 있어서 확인하는 건지. 의도 모를 시선이 내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탐문하는 듯한 눈빛이 짙어졌다. 그와 나 사이의 공기는 모두 압축된 양, 내 기억도 진공 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나는 침묵했다. 그러나 지건호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언젠가 비슷한 대화를 한 것 같은 기시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길어지는 침묵에 그가 자조하듯 쓴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하긴. 봤어도 기억이 안 났겠지.”

한탄과도 같은 혼잣말이었다. 입꼬리에 퍼석하게 매달린 웃음을 보자 불쑥 다른 감정이 치솟았다. 기억이 없어 답답한 사람은 난데, 왜 되레 날 책망하는 기분일까. 억울함을 꾹 누르며 그에게 말했다.

“불만 있으면 정확하게 말해요. 뭘 봤냐고 묻는 건데. 내가 꼭 봐야 하는 거라면 직접 내 눈앞에 보이면서 설명하든지.”

“…….”

“당신 말대로 난 아직 기억 온전치 못한 사람이에요. 나라고 안 답답하겠어요?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이 안 나는 걸 어떡해. 그러니까 내가 꼭 알아야 할 게 있다면 차라리 대놓고 말을 해 줘요. 필요하다면 외우기라도 할 테니까.”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잘됐네, 그럼.”

쏘아붙이고는 보란 듯이 슬리퍼를 내려놓았다. 던지다시피 한 슬리퍼 두 짝이 바닥에 뒹굴었다. 나는 성질부리듯 발을 끼워넣고는 침실로 걸음을 뗐다. 그러자 그의 목소리가 내 등 뒤에 빠르게 달라붙었다.

“……발.”

발? 씨발? 혹시 지금 나한테 욕을 한 건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건 아닌 듯, 지건호가 내 발에서 시선을 끌어올리며 되물었다.

“괜찮아?”

그의 말을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었다. 맥락 없는 질문에 눈썹을 찌푸렸다. 뭔가 참아내는 것처럼 그의 턱 근육이 움찔거렸다. 목울대를 크게 꿀렁이던 그는 내가 말없이 있자 됐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셔츠를 입은 그의 가슴팍이 크게 솟았다가 내려왔다.

“뭐가 괜찮아요?”

지건호가 먼저 내 시선을 피했다. 대답 않겠다는 뜻이다. 이처럼 무시를 당하는 건 또 나였다. 난 그대로 몸을 돌려 침실로 들어갔다. 일부러 문을 꽝, 소리 내어 닫을까 하다가 애 같은 짓은 하기 싫어 말았다.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가 그대로 뒤로 누웠다. 벗겨지지 못한 슬리퍼가 발에 걸려 달랑거렸다. 그와의 신경전에 에너지를 다 써버렸는지, 허기진 배에서 먹을 것을 찾는 소리가 났다.

그냥 뭐라도 챙겨 먹을까. 아, 지금 바로 나가기는 좀 민망한데. 나는 눈을 감고 달래듯이 주린 배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봤어?’

조금 전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했다. 딱 두 음절의 짧은 말. 그러나 그 낮은 목소리는 끊임없이 내 머릿속을 헤집었다.

보긴 대체 뭘 봤냐는 거야. 내가 이 집에서 보는 것이라곤 기껏해야…….

‘너 닮은 것 같다, 지원아.’

‘무슨 소리야. 내가 이렇게 못생겼어?’

‘어릴 땐 그랬는지도 모르지.’

문득 떠오른 기억에 눈을 번쩍 떴다.

기억 속 지건호는 뒤에서 날 껴안은 상태로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큭큭대며 웃었다. 간지럽다며 버둥거리자 그가 내 아랫배에 손을 붙이며 제게 끌어당겼다. 나는 마지못해 그의 가슴팍에 등을 기댔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오늘처럼 비가 그친 날, 계절은 가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춥다고 이제 그만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던 걸로 봐서 밖에 있었던 것 같다. 정원에 있었던 걸까.

이건 언제 적 기억인지. 행복에 기꺼운 상태로 떠들던 모습은 조금 전 우리와는 너무 달라 이질감이 느껴졌다.

……어쩌면 이것 또한 조작된 기억일 수도. 운전자는 따로 있다는데 나는 다르게 기억하던 것처럼.

배에 올려둔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심장을 차가운 곳에 꺼내둔 기분이었다. 열띤 감정은 조금 전 지건호의 냉담함에 질려 물기로 얼룩졌다. 끝도 없이 침잠하는 느낌에 머리가 절로 무거워졌다.

약을 먹을까. 내 널뛰는 감정을 다스리려면 약이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바닥에 발을 내렸다.

‘신지원. 너 미쳤어? 제정신이야?’

순간 환청과 함께 피투성이 상태의 발이 겹쳐졌다.

이게 무슨. 핏물이 흥건하게 러그를 적셨다. 아악, 놀라 고함을 질렀다. 고통은 없었다. 환각인 게 분명했지만 선연한 핏자국은 시야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턱이 덜덜 떨렸다.

그때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지건호가 뛰어 들어오다 말고 멈춰 섰다. 나는 곧장 고개를 들었다. 피가, 발이, 아니 그냥 약 좀…….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건호는 지금 날 뭐라고 생각할까. 드디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까. 그럼 그는, 날 버리게 될까.

침을 꼴깍 삼켰다. 조금은 궁색하게 보이겠지만 놀라 굳은 그에게 그냥 별일 아니라고, 거미 같은 걸 봐서 그렇다고 변명할 생각이었다. 뭐, 지건호가 딱히 놀란 것 같지는 않지만.

나는 불규칙한 호흡을 다듬으며 목소리를 쥐어짜듯 내뱉었다.

“별일 아니에요. 그냥 좀…….”

그러자 내 상태를 살피듯 아래위로 훑던 그가 내 말을 자르며 말했다. 걱정하는 기색보다는 찰나의 의문을 담았던 눈으로 날 보면서,

“저녁 먹게 나와.”

찰나의 다정을 담은 고요한 목소리로.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여전히 낯선 공간에서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피투성이의 발은 사라졌길 바라며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다행히 언제 헛것을 봤냐는 듯 발은 멀쩡했다. 안도하며 숨을 작게 내뱉자 그제야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환각은 정말 이대로 끝난 게 맞을까. 밀려든 기억에 나는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몸만 회복되었을 뿐, 나는 여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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